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2장. 바이올렛의 황태녀
* * *
용사는 묘한 부유감을 느꼈다.
파도에 휩쓸려서 떠내려 가는데 숨은 쉬어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전에 몇 번이고 게이트를 이용해 본 경험으로는 이게 정상이다. 용사는 당황하지 않고 흐름에 몸을 맡겼다.
간간이 이물질을 배척하려드는 공간의 흔들림이 덮쳐왔다. 시전자인 성자의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걸리면 갈려나갈 진동도 초인의 영역에 다다르니 그저 산들바람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앙탈을 부리던 공간도 잠잠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입구와 똑같이 생긴 푸른 타원형의 출구가 나타났다. 도착지가 저기라는 듯이 저절로 출구로 흘러갔다.
슈욱!
출구를 통과하자 통로 내부와는 다른 부유감이 엄습했다. 배를 붙잡고 아래로 땡기는 느낌. 하얀 구름이 흘러가는 파란 하늘이 보이자마자 용사는 재빠르게 몸을 뒤집었다.
“엇차.”
직후, 먼지가 내려앉은 것처럼 조용하게 내려앉았다.
“다행히 엉뚱한 곳에 떨어지진 않았네.
만약 성자의 말대로 심해 바닥이나 활화산에 떨어지기라도 했으면 빠져나오는 데 상당히 고생 좀 했겠지.
그렇게 무섭게 경고했던 것치고는 쉽게 끝났다.
“자, 어디 보자… 여기가 어디….”
삐이이익─
그때 갑자기 새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돌연 허공에서 나타난 수십 개의 강철 창이 떨어지며 용사를 꼬챙이처럼 꿰려든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어본 경험이 있는 그가 이런 반자동적인 공격에 당할 리가 만무하다.
가장 먼저 도달한 창을 잡아챈다. 창을 그대로 손안에서 한 바퀴 빙글 돌리면서 반대쪽 끝이 다른 창들을 스쳐 지나가게 한다. 그걸로 끝. 경로가 비틀린 창들은 자기들끼리 뒤엉키며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이런….”
놀라운 기술로 위기를 모면한 용사.
그러나 그 낯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삐이이익─
지금도 이어지고 소리는 들어본 기억이 있다.
정확히는 지난 수십 년간 계속해서 들어 왔던 소리다.
“경보 술식의 침입자 경고….”
대전 때 쓰이던 결계형 마법 중 하나.
본래에는 방범용으로 쓰이던 걸, 용사가 낸 아이디어에 ‘현자’와 ‘마도사’가 개량하여 만든 감지용 마법이다.
마나가 적게 들기에 비용 대비 효용성이 큰 마법이기도 했다. 상대편에도 경계 마법을 파훼할 마법사가 있지 않은 이상 술식이 반드시 발동한다는 의미였으니까.
때문에 종군 마법사들이 반드시 배워둬야할 필수 마법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또 다른 장점으로는 인챈트 되어 있는 마법석을 구하기가 쉬웠다는 것이다.
인챈트는 술식의 구조가 복잡하면 그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개량된 경보 마법은 구조가 복잡한 술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타 마법석과 비교해봤을 때도 값쌌다.
덕분에 종군 마법사가 없는 부대는 이런 마법석을 상비하고 다녔다. 만약 다 떨어지고 없다면 전투에 나서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단순히 소리만 내는 거면 보급형.
대부분의 군대가 보급형 술식이 인챈트된 마도구를 사용했다.
소리에 침입자를 배제하기 위한 공격을 하게되면 고급형.
귀족들의 저택이나 지휘관 막사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침입자가 공격을 받고도 무사할 경우.
피해를 입힐 수단을 자체적으로 강구하고 시행하는 유일형.
3가지의 유형 중에 효력 범위도 가장 넓고 효과도 제일 뛰어났기에 그만큼 코스트가 만만치 않은 유일형은 전 대륙에 7곳만 설치되어 있었다.
“환장하겠네.”
막 강철 창이 나타났던 허공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수십 개는 될법한 연보랏빛 불덩어리.
물리적인 수단이 통하지 않자 바로 마법으로 대응 수단을 바꾼 것이다.
저것도 통하지 않는다면 이전의 강철 창과 다른 수단을 합쳐서 덮쳐올 거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아예 양으로 짓눌러버리기 위해서.
어떻게 아느냐면.
이곳은 용사 본인이 유일하게 경보 술식의 대응 알고리즘에 간섭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용사 생활을 하면서 뺀질나게 드나든 이 황궁의 광경을 몰라볼 리가 없었으니까!
“딘. 이 개자식.”
