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2장. 바이올렛의 황태녀(6)
* * *
셋 중에 둘이 사라지고 하나만 남은 정원.
“뿌우….”
풀이 죽은 플로렌스는 고개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시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전하, 말씀하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 반색하며 고개를 드는 플로렌스.
시녀가 가져온 물건은 바로 금박이 입혀진 상자였다.
화려한 상자는 가로세로 30cm 정도 되어 보이는 크기였다.
상자를 받아들고 연 플로렌스가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들었다.
…바로 용사가 들고 있던 찻잔이었다.
황태녀는 지고한 보물을 발견하고 감격하는 모험가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찻잔을 상자 안에 넣고선 턱을 괴고 감상하기 시작했다.
용사가 좀 전까지만 해도 쥐고 그 안의 찻물을 마시며 핥고 빨고 쭙쭙….
머릿속에서는 온갖 남사스러운 단어들이 슝슝 날아다녔다.
그 눈에는 숨김없이 드러나는, 활화산의 용암과도 같은 욕망이 들끓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도무지 제국의 계승자라고는 볼 수 없는,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정말 욕망어린 낯이었다.
“후, 잘 먹었습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배가 부른 듯한 얼굴이 된 플로렌스는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그녀는 용사와의 대화를 자체 평가하기 시작했다.
부탁을 하지 못하게 된 건 조금 아쉽다.
받아준 것도 용사의 소관인 마왕의 일이긴 하지만 자신이 협력자였다는 사실을 감안한 것이리라.
그 대가로
대신 챙길 수 있는 건 챙겼다.
‘용사님과의 정기적인 만남….’
조사 경과 보고는 플로렌스를 직접 대면해야했다.
기밀 유지를 위하여.
그런 말을 하자 용사는 난색을 표했다.
아르벨트 대공을 가리키며 같이 들었으니까 대공에게 보고하겠다고 했지만.
‘안됩니다.’
그걸 플로렌스가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용사는 석 달.
플로렌스는 한 달.
절충해서 두 달 간격마다 보고 명목으로 플로렌스는 용사와 만나는 게 결정되었다.
“플로렌스 전하.”
금박 상자를 품에 안고 티테이블에서 일어난 플로렌스는 정원을 나섰다.
정원의 입구에는 완전 무장을 한 기사들이 정렬한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노예. 평민. 귀족할 것 없이 오로지 그녀에게만 충성하는 기사들.
그녀가 직접 고르고 기른 충성스러운 사냥개들.
그들 중 우두머리가 다가와 예를 갖추더니 조심스럽게 내미는 것이 있었다.
황궁에 있을 리가 없는 후줄근한 옷무더기.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에서 찾아낸 옷가지입니다. 해당 옷가지가 발견된 위치에 있던 궁의 내부 장부와 비품 담당자를 불러들여 조사하고 교차 검증을 한 결과, 용사님이 입고 계시던 옷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용사의 것이었다.
기뻤지만 일단 보는 눈이 있기에 이성까진 잃진 않은 플로렌스가 직접 받아들려고 했다.
그런데 잠깐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멈칫했다.
내밀던 손을 거두고 장고에 들어간 플로렌스.
주인의 이상행동에도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역시나 침묵을 깬 것은 그 주인이었다.
“포장해두세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는 관점으로 보자면 걸레로도 쓰지 못할 옷가지들은 처분해야한다.
플로렌스의 관점으로 보자면 잽사게 챙겨서 황위 계승자만이 머물 수 있는 아이른 궁 심처에 있는 방에 늘 그랬듯이 곱게 전시해놔야 할 것이다.
슬쩍 고개를 쳐드는 호기심.
그러나 훈련된 입은 조건반사적으로 열렸다.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기사는 물러난다.
“…….”
오는게 있으니 가는게 있고.
받은 만큼 베풀어야 다음에도 받을 수 있다.
플로렌스는 일거리가 쌓여 있는 집무실에 발길을 옮기며 생각했다.
결국 저 보물들은 자신의 경쟁자에게 가겠지만, 그것으로 난처한 상황에 처한 협력자는 구원의 동앗줄이 되어줄 것이다.
