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15화 (15/45)

〈 15화 〉 3장. 현자를 찾아서(4)

* * *

하루가 깨어나는 아침 햇살이 스며들 즈음이 되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새벽의 이슬이 풍기는 내음을 한껏 만끽하며 기지개를 펴는 아침. 뚜둑. 뚝. 소리가 나는 것과 함께 관절에서 시원한 감각이 퍼져나간다.

깨끗한 마루바닥에 아른거리는 햇빛. 가지런한 나무 판자로 만들어놓은 창문막이 틈새로 스며드는 잔영을 쫓고 있자니 저 따스함을 온몸으로 느끼고파 창문을 열어젖히게 된다.

봄 때에 맞지 않는 서늘한 바람이 내부를 환기시킨다.

잔잔이 너울치는 푸르른 바닷가와 거대한 선착장. 창문을 연 그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저 아래 분주히 오가는 마차들과 출항 준비로 선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선적 작업을 지시하는 고성이 아련하게 들려오고 짐을 다 실은 배가 돛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하나둘 항구를 빠져나가나, 그만큼 선박이 새로 입항하며 부두를 가득 메웠다.

먼바다로 나아가는 두려움과 치솟는 기대를 마주 안고 출항하는 활력이 샘솟는 항구 도시.

리유스.

마땅한 주거지도 없이 떠돌던 현자.

용사 파티원이었던 그가 이 도시에 정착한 것도 벌써 3년째였다.

삐이이익─

화로에 올려둔 주전자 속의 물이 끓었다. 빨리 움직이라는 경고음 같으나, 현자는 느긋하게 마디마디가 툭 튀어나온 손으로 찬장에서 나무컵을 꺼낸다. 그는 매끈한 감촉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직접 만든 것이다.

휘릭, 손짓하자 주전자가 절로 떠올라 현자의 뒤를 졸졸 따라온다. 거대한 나무를 통째로 깎아낸 식탁. 그 위에 식당에 가면 있는 부수 양념처럼 작은 유리병과 티스푼이 놓여있었다. 높은 자리에 오른 제자가 보내준 최상급 꿀이었다.

병뚜껑을 열고 나무컵에 티스푼으로 적당량의 꿀을 덜었다. 둥둥 떠있는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고 뜨거운 물을 조심스럽게 따랐다. 끓는 물과 꿀이 섞이고 달달한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며 집안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당장이라도 한모금 머금고 싶으나 서두르면 안된다.

천천히. 느리게. 느긋하게.

꿀과 온수가 스르륵 한몸처럼 섞일 시간을 줘야한다.

그 잠깐 사이에 현자는 현관에 다녀왔다.

두툼한 월간 신문과 부록처럼 딸려온 학술지.

통나무 문 아래에 껴있던 것이었다.

온 대륙을 누비고 다녔던 용사의 동료였던 현자는 오늘날, 월간 신문에 글을 쓰고 있는 작가로 재탄생했다.

주제는 그때 그때 달랐다.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시작한 소일거리였으나, 근 3년간 매달 빠지지 않고 하다보니 애착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영구 구독권을 끊었다.

“잘 나왔군.”

두툼한 신문의 중간즈음을 살펴보던 현자는 문맥이 맞지 않다거나 오탈자 하나 없이 온전히 실린 글을 보고선 흐뭇해진 듯이 미소짓고선 꿀차를 한모금──

퉁퉁퉁퉁퉁.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제길.”

느린 템포로 연주되는 교양곡처럼 잔잔히 흘러가던 흐름이 뚝 끊겼다.

엇박자처럼 잡음이 끼어든 것이다.

하루의 시작을 기분좋게 맞이하려다가 한참이었는데.

방해를 받자 의식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혀 두었던 신경질적인 본성이 툭 튀어나온다.

“뭐야?! 이 시간에 누가 날 찾아왔다고? …누구든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로군.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어.”

쿵쿵. 거칠게 발을 구르며 일어나는 현자.

현관으로 다가가던 그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누구일까?

누구길래 이른 아침부터 이 집을 찾아온 걸까?

항구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해안 절벽 위의 오두막집.

용사 파티원 중에 하나였던 현자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하는 사람은 몇없다.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인물은 바로 리유스의 시장. 현자는 시청에 가끔 들르면서 여러가지 조언을 해줌으로 그에게서 편의를 보장받고 있었다.

그러나 시장은 방문하기 전날, 미리 서신이나 사람을 보내어 방문해도 되는지 여부를 여쭙는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방문한다는 것은 시장의 성격상 어불성설이다.

