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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12화 (12/45)

〈 12화 〉 3장. 현자를 찾아서

* * *

세계의 절반을 불태우는 전쟁은 수십년 전, 한 군소 왕국의 멸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륙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 왕국은 어느날, 갑작스럽게 모든 소식이 끊겼다. 왕국의 영토 안에서부터 전해져오던 편지라던가 파발이라던가.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시점을 기해서 그냥 정전이라도 된 듯 완전한 침묵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목은 쏠리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세력이 작은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며 멸망하고 멸망시키고를 반복하는 대륙 동부 지역. 한 왕국의 멸망은 예삿일이었고 그렇기에 여상스레 벌어지는 일에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단지 주변의 소국들은 이맛살을 찌뿌릴 뿐이었다. 멸망한 왕국으로부터 어떠한 유민도 오지 앟았기 때문에. 다들 수준이 고만고만할수록 인구는 힘이 되어주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런 법칙을 알고 있었지만, 콜로세움같이 동부 지역의 오래된 진흙탕은 깊고 넓어, 주의를 돌린다면 곧바로 밑으로 빠져버릴 정도였다.

이윤을 좇아 팔방 군데를 다 돌아다니는 상인들마저도, 국가가 멸망했다면 내부의 혼란이 어느정도 정리될 때까지 발을 들이지 말자고 그들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 침묵의 수년의 지나고.

멸망한 왕국의 영토로부터 무한정한 적의를 가진 무진장한 군세가 쏟아져 나옴으로써.

훗날 멸망한 소국의 명칭을 따 [라키아 대전]이라 불리는 전 대륙을 집어삼키는 대사건의 불길이 퍼져나가기에 이르렀다.

마왕과 그의 권속, 군세는 강했다.

서로 치고 받느라 정신없던 동부의 소국들은 순식간에 휩쓸려나갔고, 마왕군은 지나가던 땅에 풀 한포기 남기지 않으며 빠르게 서진, 전화가 점차 온 대륙으로 번져나갔다.

이에 대응하여, 각 종족의 지도자들의 합의 아래 [범종족 연합군]이 발족. 마왕에게 맞섰으나 전황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아, 세상이 마치 멸망의 종착역으로 쉼없이 달려나가는 듯 했다.

그런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준 자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대전에 앞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준 맹자들.

유례없는 위기에 수많은 영웅들이 나타났으나, 단언컨데 그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용사와 그의 동료들이었다.

[48번 요새 방어전], [슈데른 왕도 공략전], [베개프 협곡]….

그들이 활약한 장소는 수도 없이 많았으며, 특히나 그들의 구심점이자 신들이 내준 구세주인 용사에게 만인의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그런데, 용사와 동료들의 사이에선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몇가지 규칙이 존재했다.

하나는 동료끼리는 평대를 할 것.

「……아까처럼 갑자기 전투가 벌어진 상황에서는 렉스, 너가 앞으로 좀 더 나서줘야해. 네 포지션 상 너무 뒤에 있었어.」

「알겠수. 딘 부대장의 말대로 따르지.」

「반대로 드레이븐 씨는 너무 앞으로 나섰어요. 위태위태한 거 살려내느라 얼마나 진이 빠졌는 줄 압니까?」

「드워프 전사는 물러섬을 몰라!」

「하이고…. 골치야.」

「젊은 친구가 인상을 너무 팍팍 구기는 군, 웃게 웃어.」

「웃게 좀 해주시라고요…. 일라이나 씨가 노려보는 게 무섭지도 않으세요?」

「뭐? 누가 누굴 노려봐? …야이 귀쟁이야! 뭘 그렇게 힐끔힐끔 쳐다보고 앉았어. 내 수염에 관심이라도 있나? 이 드레이븐의 탐스러운 수염을 기르는 비법을 알려주랴?」

「뭐라구요?! 땅딸보가 웃겨 정말! 그깟 수염 확 뜯어버려줘?!」

「뭬야?! 싫으면 싫다고 말할 것이지─.」

「…….」

「하~. 또 싸우네, 또. …용사, 너도 좀 말려봐, 아니면 대책을 내놓든가.」

「대책? 그냥 반말을 까라고 해.」

「갑자기 뭔 소리야?」

「툭하면 싸우는 애들은 싸우다 보면 친해진댄다.」

「수백살 먹은 애들이 어딨냐. …저기 있네.」

「정 뭣하면 시범을 보여줄게. ─야, 드레이븐! 그만 나대고 밥이나 먹어. 다 식혀서 먹고 싶은 거냐?」

「응? …크하하하! 좋아, 밥은 중요하지. 역시 호쾌하구만, 우리 대장님은! 그래서 말인데…. 겸사겸사 맥주도 한 잔 어떤가? 내가 꿍쳐뒀던 비장의 것을 따보도록 하지!」

「후우. 이 답없는 난쟁이를 대체 어떻게 해야….」

「그러면서 잔은 왜 가져오나?」

「시끄러워요!」

또 하나는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지 말 것.

