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1장. 아네모네의 성녀
* * *
하늘에 닿을 듯이 드높이 치솟은 마천루.
지난 세월, 절망의 상징이던 탑은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잔해들 속에서 뒤엉키는 두 개의 인영. 만유인력의 법칙따윈 무시한다는 듯이 치고받는다.
이형의 존재가 포효성을 내지른다.
천지를 뒤흔드는 괴성과 함께 번갯불이 번쩍인다.
태양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짙은 뭉게구름을 뚫고서 나타난 번개, 그 첨단을 손잡이마냥 부여잡고 후려친다.
자연현상조차 손발과 같이 다루는 이적.
그 존재 앞에 감히 뻣뻣이 고개를 치켜들 이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마주 싸우던 남자가 필사의 고함을 내지른다.
그와 동시에 새하얀 검신의 검을 치켜든다.
검을 뒤로 넘긴다.
근육이 팽팽해지고 허리가 크게 돌아간다.
전력의 베기.
비명과도 같은 기합성을 내지르며 남자는 검을 휘둘렀다.
신성한 빛이 번뜩이며 대산조차 갈라버릴 검기가 발출된다.
사방팔방 그물처럼 조여오며 작렬하던 뇌편(?)이 쫘악 찢어진다.
이형의 존재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강인한 근육을 찢어발기고 불가침이던 상체에 검흔을 아로세긴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곧바로 흔적이 사라지지만 그 몸은 경직되었다.
아주 잠깐의 틈.
불과 1초도 되지 못하는.
그야말로 찰나의 틈.
그러나 그 찰나는 남자에게 있어서 영원이었다.
뒤는 없다, 남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연전.
사지가 멀쩡한 것도 겉모습만 그렇지, 내부는 이미 진탕이 되어 난리를 친다.
한계에 다다른 몸이 비명을 질러대지만 잠시라도 주춤한다면 곧바로 죽음을 맞이할 터.
그러나 이만한 데미지를 받은 건 적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좋아할 순 없다.
애당초 종이 다르다.
가진바 한계치가 다르다.
찰나의 틈을 놓칠 수 없던 남자는 불식간에 파고들었다.
다시 번뜩이는 칼날. 근육질 상체에서 사라져가던 검흔이 재차 나타났다. 전과 다르게 피가 치솟고 회복되는 기미가 없었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검격이 번뜩이고, 마침내 이형의 존재는 고통이 섞인 외침을 토해낸다.
이형의 존재는 잠깐 동안에 치명상을 입고서 발악을 시작한다. 둘 사이가 근접한 까닭에 필연적으로 육박전이 시작된다. 거기다가 추가로 수를 쓴다. 먹구름에 안 그래도 어두웠던 사위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칠흑으로 뒤덮힌다.
불러내진 어둠에 둘의 신형은 완전히 가려지고, 누구 하나 보이질 않는다.
단지 쉼없이 들려오는 파공성과 땅울림으로 간간히 그 말미나마 잡아챌 수 있을 뿐.
그렇게 이주야가 흐르고.
“───!”
“……!”
잔뜩 낀 먹구름을 뚫고 한 줄기의 햇살이 쏟아져내렸다.
마침내 마왕이 토벌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용사가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했다.
*
잠깐 자기소개 좀 해보겠다.
용사는 용사다.
물론 용사의 이름이 용사라는 건 아니다. 그의 역할? 직업?이 용사라는 의미다.
정작 본인도 수십 년간 호칭이 용사로만 고정되어 있다보니, 간혹 ‘내 이름이 원래 용사였던가?’라고 착각할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에이, 설마. 어떤 부모가 자식 이름을 용사로 짓겠어.
어쨌든 이야기를 계속해보겠다.
이 세계로 오기 전, 지구에 있을 때 용사는 수험생이었다. 고등학생. 그것도 스트레스 지수가 가장 높다는 고3.
사각사각. 연필과 샤프, 지우개 소리만이 가득했던 교실에서 어린 용사는 야자 감독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슬쩍 몸을 뺐다.
학교 밖으로로 나오자 숨이 탁 트였다. 여름임에도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고 네온 사인이 가득한 길거리는 축제를 열린 것 마냥 활기차보였다.
반강제적으로 진행하는 야자에서 공부 효율이 얼마나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그냥 엎어져 자는 걸 방치할 정도라면 그냥 자율적으로 맡기면 되지 않나? 윗 어른들의 심리를 도저히 모르겠다며 발걸음을 옮겼다.
태어나서부터 끊임없이 이어만지던 레일.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루에 지쳐버린 용사에게 비현실이 찾아왔다.
눈앞에 갑작스레 떠오른 푸른 인터페이스 창. 뒷걸음질쳐도 그만큼 다가오는 신비한 물건. 증강현실이라고 착각할 수도 없는 주변인들의 무신경함. 타인들의 무인식 속에서 홀로 인식한 용사는 무심코 글자들을 읽었다.
