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1장. 아네모네의 성녀(3)
* * *
흔히들 착각하는 요소가 있다.
세상을 구한다는 용사의 위업은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생사를 함께하는 동료들. 보이는 곳에서 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협력자들. 그 외에 수많은 자들이 용사라는 등불을 떠받치는 받침이 되기에 위업을 이룰 수 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용사라고 해도 만능의 초인은 아니며, 적재적소에 필요한 교양이라던가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진 않았다.
탁 까놓고 말해서.
용사에게는 동료들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하다. 그것도 어떤 상황에서도 믿을 수 있는 동료가.
후자의 사실을 나름대로 굴러 가던 파티가 배신자의 수작질로 성자를 제외하고 전원 몰살당하고 나서야 깨달았던 용사다.
용사는 티격태격하던 동료들의 시체 뒤로하고 결심했다.
능력은 둘째치고 신뢰를 제일로 보겠다고. 신뢰를 얻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그 ‘신뢰’가 이런 대참사를 부를 줄이야.
쾅!
겨우 손 하나가 드나들 정도였던 구멍이 머리 하나 들어갈 정도로 활짝 벌어졌다. 아니나다를까, 뻥 뚫린 구멍으로 웬 머리통 하나가 쑥하고 들어온다.
진갈색 단발머리에 자애로워 보이는 외모. 슬며시 감은 눈이 신비스러워야 했지만, 잔해와 먼지가 부스스 떨어지는 나무문에 머리만 덩그러니 나와있으니 호러블한 느낌만 들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성녀는 이내 구석에 처박혀 있던 용사를 발견했다.
“용사님, 찾았다♥.”
시커먼 하트를 뿅뿅 날리며 웃는 성녀. ‘(무)자비성녀’, ‘‘마족 분쇄기’라고 불리던 그 시절의 포스가 절절히 느껴지는 듯한 웃음에.
“흐엉억, 어허악…!”
기겁한 용사는 바퀴벌레마냥 땅을 짚고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저 멀리 제단까지 멀어지는 뒷모습에 재롱떠는 꼬마를 보는 것마냥 귀엽다며 성녀는 입꼬리를 올린다.
“어머나, 성자님도 계셨군요.”
그러던 성녀는 용사 옆에 있던 성자를 발견하고선 말을 걸었다..
“저번에 용사님이 어디 계신가 여쭤봤을 때 모른다고 하시더니…. 역시 거짓말이었어요. 신을 받드는 사람인데도….”
“남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마. 난 사실을 말했어. 그땐 정말 몰랐거든.”
“아셨다고 해도 안 가르쳐 주셨을 거죠?”
“당연한 소릴.”
그럴 줄 알았다는 성녀의 말에 성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차피 별 기대도 안 했답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어깨를 으쓱이는 성자에게 쌀쌀맞게 대꾸한다. 그를 한 번 째려본 성녀의 머리가 쑥하고 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금방 그쪽으로 갈 테니까….”
그리고 가냘픈 손이 나타나 구멍의 가장자리를 부여잡더니.
우지직.
좌우로 벌리면서 잡아 뜯어버렸다.
아무리 관리를 안 했어도 그렇지, 두께가 두꺼운 목재 문을 물렁물렁한 두부마냥 뜯어버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물론, 그 대상이 ‘그’ 성녀라면 말이 된다.
성녀는 뜯겨져나간 문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이대로 그녀가 내부로 들어 온다면 패닉에 빠진 용사는 반항도 못하고 붙잡혀서 그만….
“미안. 그건 안 되겠어.”
막 안으로 한 발짝 내디딘 성녀의 앞을 성자가 가로막았다. 몰래 접선 하는 게들킨 이상 그냥 두고볼 줄 알았는데, 성녀의 눈에 의아함이 떠오른다.
“이게 무슨 짓이죠?”
“보면 알지 않습니까, 성녀 그라시아.”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로 성자가 정색하며 말하자 그라시아는 낯빛을 굳혔다. 그러더니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며 중얼거렸다.
“절 방해하겠다는 건가요?”
“그렇지요.”
“어째서…?”
도무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는 듯 빤히 성자를 바라보는 그라시아.
“용사가 저 모양 저 꼴인 지금이라면 당신이 바라는 대로 용사를 잡을 순 있겠지요. 설령 지금 잡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둘을 위해서라도. 용사에게 여러 관계로 얽혀있는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런데 그건 오늘이 아닙니다.”
사실 성자가 이렇게 나설 이유는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성녀가 용사를 찾아온 건 자업자득이다.
저질러놓고 책임도 지지 않고 회피하려 하는 것도 용사 본인. 귀책 사유가 모두 그에게 있었다. 반론의 여지따윈 요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른바 원인과 결과가 뚜렷해서 굳이 관여해봤자 좋은 꼴 못 본다는 의미다.
게다가 치정 싸움에 끼어 들어봤자 새우 등 터지는 꼴밖에 더 나겠느냐마는.
이런 오지랖을 부리는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오늘은 이대로 물러나세요. 그리고 기다리는 겁니다. 용사가 제 발로 당신을 찾아가는 그 때를.”
