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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에필로그 2 (92/92)


92. 에필로그 2
202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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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고 보니 정작 중요한 서류를 제가 깜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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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안 가져온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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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요.”

상진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아가에게 정신이 팔려 정작 중요한 건 건네지도 않고 가려 했었다.

실소를 흘린 지훈이 서류를 받고는 대뜸 상진의 팔을 붙들고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상진은 어어, 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그를 따라갔다.

그렇게 세 사람이 먼저 식탁에 앉게 되었다. 애란이 윤 회장과 함께 지호를 본다며 나중에 먹겠다고 한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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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님하고 오랜만에 식사하게 되어서 기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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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기뻐요. 맛있게 드세요.”

산해진미를 앞에 둔 상진의 눈동자가 밝아졌다. 전복 삼계탕에 갈비와 스테이크에 바닷가재까지 온갖 고급스러운 요리들이 다 올라와 있었다.

반찬 하나하나 골고루 맛을 보며 허기를 채운 상진은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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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가가 아빠를 안 닮고 형수님을 닮아서 아주 잘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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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우리 지호는 나를 쏙 닮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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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형수님 살이 쏙 빠진 것 같습니다. 아이 키우시느라 고생이 많으신가 봅니다.”

상진은 지훈을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며 해인만 바라보았다. 물론 그는 진심으로 오밀조밀 예쁜 아가가 해인을 쏙 빼닮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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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은요. 이제 많이 편해졌어요.”

해인이 편하게 웃으며 차분히 말했다. 붓기도 아직 다 안 빠졌는데 살이 빠지다니 역시 상진의 말은 믿을 게 못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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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호가 형수님 닮아서 까탈스럽지 않고 유순한가 봅니다. 엄마 고생도 안 시키고. 에휴. 우리 부사장님 닮았으면 아주 가시밭길이었을 겁니다.”

힐끗 지훈의 눈치를 살핀 상진이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눈동자엔 까탈스러운 상사를 향한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상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훈이 그를 쏘아보았다. 기껏 밥 먹고 가라고 했더니 헛소리가 심하네.

누가 봐도 지호는 제 얼굴을 쏙 빼닮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저 녀석만 꼭 안 좋은 사족을 덧붙이며 해인이를 닮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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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먹고 가라!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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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모님께서 식사하시고 가라고 했는데 왜 형님이 짜증이십니까. 천천히 꼭꼭 씹어서 다 먹고 갈 테니까 신경 끄십시오.”

상진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해인이 보기엔 상사와 부하직원이 아니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형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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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비서님. 식사하시고 차도 한잔하고 가세요.”

해인의 말대로 상진은 식후에도 함께 차를 마셨다. 그러고는 기어이 지호를 한번 안아 보았고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지훈과 해인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짐을 챙겼다. 아이와 떨어지기를 아쉬워하는 윤 회장으로 인해 한밤의 이별은 조금 길게 이어졌다.

피곤했지만 손주와 할아버지의 성공적인 만남이었다.

* *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잠이 들 줄 알았던 지호는 외려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깊은 잠을 잔 까닭이었다. 덕분에 지훈도 쉬지 못하고 꼼짝없이 지호와 놀아 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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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야! 아빠, 해 봐!”

이런 걸 틈새 교육이라고 한다. 지훈은 장난감 기차로 놀아 주면서도 틈틈이 아빠, 를 강조하며 언어 훈련을 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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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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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 가 아니라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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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호는 착실히 옹알이를 해 주었다. 팔을 흔들기도 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리기도 하는 아이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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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들! 오오가 아니라 아빠! 아빠,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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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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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지켜보던 해인의 눈매가 삐뚜름해졌다. 팔불출 아빠라는 것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엄마도 없이 아빠로 건너뛰는 게 말이 되나.

아무리 아빠라지만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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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 씨. 우리 지호는 분명히 엄마, 부터 말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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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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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엄마. 그러니까 괜한 헛수고 하지 말아요. 방금 지훈 씨가 들은 말도 아빠가 아니라 정확히는 아오, 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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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사실 나도 아오, 라고 들은 것 같기는 해.”

해인의 말투가 지나치게 살벌했기에 지훈은 곧바로 수긍했다. 하지만 제 아들은 천재니까 엄마를 건너뛰고 아빠라고 할 수도 있다는 희망은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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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다행이에요. 우리 지호가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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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우리 지호가 그렇게 귀염을 떨 줄 누가 알았겠어. 가서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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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확실히 아빠는 안 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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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안 닮……은 것 같은데…….”

