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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5화 (5/45)

〈 5화 〉 1장. 아네모네의 성녀(4)

* * *

“괜찮아.”

“괜찮지 않다니까?!”

“왜? 예전에 마수 군단에게 포위당했을 땐 잘만 열고서 빠져나왔는데.”

그때도 지금 상황이랑 똑같았다.

그때와 차이점이라곤 딱 하나다.

천상의 관문을 뚫고 들어올려는 존재가 마수군단을 이끌고 온 사천왕 벨그놈이 아니라 동료였던 성녀라는 점이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어찌어찌 게이트를 열고 빠져나오는 경험이 있는 용사는 당연하게도 그 방안을 성자에게 요구했지만 성자는 기겁할 뿐이었다.

“그거 10년도 더 지난 일이잖아아아! 너 내가 지금 팔팔한 30대로 보이냐? ……아, 그렇게 보이겠구나.”

성자는 심히 젊어보이는 제 외견을 떠올리더니 멍청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정신을 퍼뜩 차리고선 무리라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용사를 만류했다.

그렇지만 뜻을 바꾸지 않은 용사가 말했다.

“알고 있잖아. 일곱 번째 관문의 테마를.”

“……신앙심의 관문이지.”

성자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래. 신앙심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만큼 열리는 문. 대신 조막만큼도 신앙심이 없는 이들에게는 결코 열리지 않지. 자, 과연 ‘성녀’ 그라시아가 신앙심이 있을까 없을까.”

누가 들어도 멍청한 질문이었다.

전 세계에서 신앙심이 투철하기론 1, 2위에 다투는 성녀가 신앙심이 없을리가 없으니까.

“그래도 쉽게는 못 들어온다.”

“자동으로 열리려는 걸 억지로 버티고 있으면서 쎈 척하기는.”

여전히 눈치 하난 기가 막히는군.

애써 숨기고 있던 사실을 들통나자 성자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내심 투덜거린 성자가 그래서 어쩔꺼냐는 투로 말을 꺼냈다.

“참고로 말하지만 내가 지금 옛날같지 않아서 힘이 딸려. 게이트를 여는 건 가능해도 좌표 설정까지 해줄 여력은 없다. 뭐, 그래도 남은 거 다 짜낸다면 미아까진 안되겠지. 대륙 어딘가에 떨어질 건데 어딘지는 나도 몰라. 그래도 상관 없어?”

두 말할 것 있냐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용사. 그를 본 성자가 재차 물었다.

“굳이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서 대화로 푸는 방법도 있는데.”

“니 마음은 알겠는데 지금은 무리다. …특히나 그라시아는 더더욱.”

“하….”

“죽게되도 어쩔 수 없어! 도주 수단이 딱 하나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알았어? 어쩔 수 없다는 거다!”

갑자기 급발진해서는 열혈물의 주인공처럼 외치는 용사.

자세히 보니 옆머리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닌 척해도 성녀의 등장에 위축된 듯한 느낌.

‘어디 보자….’

여기서 성자는 주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지금의 상황을 문제라고 가정해본다면 선택할 수 있는 답은 여러가지가 있다.

용사를 도주시키고 혼자 남아서 성녀가 펼치는 그래플링 기술로 고통받는 것과.

게이트를 못열겠다고 배짱부리고 성녀가 들어오기까지 기다려서 둘이서 같이 고통받는 것.

후자를 선택한다면 지금까지의 고생은 생고생이 되겠지만, 어쨌든 용사를 놓치지 않았으니 성녀의 제재는 가볍게 끝날 것이다.

전자를 고른다면 이하 생략한다.

대전 내내 대륙 곳곳을 쏘다니면서도 용사 파티의 보급을 무사히 책임졌던 성자답게 재빠르게 계산을 끝마친 그는 언제 반대했냐는 듯이 선뜻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아.”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며 살며시 눈을 감는다.

천상의 관문을 강림시켰던 좀 전과 같이 전신에서 신성력이 내뿜어진다.