주기적으로 오두막집에 들리는 인물은 또 있다. 신문을 가져다주는 소년. 그러나 이미 신문은 배달받았고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그 소년이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돈이 되지 않으니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정도로 지금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그럼 도대체 누구지?

굳은 얼굴의 현자는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훗날, 현자는 이때의 일을 두고서 이렇게 말했다.

튀어야 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어야 했다고.

뒷문을 열고 까마득한 절벽을 타고 내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쳐야 했다고 말이다.

“안녕, 오랜만이야. ‘현자’. 갑작스럽지만 도오.”

쾅!

현자는 문을 곧장 닫았다.

“씹…?!”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는 욕지거리.

문이 열렸던 건 잠깐 뿐이지만 불청객의 면상은 똑똑히 봤다.

분명하다.

…용사다.

숨길 수 없는 동요를 표정에 한가득 나타내던 현자가 식탁으로 돌아오자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대도가 눈썹을 까딱이며 물었다.

“반응이 빠르구먼, 그렇네 놀랐나?”

“당연하지. 알아보지 못할 수가 있나. 어울리지도 않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지만 그놈 면상이 거기서 거기지.”

“오호라. 그걸 바로 알아차린다고?”

“동고동락한 세월이 얼만데 그것도 하나 못 알아볼 리가.”

“과연 통찰력이 제법이야, 역시 현자로군. 그나저나 이 꿀차 맛있군. 딱 내 취향이야. 이런 꿀은 흔치 않은데 귀한 걸 갖고 있군. 아, 한잔 더 마셔도 되나?”

“음. 얼마든…… 잠깐 네놈은 또 어디서 들어왔어?!”

우당탕탕!

현자가 놀라 일어나자 떠밀린 의자가 바닥을 굴렀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대도는 꿀병에서 꿀을 덜어내어 꿀차를 또 한잔 타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현자는 분개했다.

“내 꿀이다!”

“이런이런. 그 성깔은 여전하구먼. 나눠야 잘살고 마음도 풍족해지는 게야. 자네가 모를 리도 없잖나.”

“도둑놈에게 그딴 소리를 듣고 싶진 않다!”

“이거 왜 그러나. 나만큼 베풀고 사는 사람은 세상 천지 아무데도 없을 게야. 내 사람들에게 국한된 이야기이긴 하다만 말일세.”

끼익.

소리와 함께 등뒤의 문이 열리고 용사가 들어왔다.

“문전 박대 당하기는 오랜만인데.”

“어딜 들어와?! 당장 나가라! 이 역귀야!”

“역귀? 크흐흐흡. 이 친구, 못 본 사이에 농담이 늘었군. 특별히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것이 더욱 재밌는 걸.”

용사가 난색해하며 머리를 긁적이며 제 집에 흙발로 들어오는 꼴에 현자가 씩씩거리며 방방 뛴다. 구경꾼의 자세를 취한 대도가 둘을 보며 낄낄거리며 웃어재꼈다.

고민도 없고 고심할 거리도 없고 하루하루 그냥 세월을 흘려보내는.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았던 만족스러운 전원 생활.

불청객 두 명을 번갈아보던 현자는 전원 생활이 끝이 다가왔음을 직감하며 졀규했다.

“두 놈 다 꺼지라고!”

*

흔히 말하는 사망 플래그 중에 이런 게 있다.

‘이 일이 끝나면….’

으로 시작되는 사망 플래그.

한번 시작되면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등산가들마냥 온갖 바리에이션이 튀어나온다.

그날도 그랬다.

그때 당시 가장 유명했던 사건은, 남부 전선에서 날뛰던 좌장, 【거완의 베】가 [요정 궁수]와 [난쟁이 전사]의 복수를 위해 달려온 용사에게 토벌당했던 일일 것이다.

이를 계기로 남부에 한정하여 범종족 연합 측이 우세를 잡고서 전선을 밀어 올렸고 용사 파티가 그 선봉에 섰다.

그때는 [성녀]와 [대도], [겨울의 마녀] 모두 동료가 아니었던 때. 그러던 어느 날 밤의 일.

야영지에서 모닥불을 한창 쬐고 있던 그때, 한 사람이 말을 꺼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너희들은 뭘 할 거냐.」

[슬레이어]였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검을 한 손으로 붕붕 휘두르던 그는 훌륭한 실력을 가진 전사였다.

「아이 참~.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이른 거 아니냥~?」

「[들고양이] 말이 맞다. 군단장 넷 중에 이제야 하나 잡았을 뿐이다. 방심은 일처리가 깔끔할 수 없도록 녹슬게 만들지.」

「아……. 그래…….」

[들고양이]가 냐하하하 웃으면서 꼬리를 살랑이고 무뚝뚝한 [암살자]가 이에 동조했다.