생사고락을 함께 헤쳐나온 동료니까 행복을 바라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물론 사람 간의 관계에서 늘 그랬듯이 진심이 올곧게 전해지는 일은 드물었다.
“…지금이라도 못 본 척해주신다면 저도 모르는 척해 드릴게요.”
그것도 맹목적인 사랑에 얽매인 여인이라면 더욱더.
“쯧.”
무사히 대화로 일이 잘 풀릴 걸 기대하다니 감이 죽어도 많이 죽었다.
“신들의 뜻을 대리하는 자로서 고하노니─.”
결단을 내린 성자의 전신에서 새하얀 빛의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 이곳으로 오라.”
성자는 성녀와는 달랐다.
격투술에 재능이 있어 근접직으로 최전방으로 나섰던 그녀와는 달리, 몸으로 하는 전투에는 재능이 전혀 없었다.
생사를 넘나들면서 육체적으로 발전하는 건 오로지 달리기 뿐. 도망치는 것만 한정하자면 암살자보다도 빨랐다.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치료 담당의 특성을 따지자면 적절한 능력이었다. 도주 능력 외에도 성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용사의 동료였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첫 번째로는 압도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회복 능력.
두 번째로는 후열로서 전체적인 전장의 그림을 내다 보며 효율적으로 버프/디버프를 부여하는 전략안.
그리고 세 번째.
“천상의 일곱 번째 관문!”
신들이 사는 천상에 해당되는 개념을 하계로 끌어내려 소환하는 강림(강령술). 이렇게 대체 불가능한 세 가지의 능력을 갖고 있었기에, 동료들은 성자에게 망설임 없이 등을 맡겼다.
───…….
어렴풋이 들려오는, 천상의 신들을 찬양하는 고결한 세레나데.
때묻지 않은 어린 아이들과 천사들이 황홀한 음색으로 부르는 찬송가.
죄인은 다가가는 것도,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천상의 관문이 대리자의 부름에 따라 하계의 시골 한 자락에 강림한다.
그에 따라 관문의 강림이 유지되는 동안에 한정되지만 버려진 시골 교회는 교단의 성소에 버금가는 곳으로 탈바꿈되었다.
숨을 후욱 내쉬며 온몸을 강타하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던 성자는, 근래에 들어서 어느 때보다 명료해진 정신 속에서 손뼉을 마주 쳤다.
“폐쇄!”
절도 있는 성자의 손짓에 환영한다는 듯이 활짝 열려 있던 천상의 관문이 굉음을 내며 닫혀가기 시작한다.
설마 성자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성녀는 뒤늦게 반응하고 땅을 박찼다. 그러나 천상의 힘을 사용하는 강림은 만만하지 않았다.
빛의 기둥이 생길 정도로 충만한 신성력은 성자의 의지에 따라 공간을 왜곡시키며 성녀의 위치를 그 자리에 고정했다.
“이것이… 『강림』…이다. 그라시아, 당신이 ‘나와 용사를 붙잡는다는 진실’에 도달하는 일은 결코 없다!”
“딘! 방해를…!”
쿵.
관문이 완전히 닫히자 성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후.”
성자, 딘은 손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선 뒤를 돌아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용사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켰다.
“야. 이제 제정신이 좀 드냐.”
“…어. 미안하다. 내가 미쳐가지곤.”
추태를 기억하고 있는 용사는 벌개진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를 놓아준 성자는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선 조용히 뇌까렸다.
“됐다. 근데 이제 어쩌냐. 성녀가 저렇게 밖에 있는 이상 나갈 수도 없게 됐는데.”
천상의 힘을 이용하는 강림은 사기성이 짙어보이는 능력이지만 패널티가 존재한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필요하다는 걸까.
예를 들면 천군(??)을 부르면 한동안은 몸살로 앓아 눕는다. 가뭄에 비를 부르면 일주일 동안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껴야 한다.
천상의 관문을 강림시켜 그 안으로 들어 왔다면 출구는 바로 그 자리다. 즉, 꼼짝없이 갇혔다는 의미였다.
지금 이 상황은 잡히기 전까지 마음정리하라는 일종의 유예에 불과했다.
“나야 죽진 않겠지만 너는 꼼짝없이 붙잡혀 갈 걸.”
어떻게 빌면 그 철권에 옥수수가 털리지 않고 끝날까.
성자는 유혈사태는 확정이라며 고민에 빠졌다.
그때 용사가 말했다.
“도망칠 방법은 있어.”
성자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는 건가.
…그럴 리가.
지금 성검이 있다면 또 모르겠는데 그건 용사의 부탁으로 성자 자신이 아까 전에 봉인해버리지 않았나.
봉인지에 직통 게이트를 열고 보내버린 터라 되찾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다는 소린데.
만약 그렇다면 그건 기발하거나 미쳤거나 둘 중 하나였다. 슬프게도 용사의 답변은 후자였다.
“좀 힘들겠지만지금 당장 게이트를 열어줘.”
그러자 성자는 미쳤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공간의 미아가 되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