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1장. 아네모네의 성녀(2)
* * *
고생한 경험을 공감받지 못한 용사가 상처받는 얼굴을 하지만. 쿨한 성자는 신경쓰지 않는다.
울상짓는 사내새끼는 그냥 꼴사나울 뿐!
성자는 혼자서 땅을 파고 들어가고 있는 용사를 보며 생각했다.
‘그냥 할 말만 하고 가야겠다.’
오랜만에 만난 겸 술이나 한잔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아깐 웃더니 이젠 우네.’
저런 텐션에 알코올이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개가 되겠지.’
용사의 술버릇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터라, 술을 권할 순 없었다. 그냥 할 말만 하고 빠르게 사라지는 게 더 도움이 될 터. 겸사겸사 챙겨온 돈주머니를 안겨주면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으리라.
“아무튼 성검에 대한 건은 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성검의 정령이 낌새도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연 게이트로 바로 보내버렸으니까. 외부로 나올 일은 없다. 물론 계시가 내려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용사와 성자도 알다시피 그럴 리는 없었다.
원칙적으로 천상의 신들은 방임주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계시가 거의 다발로 내려왔지만,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마왕은 위협적인 존재였다. 원인이 되는 마왕이 죽은 이상 근시일 내에 계시가 내려올 리는 없었다.
용사가 말했다.
“그거면 충분하지.”
설령 계시가 내려온다고 해도 적어도 수백년 후. 이미 용사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다가 죽고 난 다음일 것이다.
딱히 그러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혹시나 누가 알아볼까 겁난다는 듯, 추레한 몰골을 하고 있지만 이래뵈도 세계 최강의 일각이다.
마나는 생명의 원천. 강자 중에서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세계급에서 손꼽히는 클라스의 강자인 이상, 오래오래 살리라.
“깔끔하게 살다가 깔쌈하게 가버리면 그만이지!”
“니가 그런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뭐…. 그보다.”
성자는 허릿춤의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냈다. 입에 하나를 물고 주머니 채로 용사에게 넘겼다. 육포 주머니를 기껍게 받아들은 용사는 뒤이어 들려온 말에 정곡을 찔렸다.
“성검은 이렇게 처리했다치고 나머지는 어떡할래?”
“윽!”
“제국황녀, 눈의 마녀, 성녀, 용병여왕…… 그리고 또 누가 더 있더라.”
“윽! 억! 윽! 아악!”
한 명 한 명 언급될 때마다 비명같은 소리를 내는 용사. 등골이 서늘해진다. 슬며시 치켜든 눈이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너 그러다가 진짜 큰일 난다고 계속 경고했지. 내 말 안듣다가 이게 무슨 꼴이냐, 이게.”
“나도 알아. 안다고. 하지만….”
성자가 언급한 여인들은 지금 대륙에서 가장 유명세를 끌고 있는 이들이었다. 각양각색의 매력을 가진 이들은 공통 분자가 존재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인과관계. 그들은 모두 용사와 연이 깊은 여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속된 말로 ‘플래그’를 꽂아둔 히로인들이라는 의미다.
물론, 이렇게 보면 용사가 쓰레기일 수도 있으나….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다 사랑해줄 자신이 있었다고!”
어. 쓰레기다.
뻔뻔스레 지껄이는 용사에게 성자가 구라치지 말라며 핀잔을 놓았다.
“자신 있기는 개뿔이! 야, 우리 솔직해져보자. 그냥 누구 하나랑 딱 이어지고나서 덮쳐올 후환이 두려웠던 거잖아. 대책없이 뒤로 미루기만 하니까 이런 사단이 난 거지! 어디 정착도 못하고!”
“으어어억!”
비겁하게 팩트로 때리지 말고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자!
부들부들 떨던 용사는 어느 순간 축 늘어졌다. 기운이 없다는 듯 먹던 육포도 툭 떨군다. 고개를 푹 숙인 용사의 얼굴은 자책과 회환의 빛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냥 칼빵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뱃심으로 버텨줄 수 있는데…. 진짜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
“네가 말한 표현 중에 이런 게 있었지 않냐.”
“뭔데.”
“자업자득.”
“……나쁜 새끼, 끝까지 팩트로만.”
팩트 폭력에 내상을 입고선 한숨을 내쉰다. 말없이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주는 성자.
‘그래도 친구라고.’
위로도 해줄 줄 알고… 참된 친구다.
……이거 병 주고 약 주기 아닌가?