지금쯤 곤혹을 겪고 있을 협력자를 위하여.
자신의 보물을 아낌없이 하사하는 대범한 황태녀를 마음속에 그린 플로렌스가 웃었다.
……다만, 손끝이 파르르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음이다.
***
봄의 화사한 햇살을 받는 레밀뉴 대성당.
까마귀가 날아다니고 성당 대문 앞에는 사지 중 둘 이상이 없는 거지들이 구걸하며 높이 솟은 종탑 위에는 성자가 펄럭이는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아, 그게 아니라니까!”
쾅!
“왜 자꾸만 욕심을 부리나!”
“말 조심하시오. 내가 언제 욕심을 부렸다고 트집이오, 트집은?”
“다른 구역보다 지원금을 두배는 처먹겠다는 게 욕심이지!”
“아니. 보자보자하니까 처먹어어?!”
쿠당탕.
침을 튀가며 언쟁을 벌이던 그들은 이젠 주먹질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기 교단의 주교직을 맡고 있는 고위 성직자였다.
밖에선 점잔빼는 이들이 추하게 민낯을 드러내고 멱살을 잡으며 싸운다.
대리석으로 된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성녀는 남몰래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며 한숨을 내뱉는 성녀.
결국 돈이 문제다.
전 대륙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끌고 들어갔던 전례가 없었던 대전.
그 전후 처리는 아카데미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이들조차 고개를 저을 정도로 복잡하기 그지 없다.
통상적인 전쟁이었다면 이긴 대가로 패전국에게서 보상금을 받겠지만.
대전은 달랐다.
종족의 차이 이전에 근본 행동 원리부터가 달랐다.
생명체의 씨를 말리고 풀 한포기조차 남기지 않는다.
상대를 철저히 부정하고 또 부정한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죽어야만 끝났고.
실제로 그렇게 끝이 났다.
말 그대로 멸망전이었기에 살아남기 위하여 있는 것 없는 것 다 끌어다 쓴 반동이 지금 되돌아오고 있었다.
“하아아아.”
침실의 문을 열자 빽빽한 서류 다발로 만들어진 산맥이 반기었다.
푹신한 침대가 아른거리거늘.
…또 옆에 진짜로 있기도 하고.
그러나 침대를 사용하는 것은 일을 모두 끝마쳤을 때다. 그 전에 쉬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용납할 수가 없다.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집무실에 왜 갖다놓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은 그녀에겐 없었다.
이미 그곳도 서류로 점령당했을테니까.
배려가 기본 자세인 성직자들이 침실까지 서류를 넣어놓았다는 건 그만큼 급한 사안이라는 방증이었다.
성녀는 체념한 기색으로 간이 의자에 앉아 서류들을 설펴보기 시작했다.
창문의 틈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비치는 옆모습이 경건하고도 신성하다.
차마 다가가기 조차 힘들만큼 단정된 아름다움. 살짝이라도 다가가면 그 아름다움의 상이 깨질까 두렵다.
도무지 용사만 관련되면 눈이 돌아가는 여자라고 보기 힘들었다.
똑똑.
“성녀님, 하이란입니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사제.
품계를 나타내는 두 줄의 노끈을 왼팔에 묶은 하이란은 밀봉된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그건 뭐죠?”
“알슈타르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알슈타르요…?”
예전에는 세 제국 중에 가장 최약이었던 제국.
지금은 유일한 제국으로 남아있는 국가가 교단의 성녀에게 보낸 물건이라.
“그년이 보낸 건가.”
“네?”
“아, 아뇨. 아니에요.”
성녀는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을 무마하기 위해서 손사래쳤다.
어리둥절하던 하이란은 상자의 밀봉된 부분을 잡았다.
“혹시 모르니 제가 열어 보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제게 온 물건이니 응당 제가 .”
고개를 숙이고 한쪽편으로 물러나는 하이란.
하필이면 알슈타르 제국에서 보내온 탓에 밀봉을 뜯고 내용물을 검사하지 못했다.
성녀는 최중요한 인물.
그런 처지일수록 조심해야하는데.
혹여나 알슈타르를 사칭한 파괴 공작일 가능성을 대비하여 하이란은 성법을 준비한다.