지훈이 쭈뼛쭈뼛 덧붙였다.

사실이 그랬다. 해인이도 절대 애교가 많은 스타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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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그랬어요? 다시 말해 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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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아무 말 안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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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 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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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니까. 어? 우리 지호 침 흘린다. 침 닦아 줘야겠네.”

지훈이 지호를 안은 채로 황급히 일어났다. 달아나듯 소파를 벗어나서는 안방으로 들어가 차분히 숨을 골랐다.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애교가 많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부드럽게 넘어가지, 저렇게 살벌한 눈빛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즘 들어 우리 해인이가 무척 예민했다. 육아에 지치고 피곤해서 그럴 수도 있으니 잠시 혼자 쉬게 해 주어야겠다.

그러다 보면 저 살벌한 눈빛도 부드러워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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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는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뒤집는가 싶더니 어느새 배밀이를 하고 금세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젠 잡을 것만 있으면 두 팔에 힘을 주고 일어서서는 옆으로 한 걸음씩 떼곤 했다.

아빠로서의 지훈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사랑이 우선이 되고 육아가 먼저가 되는 기이한 상황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턱을 괴고 옆으로 누운 지훈의 곁으로 해인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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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 씨. 나 마트 좀 다녀올 거니까 지호 좀 잘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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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갈까? 아니, 내가 다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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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나가서 공원 한 바퀴 돌고 올 거니까 기다리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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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바람 좀 쐬고 와!”

해인이 가까이 왔다 다시 멀어지자 지호가 서둘러 엄마를 따라갔다.

요즘 들어 기는 속도가 빨라지긴 했지만, 엄마는 이미 중문을 넘어서 버렸다.

별 소득 없이 다시 돌아온 지호가 까르르 웃으며 지훈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기 천사 같은 아들의 모습을 보며 지훈이 제 앞에 있던 자동차를 드르륵 움직여 주었다. 그게 재밌는지 지호가 그대로 따라 했다.

일어나서 제대로 놀아 주어야겠다 싶어 몸을 일으키려는 바로 그때였다.

눈앞이 흐려지더니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지훈은 고통스럽게 가슴을 움켜잡았다.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119에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쓰러지면 안 된다 마음을 다잡으며 황급히 핸드폰을 찾아보았다.

소파 테이블 위에 핸드폰이 있었다. 무겁게 꺼져가는 몸을 이끌며 한 걸음을 내디뎌 보았다.

하지만 고작 한 걸음을 딛는 것이 전부였다. 이내 추락하듯 몸이 쓰러지는 것 같더니 새까만 어둠이 밀려왔다.

설마 죽는 건가 생각하는 그 순간 새하얀 빛과 함께 눈앞으로 새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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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지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샹젤리제에 불빛이 반짝이는 넓은 홀에 수많은 사람들.

해인과 처음 만난, 홈커밍데이가 있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지훈은 한눈에 해인을 찾을 수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에 풋풋한 얼굴을 한 해인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홍조가 있는 두 볼은 해인을 더욱 앳되어 보이게 했다. 그녀는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수줍게 누군가를 바라보기도 했다.

해인이 바라보는 누군가가 자신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저렇게 몰래몰래 저를 보고 있었다 생각하니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 와중에도 숨은 막히고 의식이 희미해져 갔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구나 싶던 그 순간 제 모습을 한 남자가, 그러니까 바로 자신이 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또한, 그때 해인이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아련한 눈동자로 제 뒷모습을 본 그녀가 아쉬운 듯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지훈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문을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 해인을 보았다는 것을.

하지만 해인이 고개를 숙였으니 시선이 엇갈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꺼져 가던 지훈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가지 말라고, 그대로 가지 말고 해인에게로 가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쳐 보아도 나오는 말이 없었고,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닿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영혼이나 다름없는 제 상황을 깨달으며 지훈은 생명이 꺼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더 이상은 숨도 쉴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 생의 가장 후회되는 순간을 보여 주는 것인가.

신이 너무나도 야속했다.

왜 하필이면 지금 이런 것을 보여 준단 말인가. 그때 그렇게 가지 않았더라면, 조금만 더 일찍 돌아보았더라면 아마도 우린 그렇게 어렵게 서로를 잃고 헤매지 않아도 되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게 죽음이라면 난 또 해인이를 두고 먼저 가야 하는데…….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해인아! 미안해. 널 두고, 내가 널 두고, 우리 아이를 두고…….

