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2장. 바이올렛의 황태녀(4)
* * *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뭔가가 베어졌다.
아르벨트 대공은 힘조절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만 같았다.
하늘에 닿았다 평받는 검기를 거침없이 뿌려대며 용사에게 달려들었다.
“무르구나!”
훌쩍 뛰어 거리를 벌리는 용사를 향해 펼친 손아귀를 틀어진다.
그러자 사방에서 검기가 대공의 꽉 쥐어진 주먹처럼 움켜쥐듯이 날아들었다.
쿠구구구궁!
이에 피해를 받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용사가 아니라 황궁 그 자체였다.
용사는 피하면 그만이지만 건물은 아니니까.
“이런 미친. 드디어 노망이라도 났나.”
황궁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한 양반이 오히려 부수고 앉았으니.
오죽 황당했으면 회피하던 용사가 일일히 공중으로 그 여파를 흩어버려 하겠는가.
“아예 황궁을 그냥 다 때려부술려고 작정했어?”
“닥쳐라!”
대공이 버럭 소리를 내지른다.
목청 하나는 더럽게 크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가만히 있거라! 네놈이 얌전히 맞으면 끝날 일이거늘.”
날아드는 무형의 검기를 받아치며 몸을 붕 띄우는 용사.
공중으로 피하자마자 바로 있던 자리에 짙은 골이 패였다.
잔디밭에 부드럽게 착지한 용사는 빠르게 물러났다.
사그락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면서도 뒤로가는 것이, 마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뮤지션같은 움직임이었다.
“대신 내 인생도 끝나겠지.”
“당연하다!”
대공은 따를 이유가 전혀 없는 제멋대로인 말을 지껄였다.
“스승이 친히 베풀어주는 훈육을 거부하는 고얀 놈은 살 가치도 없다!”
“참나. 헛소리도 그쯤이면 병이야, 병.”
“뭐라?!”
“언제부터 노친네가 제자들을 그렇게 알뜰살뜰하게 챙겨줬다고. 게다가 나는 제자 취급도 안해줬잖아?”
처음부터 그랬다.
스승으로서 보여주는 사랑과 관심은 커녕 성검에게 선택받은 애송이 취급을 했다.
용사는 그런 대공의 말을 긍정했었다.
처음에는 말이다.
그러나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하고 수많은 사선을 넘어 모두가 그를 용사로 인정할 때도 대공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성검을 쥘 수 없다.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대공에게 있어서 용사의 존재란 손톱 밑에 박힌 가시나 다름없던 것이다.
그래서 용사도 대공을 좆같이 대했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입대 훈련소에서 맨날 깐다고 엿 같다고 말한 조교와 헤어질 때는 그래도 웃으면서 헤어지겠지만, 용사는 까인 세월만 수십 년이 넘어가는 것이다.
“계속 그렇게 귓구멍을 막고 사니까 뒤에서 퇴물노괴라고 수군거리는 거지. 앞에서 말했다간 모가지가 날아갈까봐.”
“이 노오오오옴!”
일방적인 공수교환은 그대로 이어졌다.
용사는 피하거나 흘리고 대공은 공격을 이어간다.
둘의 격돌은 서서히 황궁의 중심부로 옮겨갔다.
돌연 용사는 건물의 모서리 부근에서 좌측으로 크게 뛰어 길을 틀었다.
찾고 있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급가속에 크게 궤도를 벗어난 대공의 공격이 다른 궁전을 무너트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용사는 팔을 쭈욱 뻗으며 목표물을 잡아챘다.
용사가 노린 것은 바로 번쩍번쩍하는 갑옷과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무리.
바로 황궁의 경비병력이었다.
그들은 포위망을 구성하고 대공의 명에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잠깐 빌리겠습니다.”
스르르릉─
급정거를 하며 멈춰선 용사는 바로 앞에 있는 기사의 검을 빼어들었다. 한박자 늦게 반응한 동료 기사들이 사방에서 공격한다.
그러나 이미 그 자리에 용사는 없다.
황실의 기사가 쓰는 검답게 청명하게 울리는 검명을 노래삼아 들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뽑았구나, 검을.”
마주한 것은 아르벨트 대공.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무형검을 쓰던 이전과는 다르게 실체가 있는 검을 뽑아든 채였다.
“아무리 그래도 검 없이 제압하려해도 노친네가 좀 쌔야 말이지.”
“…좋다. 좋은 기회이니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반성은 그 혼이 천상에 갔을 때 해도 충분하겠지.”