돌아가기만 하는 지루한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보시지 않겠습니까?
Y/Y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지정되지 않은 수상쩍은 문장. 그러나 바로 그 신비로운 부분에 끌린 듯, 십대의 용사는 홀린 듯이 Y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생각을 하고 살아야한다고.
어째서 Y/Y로 선택지가 답정너인지 눈치라도 챘어야 했다.
“그랬으면 이러진 않았겠지.”
용사는 자그맣게 푸념했다.
“화려함 뒤에는 짙은 그림자가 생긴다는 걸 깨달았어야 했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않고 거적떼기를 망토처럼 두른 차림새.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와 채 깎지 못한 듬성듬성한 수염은, 이게 과연 그 ‘용사’인가 의심하게 만든다.
주변을 둘러보면 그가 앉아 있는 장소는 버려진 시골 교회임을 알 수 있었다. 텅 비어있는 제대(??). 삭아버린 긴 나무 의자. 깨진 창틀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오래된 교회에는 지난 전란 동안에 하나둘 사람이 떠나고 신 집을 짓는 거미만이 남아 있었다.
마왕을 물리치고 대륙에 광명을 가져온 용사가 지내는 장소라곤 생각키도 힘들 정도.
그러나 지난 5년간, 도피 생활을 해봤던 용사에게는 어색하지 않았다.
“이런 젠장. 그럴 줄 알았으면. 이십 년을 넘게 구를 줄 알았으면 그냥 생까고 마는건데. 아이고 멍청한 놈아….”
바보같아도 그렇게 바보같을 수가 있었을까.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용사가 어리석었던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자니,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냐?”
황당한 걸 본다는 말투. 머리털을 그만 쥐어뜯는 걸 멈춘 용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대 뒤편에 숨겨져 있던 문이 열리고 금발의 미청년이 걸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은은하게 빛나는 예복. 황금으로 뽑아낸 듯한 실로 자수를 새겼다. 이 예복을 입은 남자는 또 어떤가. 매끈한 피부. 금발에 청안(?)의 미모.
여기가 지구였다면 ‘어머머! 연예인가 봐.’하며 온통 이목을 끌 외견이지만… 용사는 안다.
저 새끼 40줄이다.
“왜 혼자서 땅을 파고 기어들어가고 있어. 두더지야? 아니면 이젠 흙이라도 먹어?”
입담이 거친 미청년의 정체는 바로 ‘물의 여신의 성자’였다.
용사가 최초로 얻은 동료들 중 하나. 그들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살아남아 대전을 끝낸 주역이었다.
지금은 교단 본부에서 행정일로 갈리고 있다고 건너 건너 듣긴 했다만. 가까이서 보니 눈 밑이 퀭한 게 어지간히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나 싶었다.
먼지 앉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성자가 말을 마쳤다.
“…아, 진흙은 같이 먹었었지. 아무튼 뭔 지지리 궁상을 떨어대고 있는 거야.”
‘말투 띠꺼운 건 5년 만에 만나도 변하질 않네, 이 새끼는.’
내심 짜증이 치솟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만 했기 때문이다.
마왕이 죽은 지 5년이 지났음에도 한창 전후 복구 처리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바쁜 녀석이다.
그런 녀석을 개인적인 일로 이런 구석진 시골 교회로 불러낸 건 용사 바로 그 자신. 어느 정도 투덜거림 따위 충분히 들어줄 만하다.
어디까지나 내가 부탁한 걸 무사히 들어줬다면의 이야기지만.
“남이 궁상 떨든가 말든가. 그보다…”
말꼬리를 살짝 끈 용사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로 물었다.
“일은 어떻게 됐어?”
“끝났어.”
성자는 짧게 대답했다.
“니가 맡긴 성검은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봉인됐다. 그래서….”
“앗싸아아아아아아!!”
은퇴다아아아아아아!!!
비로소 자유를 되찾은 노예처럼, 용사는 환희에 찬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렇게 좋냐?”
말이 씹혔지만 성자는 딱히 신경쓰지 않고 옷자락을 정리하며 용사에게 물었다. 용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임마!”
생각보다 더한 긍정적 반응에 성자의 얼굴이 싸하게 미묘해진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건 알겠는데, 용사의 증거 중 하나인 성검을 봉인한 사람 앞에서 용사로서 보일 모습은 좀 아니지 않나?
그러나 그 내막을 알고 있는 존재라면 애석함을 금치 못할 것이다.
“지난 5년동안 내가 걔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아?! 매일 잠잘 때마다 뚫으려(?) 했다고!”
‘뭘.’
“그딴 취향 없다니까 그냥 쌩까버리고! 미치고 환장하는 줄 알았는데!”
‘뭔 취향.’
“며칠 전엔 뻔히 두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아주 그냥 대놓고 뚫을려고(?) 했다니까!”
“더러우니까 그만 닥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