울컥 차오르는 설움에 그저 미칠 것만 같던 그 순간,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제 정말 끝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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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 씨, 지훈 씨! 일어나 봐요.”

귓가로 저를 부르는 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숨은 막히는데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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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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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헉.”

막힌 숨이 터지고 눈이 번쩍 뜨였다.

눈앞으로 해인이 저를 근심스럽게 내려보는 것이 보였다.

나, 살아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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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 씨? 괜찮아요? 자면서 웬 땀을 이렇게 흘려요. 얼굴도 일그러지고, 눈가에 이거, 눈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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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 잔……, 거야?”

오래전 해인을 만난 건 아마도 꿈이었나 보다. 지훈은 지그시 해인을 바라보았다. 꿈에서 보았던 그 해인이 맞았다.

지금도 여전히 수수하고 심지어 더 예쁘고 사랑스러운 나의 주해인.

확인과 동시에 누운 채로 덥석 그녀의 목을 당겨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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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갑자기 왜 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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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꿈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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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꿈을 꾸었길래 이래요. 아이 좀 보라고 했더니 그새 잠들면 어떡하냐고요. 우리 지호가 어디로 갈 줄 알고.”

들려오는 핀잔에 지훈은 재빨리 해인을 안은 팔을 풀었다.

꿈이라서 다행이었지만 그 아찔함에 지금도 가슴이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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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안. 우리 지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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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지훈 씨 배 위에서 말을 타고 있었네요. 아주 신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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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훈의 낮은 탄식은 곧바로 신음으로 변했다. 지호가 다시 지훈의 배를 엉덩이로 내리찍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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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숨이 막힌 이유가 있었네.

그저 죽지 않아 다행이구나 싶어서 벌떡 일어나 지호를 안아 주었다. 아이는 까르르 웃었고 지훈은 그런 아들을 향해 볼 뽀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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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 씨!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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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찔했던 꿈을 떠올린 지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꿈에서처럼 너는 나를 보고 있었을까. 처음 봤을 때부터 반했다고 했으니 아마도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를 마주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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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 씨! 오랜만에 파스타 어때요?”

멀리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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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이가 좋으면 나도 좋아.”

사실 그날, 청초하고 수수했던 해인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돌아보았었다.

차라리 그때 연락처라도 물었더라면 우리에겐 또 다른 미래가 펼쳐졌겠지.

지금 이렇게 행복해서 다행이었지만 잠시 엿보다시피 보고 온 과거는 여전히 아쉬웠다.

그 아쉬움이 지금의 넘치는 행복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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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야! 아빠,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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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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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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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엄마! 엄마!”

분명히 엄마, 였다. 두 귀를 쫑긋 세워 듣던 지훈의 입가로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해인이 모르게 날이면 날마다 그리 노래를 불렀건만 결국 엄마가 먼저였다.

이것은 누가 뭐래도 분명한 저의 패배였으나 그 패배가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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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먹을 게 많아요. 갈비도 있고, 미역국도 있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이것저것 해 놓고 가셨네요. 일단 그것부터 해치워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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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 난 상관없어.”

어느새 주방에서 돌아온 해인이 소파로 가서 편안히 앉았다. 지훈의 품에 안긴 지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날이 더워서 자꾸만 기력이 없고 지쳐가는데 지훈은 여전히 힘이 남아도는 것 같았다.

테라스를 넘어온 여름의 햇살이 아이를 안고 선 그를 밝게 비추었다.

해인은 지훈을 처음 본 그날을 떠올렸다.

수려한 외모와 곧고 품위 있어 보이는 자태에 몇 번이나 눈길을 뺏겼던가.

지훈은 떠날 때도 미련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었다. 제 기억 속의 그는 그런 남자였다.

그런 그가 가끔 이혼을 후회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해인은 알았다.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천성적으로 무감하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그가 소중한 것을 잃지 않고도 사랑을 깨닫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어디에나 변수는 존재한다.

가끔 불처럼 타오르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제 생각이 틀린 것 같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는 참 알 수 없는 남자이긴 했다.

아이를 안은 채로 지훈이 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입가를 휘며 부드럽게 웃는다.

깊고 검은 눈동자가 새삼 오묘한 빛으로 가슴을 물들였다. 처음 뛰었던 가슴이 기억을 더듬으며 설렘을 더해 주었다.

그 순간 지훈이 아들의 이마에 머리를 맞대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해인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도저히 제 남자가 아닐 것 같았던 남자가 제 아이를 안고 웃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있고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다.

더 바랄 것이 없는 한가로운 오후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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