그렇다.
그녀는 성녀의 비서역할을 맡고 있는 사제이자 경호 사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게… 뭐죠?”
그런데 내용물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바람 한 점 안 통하게 꼼꼼하게 밀봉된 상자 안에 있던 건 옷가지였다.
길거리의 부랑자가 걸치고 다녀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헤졌다.
교단의 성녀에게 보내기엔 부적합해보이는 물건임은 분명했다.
돌리고 돌려서 의미를 꼰 정치적 표현이라고 봐야할 지 헷갈리기 시작했기에 하이란은, 성녀의 코가 쫑긋쫑긋 거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만 나가보세요.”
“네? 하지만 이건….”
“괜찮아요. 그런 거 아니니까. 얼른.”
결국 하이란은 내몰듯이 쫓겨났다.
쾅!
닫힌 문앞에서 하이란은 눈을 꿈뻑거렸다.
알쏭달쏭한 의문이 풀리질 않는다. 대체 그 옷가지는 무슨 의미였던가.
“흐히히히히.”
그러거나 말았거나.
성녀는 옷들을 보면서 헤픈 웃음을 흘렸다.
“잠깐만요.”
땀이 잔뜩 배겼을 게 당연한 상의를 집어들다가, 성녀는 어떤 사실을 눈치챘다.
이게 왜 알슈타르에서 온단 말인가.
행복 회로에 젖기 전에 이성이 빠르게 판단하기 시작했다.
“저에게 봉인된 상태로 올 수 있는 건 황실에서 보낸 물품들 밖에 없을텐데요.”
성녀의 눈길이 뜯겨진 밀봉으로 향했다.
…황가의 독수리 문양이 분명하다.
“역시 플로렌스 그년이 보냈군요. 그렇다면 용사님께서는 그년과…?!”
들고 있던 상의를 내려놓고는 재빠르게 하의를 집어드는 성녀.
석재가루와 기타 등등으로 범벅이 되어 더러운 천에 코를 들이박고선 미친듯이 냄새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청결따윈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 용사에게서 나온, 용사꺼니까.
“…히.”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을 떼어낸 성녀에게는 안도의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 냄새는 나지 않네요. 역시… 후후후. 그 젖소가 제 주제를 알긴 아는 모양이에요. 그렇담 이건 공물이라고 봐도 되겠어요.”
요컨데 용사와 피치못하게 만났으니 한번 봐달라.
내가 이렇게까지 성의를 표하지 않느냐!
음. 그정도 쯤이야!
이렇게 성의를 보였는데 신의 성녀가 그런 도량을 보여주지 못할 이유가 어딨겠는가!
콧대가 한껏 높아진 성녀는 다시 헤실헤실 웃으며 한껏 용사늄을 들이쉬기 시작했다.
한껏 풀어진 눈동자는 상자 내부를 훑었다.
그러다가 성녀의 정신이 확 들었다.
옷들을 하나하나 검수하듯이 꺼내어보는 성녀.
다 꺼냈지만 목적한 것을 찾지 못했는지 상자 바닥을 벅벅 긁어본다.
성녀는 중요한 사실을 눈치챘던 것이다..
……눈치 채고야 말았다.
“속옷을 빼고 보내다니!!”
……속옷이 없다.
삼위일체 중 가장 중요한, 화룡점정인 속옷이 없다!
“이런 잔인한!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죠?! 믿을 수가 없네요. 아아아아… 용사님의 꾸덕꾸덕한 속옷을…. 지금이면 딱 좋게 발효됐을 때인데….”
나라를 잃은 듯이 절규하는 성녀.
듣는 사람의 정신마저 혼미해질 소리를 넋두리마냥 늘어놓는 그 순간, 용사는 영문도 모른 채 공포를 느꼈다고 카더라.
***
여기서 문제.
멋들어지는 양복을 차려입은 칠십 대 노인이 귀갑 묶기로 천장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의 심정을 서술하시오.
“……그딴 거 알겠냐.”
용사는 안 본 눈을 격하게 사고 싶어졌다.
성녀가 아직 옷상자를 받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