퉁퉁.
그때였다.
자그마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화를 나누던 용사와 성자가 흠칫 놀랐다.
퉁퉁.
교회의 대문. 은밀하게 만나야 했던 지라 만일에 대비하여 잠가둔 그 문. 빗장을 걸어둔 문서 나는 소리였다.
퉁퉁.
여기서 문제다.
용사와 성자가 있는 이 장소는 시골 교회이다. 그런데 주변에는 마을이 없다. 원래는 있었지만 대전 때 전화에 휩쓸린 이후로 누구 하나 돌아오지 않았다.
시골 중에서도 외곽이라 방문객이 있을 리도 없었다. 지나가는 나그네라고 하기엔 더욱 수상쩍었다.
성자가 진행한 성검 봉인의 의식은 고난이도의 의식이다. 집중을 위해 주변에 결계를 펼쳐두었다. 성자가 마음먹고 펼친 방어 결계는 사람은 고사하고 웬만한 강자들 조차 쉬이 접근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저 문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노크를 하고 있는 존재가 성자의 감각을 속였다는 의미였다.
‘불안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
용사는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수십년간 전장을 누비며 갈고 닦아온 육감이 당장 도망치라고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성자도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용사가 떨려 나오는 목소리를 애써 가라앉히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야, 성자야.”
“…왜, 용사야.”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낮추는 성자.
퉁퉁퉁퉁퉁퉁퉁.
“……너 혹시 누구랑 같이 왔냐?”
“……아니. 내가 너 사정 아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
“……그럼 저건 누굴까.”
“……지나가던 행인, 은 아니겠지. …………지금 나만 이상한 생각 드는 거 아니지? 응?”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은, 지금 서로가 똑같은 가정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가정은 이내 사실이 되었다.
『용사님──.』
문틈 사이를 타고 가느다란 음색이 들려왔다.
『용사님을 모시러 제가 왔답니다.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그녀다.
성녀가 왔다.
『용사님?』
다시금 들려오는 목소리. 발끝이 부르르 떨렸다. 이런 위기감은 사천왕과 싸울 때나 느꼈는데!
‘도대체 왜 쟤가 여기서 나와! 너 올 때 뒤를 밟힌 거 아냐?!’
‘내가 짬이 얼만데!’
의심하는 눈초리에 억울하다고 말하는 성자.
그러나 이 의심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스펙 차이 생각 안하냐? 쟤는 몽크 혼성이고 넌 순정 힐러잖냐.’
‘여전히 알아먹기 힘든 소리지만 대충 뭔 의미인 줄은 알겠다.’
짧게 대답한 성자가 노크 소리가 들려오는 문쪽을 주시했다.
퉁퉁.
거리던 소리는 어느샌가
쿵쿵.
으로 바뀌어 있었다.
『용사님, 여기 계신 거 다 알고 왔답니다. 어딜가시든 전 용사님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거, 아시잖아요.』
‘용사야,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아무리봐도 너가 뒤를 밟힌 것 같다.’
‘이런 젠장!’
사실 여부는 직접 물어봐야 알겠다만.
쾅!
뭔가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문이 거칠게 흔들렸다.
가느다란 손가락.
햇빛 한번 받아본 적 없는 듯이 새하얀 살결그 자체로 아름다운 손이 문을 뚫고 나온다.
뻥 뚫린 구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손도 아니고 발도 아니고 코였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스으읍, 하아. 용사님의 냄새….”
‘미친 년…!’
‘조용히! 저 정도로 여기까진 못 봐!’
둘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문의 구멍에서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모서리 쪽에 붙었다. 이대로 숨을 죽이고 있으면 가지 않을까. 흔히들 초식동물들이 하는 사고를 똑같이 하고 있는 두 남자들은 몰랐다. 맹수는 한번 노린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을.
“스으으읍, 하아아. 스으으읍, 하아아. 이 냄새는… 용사님, 일주일 동안 씻지 않으셨군요. 하기야 그럴 틈도 없으셨겠지만…. 아니네요, 씻지 않으신 것 치고는 냄새가 너무 옅어요. 기본적인 세안 정도는 하신 꾸덕꾸덕한 맛…. 그래도 차마 빨래는 하지 못하셨겠죠. ──핥짝. 일주일동안 빨지 않은 용사님의 속옷… 군침이 싹 도네요.”
……!
“히이이이이이이익! 미친 년! 미친 년! 야이 미친 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닥치라고 했잖아, 멍청한 새끼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