「멜룸 대교 폭파 작전은 성공. 이걸로 이틀의 시간을 벌었어. 빠듯하지만 피난민들이 어찌어찌 대피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리고 측면의 능선을 지키던 드레이븐과 일라이나의 사망이 확인됐다.」

「…어떻게?」

「등을 맞대고 주저앉아 있는 둘의 시신을, 수색에 나섰던 기사들이 발견했다. 분명 마지막까지 싸운 거겠지. 서로에게 등을 맡기고서.」

「…….」

「흉수는 상흔으로 추정했을 때, 그림자 늑대들과 몰이꾼.」

「고작 그 정도론 그 녀석들을 못 죽여. 숨기는 거 없이 전부 말해.」

「…둘 다 주로 쓰던 팔이 어깻죽지 어름부터 없었다.」

「─[거완의 베].」

「마왕의 수족 중 하나가 이런 변방 전선에 모습을 드러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라」

「…그러냐.」

「…뭘 하는 거냐.」

「보고서.」

「[난쟁이 전사]와 [요정 궁수]가 사망… 너!」

「저번엔 필립, 이번엔 드레이븐과 일라이나…. 대체 우린 지금까지 몇 명을 묻어온 거지? 하나하나 기억하기도 힘들어. 이제는 파티에서 맡은 역할, 그 필요성만을 보겠어.」

「그래도, 그래도…! 이건 아니다!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잠깐, 기다려! 어딜 가려는 거야!」

「거완 놈 모가지 따러. 그놈 팔이 그렇게 단단하다는데 어디 찢어버려도 멀쩡할지 한번 보자고.」

수많은 명성을 날린 용사의 동료들.

그들 중에선 쌓아온 기존의 유명세를 그대로 가져온 이가 있었다.

물론 악명도 유명으로 쳐준다면 말이다.

그의 칭호는 바로 [대도(大?)].

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전 대륙의 현상수배범으로 유명한 인물.

대미궁의 최심부, 인테르 제국의 황궁, 로그레테 산맥….

경비가 쫙 깔린 삼엄한 장소이거나 아예 금지(??)라도 제 집처럼 드나들고.

인테르 황제의 인장, 오래전의 멸망한 왕국이 숨겨둔 금괴의 산, 경국의 다이아, 아카데미 학부생의 졸업 논문….

훔치지 못할 물건이 없다는 전설적인 도둑.

그의 진짜 모습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키, 성별, 연령 등등 외견을 자유자재로 바꾸기 때문이다.

그런 도둑은 이전의 죄목들을 전부 없애주겠다는 조건으로 용사의 파티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를 동료로 받아들인 용사와 그의 동료들은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하던 대도의 본모습을 보게 되었다.

히끗히끗한 머리칼. 빅토리아 시대의 정장과 비슷한 디자인의 말끔하고 구김살 하나 없는 양복을 차려입은 품위 있는 노신사였다.

벌레 하나도 잡지 않을 만큼 인자한 웃음을 흘리는 노신사는 맡겨진 임무는 반드시 수행하는 믿음직스러운 동료였다.

“……거서 뭐해.”

황궁의 외진 구석에 있는 방에서 귀갑 묶기로 묶인 채로 천장에 매달려있는 노인이 결코 아니란 말이다.

“실례하고 있네, 용사 군.”

“실례고 자시고 그 위에서 뭐하고 있는 거냐고.”

“보면 알잖는가. 묶여 있네만.”

“그건 나도 알아! 내가 묻는 건 왜 그러고 있냐 이거라고! 그런 것쯤은 바로 풀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잡히는 경우를 가정해서 쇠사슬로 온몸이 묶이고 발에 족쇄를 찬 상태로 바다에 뛰어드는 훈련도 해봤다고 하지 않았던가. 비록 한번도 잡힌 적이 없다곤 하지만 말이다.

그런 사람이 고작 밧줄 하나에 묶여 있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는 듯한 용사.

대도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것처럼 차근차근한 말투로 말했다.

“이 밧줄은 그런 나를 위한 거라네. 사실, 난 두려워 하고 있었다네.”

“두려워?”

“그래. 난 두려워하고 있었지. 그 두려움이 바로 날 어떤 상황에서 살길을 열어주는 원동력이 되어줬지. 이건… 그저, 내 두려움을 직시한 결과로 따라온 것에 불과하네.”

“잡히는 게 두려웠던 거로군.”

그래, 그럴 법도 했다.

저 노신사가 털고 다녔던 대상들이 어디 만만한 작자들이 있기나 했는가. 무려 황제의 인장도 훔쳤던 도둑이다. 고작 죽음으로 그 형벌이 끝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겠지.

유례없던 적의 위협에 온갖 수단을 동원하던 연합의 지휘부가 모든 죄를 없던 걸로 만들어주겠다는 통큰 딜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도 쫓기고 있었을 거다.

어찌보면 대전은 그에게 있어서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갈 기회를 부여해준 것이었다.

그런데 그거랑 지금 구속되어 있는 게 무슨 상관이지?

황궁을 털다가 걸렸나? 마지막 결전 전에 완전히 손 씼을 거라고 했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면 플로렌스 황태녀가 황궁에 동료가 머물고 있으니 상의 후 데려가라고 안내해줄 이유가 없다.

“용사 군,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보인다네. 자네의 예상은 틀렸다고 말해주겠네. 난 훔치려 든 것이 없으니까. 말했잖은가 두려움을 직시한 결과라고.”

대도는 어쩐지 편안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예전에 생전 처음으로 소매치기를 했던 날. 미숙했었기에 금방 들켰고 그때 처음으로 잡힐 뻔했지. 그때였다네. 심장이 두근두근대며 머리가 새하얘졌고, 이윽고 정신을 차린 끝에 나 자신을 무섭다고 느낀 건.”

“…자신을?”

“그래. 잡혀서 묶인다. 이 행위에 흥취를 느껴버릴 나 자신이 말이네.”

……?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천치가 개벽할 망언을 들은 용사의 얼굴이 순간 멍청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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