조심스레 다가오던 황실 기사들과 근위대들은 사방이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무력이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두 사람이 대치하는 것만으로 중력이 수십, 수백배가 늘어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더 다가가면 죽는다.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칠 때 쯤.
파앙!
대기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대치를 이어가던 두 남자가 서로를 향해 빠르게 가까워진다.
벼락같이 떨어지는 내려베기와 그걸 올려치려는 검격이 마주치려던 찰나.
“두 분.”
그 사이로 한 여인이 끼어들었다.
“자, 잠!”
그 익숙한 자태에 경악하는 황실 기사들.
직후. 굉음과 함께 모래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자칫하다간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황실 기사들은 모래먼지의 중심지로 거침없이 내달렸다. 무언가 상이 잡히려던 그때, 바람이 불어왔다.
중심부로부터 시작된 세찬 바람이 모래먼지를 일거에 날려버렸다.
그러자 드러나는 광경.
맞부딪치려던 두 개의 검이 자석이라도 만난 듯이 서로 반발하여 지면에 꽂힌 모습이었다.
그 사이에 당당히 서 있던 여인의 얼굴이 드러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전하!”
“전하!”
황실기사단과 근위대는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며.
하마터면 황태녀를 베어버릴 뻔한 아르벨트 대공은 침을 꿀꺽 삼키며.
용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이목을 한껏 끌어들인 플로렌스는 그림에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채 원흉들을 향해 눈길을 흘겼다. 딱딱히 굳는 대공과 용사.
“저와 차 한잔 어떠신가요?
“크, 크흠. 큼. 그게….”
“물론 레이디가 권유하는데 빼진 않으시겠죠?”
“…….”
*
찻주전자를 기울이는 플로렌스.
테이블에 놓인 찻잔 위로 주홍빛 찻물이 조르륵 채워져갔다.
“드세요.”
플로렌스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두 남자는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정원에서 막 따온 일미아 꽃잎으로 달인 차에요. 어떠신지요?”
“맛…있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전하.”
언제 싸웠냐는 듯이 맞장구를 치는 두 남자.
찻 주전자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플로렌스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 인사를 일단 두 분께 드려야겠네요.”
용사는 당황했다.
감사 인사?
황궁의 궁전들을 때려부순 이들에게 뭔 감사 인사를?
그녀가 말하면 제 집을 부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나.
“근래 들어 돈이 나갈 곳이 많아 제국의 재정이 말이 아니었거든요. 두 분께서 직접 힘써주셔서 관리비용을 잡아먹던 골칫덩어리를 치워주셨으니 덕분에 한시름 덜었답니다.”
“커험험. 제가 다 전하의 걱정거리를 덜어 드리기 위해….”
‘그거 아니야 눈치없는 노친네야!!’
용사는 대공이 둘러대는 말에 반사적으로 이마를 탁칠 뻔했다.
저렇게 눈치라곤 지지리도 없으니 대공씩이나 되서 정계에서 따돌림당하지!
주먹도 가깝고 법도 가까우니 깽판칠까봐 겁나서 황궁 경호 총책임자라는 감투 씌워놓고 둥가둥가하는 걸 자기만 모르고 있으니.
눈치없는 대답에 황녀는 그저 웃어보였다.
“네. 제국의 어려움에 구태여 명분삼아 사비로 국고를 채워주시려 하시다니. 그 강고한 충심에 감동했습니다. 물론 몸소 본보기가 되어주신 대공을 본받아 다른 분들께서도 흔쾌히 거들어주시겠지요.”
“……네, 네? 그게 무슨…?”
눈을 꿈뻑꿈뻑 거리던 대공의 안색이 살짝 질렸다.
그제서야 무언가 잘못 되어간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그런데 늦어도 한참 늦었다.
“어머, 제가 착각을 했던 걸까요?”
“그, 그것이….”
“그렇다면 황궁의 궁전들을 부순 것은──.”
ㅂ자로 시작하고 ㅇ자로 끝나는 단어.
발성하지 않고 입모양으로만 이어진 뒷말에 외통수임을 깨달은 대공은 다 타버린 듯 새하얗게 변했다.
“후후훗.”
솔직히 무서웠다.
타협이라는 걸 모르는 성격 탓에 안 그래도 정계에서 입지가 좁은 귀족을 완전히 나락으로 밀어버리고, 조용히 입가를 가리며 웃는 것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용사는 저도 모르게 의자를 살짝 뒤로 움직였다.
“자, 그럼 용사님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