다른 점은 뭉개구름처럼 뭉실뭉실 일어나며 허공에 뭉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머잖아 완전한 구의 형태가 된 신성력은 돌연 심장이 뛰는 것처럼 박동하더니, 이내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팽창했다.

신성력을 한도 끝까지 끌어내 만든 게이트.

타원형으로 열린 게이트 너머에는 반투명한 풍경이 빠른 속도로 지나쳐가고 있었다.

용사는 반사적으로 풍경의 갯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에이린 숲, 마의 대지, 달이 떨어진 바다, 린드하른 요새….’

가본 적 있는 곳만을 헤아리다가 포기했다.

잠깐 사이에도 게이트 너머의 풍경은 수백 번도 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성자는 연달아 힘을 쓴 까닭에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는 지친 얼굴로 헉헉대며 말했다.

“보다시피 이래. 게이트를 넘어가도 무사할 확률은 손에 꼽는다. 말했듯이 좌표를 대륙 어딘가에 떨어지도록 고정은 해놨는데, 해저 바닥에 처박힐 가능성도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무사히 도착할지는 순전히 네 운에 달렸어.”

“…….”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그래도 갈 거냐?”

“…그래.”

“그럴거면 이거나 가져가라.”

품 안에 손을 넣은 성자가 묵직한 주머니를 꺼냈다. 조심스레 입구를 묶고 있는 천을 끌러내고 열어 보니 번쩍번쩍한 백금화와 금화, 은화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냐는 듯이 쳐다보자 성자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꾸했다.

“니가 먼길 떠나는 데 필요한 노잣돈이다. 챙겨둬.”

“……어감이 조금 그렇다?”

“착각이야.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라.”

오른 손목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나더니 웬 팔찌 하나가 채워져 있었다.

분명히 보기에는 금속 재질인데 부드러운 천마냥 손목에 딱 달라붙는다.

표면에는 태양을 향해 뻗어나가는 가지와 가지에 달린 잎과 잎맥이 세세히 조각되어 있으니, 추레한 지금의 모습에는 어울리지 않는 예술품 그 자체였다.

성자가 말했다.

“존재감을 지우는 데 도움이 되는 아티펙트다.”

“비싸 보이는데 이런 걸 줘도 돼?”

“착각하지마. 쓰고 때가 되면 반납하는 조건이다. 교단의 보물고에서 몰래 빼온 거니까 걸리면 나도 큰일난다고.”

무려 성자가 자신이 소속 되어 있는 교단의 금고를 털다니. 이래도 되는 거냐, 성자.

“……뭐. 고맙다.”

그래도 나름 생각이 있으니까 빼왔던 거겠지.

덕분에 도주에 딱 적합한 진귀한 아티펙트를 받게 되었으니 별 불만은 없었다.

물론, 별 불만이 없다는 소리는 불만이 하나 정도는 있다는 의미다.

용사는 팔찌를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줄곧 신경쓰이던 부분을 물었다.

“근데 왜 하필이면 색깔이 은색이냐?”

“은이 들어갔으니까. 왜?”

“……아니.”

거참 블링블링한 팔찌구나 싶어서.

……? 뭐래.

묘한 기분을 느낀 용사는 게이트 앞으로 걸어갔다.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니 몸을 보호하기 위해 체내의 마나를 이동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에서 최대한 활성화시켰다.

막 게이트를 넘어가려던 찰나.

성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용사를 보는 성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수십 년전, 파티 동료들이 전멸하고 둘이 남아 새롭게 시작하자고 다짐하던 그때의 얼굴이었다.

성자는 할말이 퍽 많은 듯 입을 뻐끔뻐금 거렸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언젠간 마주해야한다는 거 너도 알지?”

“…어.”

“다음에 만날 땐 적어도 지금보단 나은 모습을 기대해도 되냐.”

“…그래.”

성자를 일별한 용사는 게이트 속으로 발을 들이 밀었다.