무안한 듯이 양 손의 검지 손가락을 마주 누르고 빙빙 돌리기 시작하는 [슬레이어].

「저렇게까지 말하는 데 그냥 받아주지 그래.」

덩치도 큼지막한 자식이 그러고 있으니 정말 꼴불견이라, 용사의 부추김에 동료들은 하는 수 없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시작은 들고양이였다.

「끝나면 뭘 하려나~. 음. 나는 저어기 시가르 연합왕국이 좋아!」

「생선 때문인게 확실한데. 이 고양이.」

「냐하하하하! 북해의 생선은 맛이 좋으니까냥!」

한참 보주에 저장된 주문을 점검하고 있던 [적마도사]는 그 속이 뻔하다는 힐끔거렸다. 정곡이 찔린 [들고양이]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선 낭랑하게 웃어재쳤다.

「그러는 [적마도사]는 어쩔거냐냥? 정 갈곳 없으면 같이 가줄 수도 있는데냥!」

「글쎄… 커리어로선 훌륭하니까 어디 왕실 마법사 자리 정도는 꿰찰 수 있지 않을까.」

「앗! 그러면 같이 시가르로 가는 거다냥!」

「됐네요.」

말은 거칠었지만 미소를 은은히 띄우는 게 영 싫지만은 않아보이는 [적마도사].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들고양이]는 기분 좋게 갸르릉거린다.

「보기 좋소이다. 이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들은. 불타오르는 것만 같소.」

「뭘 다 통달한 것처럼 지껄이고 앉았냐. [마도사].」

훗날 [대마도사]라 불릴 노인은 인상을 찌뿌렸다.

「[현자], 당신은 너무 예의라는 걸 모르는 것 같소이다.」

「시끄럽네. 너처럼 꼬아말하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나아.」

「올곧기만 한 말은 진리를 담아내지 못하오. 하나의 문장에 수십가지의 함의. 마법사에게는 기본 소양이지. 당신도 특히 유념해주길 바라고 있소.」

원론적인 말을 늘어놓는 [마도사].

그러나 [현자]는 저러는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잘나셨군. 그래서 두던 사람은 어디로 갔나?」

「윽!」

「내 계산으로는 7수 안에 끝날 것 같다.」

「아직, 아직이오!」

「이거 구차하게 왜 이래? 저번엔 졌으면 인정할 줄도 알아야 일장연설을 늘어놓더니만! 왜, 오늘도 그 말 그대로 한번 해보시지 그러나? ‘승패에 관계없이 자신 스스로에게만 떳떳하면 되오. 그러니 오늘의 패배를 담아 두지 마시오.’ 라고 말이야!」

이리저리 얽히고 설킨 체스판을 내려다보는 두 노인…,

아니. 이때는 둘 다 40, 50대였다.

「그, 그보다! 슬레이어가 묻질 않았소.」

「앙?」

[마도사]가 다급히 주의를 돌렸다.

뭔 소린가 하던 [현자]는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 넘어가주기로 했다.

「아. 끝나고 뭐할 거냐고? 그거야 뻔하지!」

「역시 작위를 얻고 관직에 나아갈 생각이로군! 음음. 인정하긴 싫지만 당신이라면 제왕의 자문역도 가능할테니 말이오.」

「아니. 한적한 시골에 처박힐 거다.」

그 말 한마디에 모든 동료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현자는 타닥타닥 불똥을 튀기며 조용히 타오르는 모닥불을 직시하며 말했다.

「일평생 겪어볼 일을 요근래 너무 몰아서 겪었다. 솔직히 금방 끝날 것 같지도 않고 그때쯤이면 나도 지쳐 있겠지. 그렇다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에서 홀로 있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현자]말고 [은자]로 불러줄까?」

「지금말고 나중에 해라. 나중에….」

*

“…그땐 그러더니만 이게 뭐야? 한적한 시골이랑은 거리가 너무 먼 곳에서 살고 있잖아. 해안 절벽 위에 집짓고 산다고 시골이 아니야. 도시까지 도보로 15분이면 가는 곳이 뭔 시골이냐고.”

“오호. 오호. 그땐 그랬단 말이지. 자네 젋을 적에는 꽤나 허세 넘치는 성격이었군. 멋으로 살았어. 뻔하네. 그런 분위기에서 목소리를 깔고 말하면 멋져보일 줄 알았던 게야! 그렇게 부끄러워 하지 말게나. 한창 혈기가 넘칠 때의 부끄러워 하는 게 아닐세! 나도 그랬거든. 자네 만큼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으아아악! 다 꺼져! 꺼지라고 이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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