연보랏빛 이색(?色)으로 타오르고 있는 화구들을 본 용사가 낭패어린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여기 황궁이잖아…. 지쳐서 좌표는 못 정해주겠다더니….”
신뢰는 아주 중요하다.
공공의 약속은 바로 신뢰성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즉, 사회는 상호 간의 신뢰로 이루어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사는 성자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역시 지쳤다는 거 뻥이었잖아, 이 새끼!”
알슈타르 제국의 황궁.
귀찮은 황녀가 있는 곳에 와 버렸다.
*
꽃비가 내려오는 화창한 봄날.
기분 좋게 내리쬐는 햇빛과 풀숲을 스쳐다니며 그 향을 한껏 머금은 선선한 바람이 찾아드는 정원 한 켠에 다람쥐가 뽀르르 달려간다.
조그마한 팔다리를 열심히 놀리던 다람쥐는 웬 기둥을 만난다. 하얗고 굽이 저있어 올라가기 힘들어 보이는 기둥. 그러나 호기심이 많은 다람쥐는 그 기둥을 거슬러 올라가.
“어머나.”
연보랏빛 제비꽃의 테를 닮은 아름다운 여인과 마주쳤다.
“귀여운 아이가 왔네.”
태양빛 토파즈를 닮은 눈동자가 티테이블 위로 올라온 다람쥐를 보더니 눈웃음을 친다.
“어디 쿠키 좀 먹어보지 않으련?”
차와 함께 즐기고 있던 쿠키를 잘게 부수는 여인.
다람쥐는 테이블 위에 먹기 좋게 잘게 부수어진 쿠키를 열심히 주워 먹는다.
“잘도 먹네요, 어떤가요? 대공.”
“무얼 말씀이신지요?”
대공이라 불린 남자가 대답했다. 티테이블에 마주 앉아아 있는 그에게선 기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우묵하니 깊이 있는 눈동자.
노인처럼 새하얗게 샌 머리카락.
그러나 다르게 팽팽하게 당겨진 피부에는 주름 한 줄기 나 있지 않았다.
“이 아이 말이에요.”
“다람쥐로군요.”
“그게 끝인가요?”
“무인에게 감상을 물어보신다고 한들…. 그렇군요.”
푸른 눈동자가 열심히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있는 다람쥐에게로 향했다.
“육질이 연하긴 하겠습니다.”
……!
“아앗!”
그 순간 다람쥐가 재빨리 티테이블에서 내려가 풀숲으로 사라졌다. 야생동물답게 위기 감각이 매우 뛰어났기에 미증유의 위협 앞에서 도망친 것이다.
“심술궂군요. 대공.”
“허허허. 다람쥐가 멋대로 겁을 먹고 도망간 것을 늙은이에게 따지면 안됩니다.”
허허롭게 웃어 보이는 대공.
여인은 대공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겁이 많죠.”
여인의 눈매가 살며시 접힌다. 누군가를 그리듯이 동공에는 초점이 없다.
“네. 다람쥐는 겁이 많아요. 아주 많죠. 잡으려거든 단숨에 덮치거나, 아니면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기회를 엿보아야 하죠. 예를 들면 먹이를 준다던가… 해서 말이죠.”
대공은 막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호. 그럼 전하께서는 후자겠군요.”
“아뇨. 안 잡을 건데요?”
하마터면 대공의 바지가 찻물에 젖어버릴 뻔했다. 찻잔을 놓칠 뻔한 대공은 헛기침을 하며 받침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시다면 다람쥐 얘기는 왜…?”
“아뇨. 그게 아니에요. 다람쥐를 굳이 잡을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이해를 잘못하셨다고 꼬집는 여인.
“다람쥐를 억지로 잡아다가 우리에 넣는 게 아니에요. 다람쥐가 스스로 우리에 들어가게 만드는 거죠. 그편이 더 재미있고…… 두근거리거든요.”
여인은 풍만한 마음에 손을 올리며 얄궂게 웃어보인다.
그 손짓 하나, 몸짓 하나가. 상대가 그녀를 교태롭고 매력적이라고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대공은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의 말 속에 숨어있는 뜻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고귀해 보이는 외견과는 달리 그녀의 내면은 능구렁이가 수십 마리는 들어앉아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곤란했다.
그녀는 장차 만인지상의 유일한 자리에 앉을.
“그래서 황태녀 전하께서는 이미 다람쥐를 잡으셨습니까?”
“글쎄요….”
알슈타르 제국의 황태녀였으니까.
“이미 과자 부스러기는 흘려 놨으니 찾아오지 않을까요?”
물론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을 테니 저 자신도 노력해야겠지요.
플로렌스 아발트 슈트람은 의뭉스러운 말로 끝을 맺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