*

쾅!

용사가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 불과 몇분이 흐르고 굉음을 내며 부숴진 문짝이 날아와 성자의 머리 옆에 박혔다.

“조금 늦었네. 그라시아.”

“……그런가요.”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정리하며 다가오는 성녀.

사실 성녀의 무력이라면 신앙심을 가진 이를 자동으로 통과시키는 천상의 일곱 번째 관문은 옛저녁에 뚫고 왔어야 했다.

문을 부수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쉴 때 그런 생각만 들지 않았더라면의 이야기다.

‘용사님의 냄새가 진득하게 섞인 공기….’

그런 망상이 들자마자 넋을 놓고서 황홀경에 빠져버리다니…. 용사가 도망칠 시간동안 숨만 쉬고 있지 않았는가.

성녀에게 용사를 붙잡아야한다는 목적이 없었더라면 그대로 하염없이 숨만 쉬고 있었을 것이다. 내뱉는 건 최소한으로 하면서.

덕분에 오랜만에 용사늄을 충전했지만 아직 수행이 미숙하다는 증거였다며 성녀는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성자가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성녀는 가볍게 무시하며 말을 걸었다.

“용사님은 어디로 떠나셨죠?”

“나도 몰라.”

“…….”

“워우워. 눈이 무섭네. 「신들께 맹세컨데 모른다.」 이제 됐냐?”

말하는 것과 동시에 신성력이 은은히 피어오른다.

대리자로서 그 주인되는 이들에 대고 하는 맹세. 그 절대성을 모를 리 없는 성녀는 이를 갈았다.

능글맞은 성자가 허리를 톡톡 두들기며 자리를 피할려들었다.

“아이고, 힘들었다. 이 나이부터 삭신이 쑤시면 나중엔 어떡하나….”

“어딜 가십니까? 제가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지는 않으셨겠지요?”

덥썩.

성녀를 지나치려던 찰나, 붙잡힌 뒷목이 어어, 하는 순간에 순식간에 끌려들어간다.

“잠깐! 진짜로?!”

한쪽 팔로 성자의 목을 휘감더니 다른 팔로 손목을 가린다. 그대로 조르기.

훌륭한 슬리퍼 홀드 자세였다.

“어어억! 진짜 아프네?!”

“엄살부리지 마세요, 살살 하고 있으니까 숨을 못쉰다거나 하진….”

“딱딱한 게 어깨에 닿아서 아프다고!”

“…….”

“……아차.”

그렇게 성자는 성대하게 지뢰를 밞아버렸다.

‘망했다!’

여기서 문제.

뒤에서 한쪽 팔로 상대의 목을 졸랐을 때, 상대의 어깨에 닿는 부위는 어디일까요?

아차싶었던 상자가 쭈뼛쭈볏하며 슬며시 위를 쳐다봤다.

마침내 마주친 성녀의 눈은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어서 차마 말도 붙여볼 요량마저 떠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인간은 살아있는 이상 살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야하는 법!

처음으로 마왕과 마주쳤을 때 솟아오르던 꿈과 희망과 용기를 잊지 않았던 성자가 재빠르게 외쳤다.

“잠깐만. 내가 정신이 훼까닥해서 말이 좀 헛나왔어. 잠시만 기다려봐. 내가 요즘 좀 힘들어서 그래. 정말 정말 잠깐이면 돼. 내가 다 수습할 수 있으니까. ……그래!! 네 갈비뼈가 닿는 게 아프.”

우두둑.

냉혹한 현실에 꿈과 희망과 용기는 그만 죽어버렸다…….

*

대륙 서부에 위치한 교단에서 이상한 소문이 하나 돌기 시작했다.

개인 사정으로 외유를 나간 성녀가 복귀하면서 웬 걸레짝을 질질 끌고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 걸레짝의 정체가 사실, 성녀와 같은 교단의 쌍두 마차인 성자라는 진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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