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3장. 현자를 찾아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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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 도시 리유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곶 위에 지어진 오두막집.
그 내부를 정적이 감싸고 있었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세 사람.
그 중에서도 그 주인되는 이가 이 분위기를 풍기는 주범이었다.
식탁 의자에 앉은 현자는 말없이 입술을 꾹 다물고 꿀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도 시간이 지나자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용사와 대도는 짖궃게 놀려대는 것을 멈췄다.
둘이 입을 다물자 무덤덤한 태도로 일어난 현자가 찬장에서 잔을 꺼내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꿀차가 둘 앞에 놓여졌다.
손님으로 대접하겠다는 의미였다.
현자의 원래 성질머리대로라면 꿀차를 피부에 강제로 양보시켰을 텐데.
차를 대접한다는 것은 달갑지 않다는 기색이 풍겨오지만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의미였다.
나쁘지 않은 신호에 안도한 용사는 꿀차를 꿀꺽 마셨다.
“그래서.”
현자가 물었다.
“무슨 볼 일로 찾아온거냐.”
“너무 날이 서있는 거 아닌가? 현자.”
“당연하지. 너 같으면 고생고생하다가 겨우 자리잡고 쉬고 있는데 몸소 찾아오는 일거리를 환영할 수 있겠냐.”
현자는 저 귀한 꿀차를 벌써 5잔째 비우고 있는 대도가 짜증난다는 듯이 째려봤다.
“실은….”
가볍게 운을 뗀 용사는 곧이 곧대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일전에 대도 앞에서 한 말과 똑같은 사정 설명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대도와 합류한 이후의 이야기가 덧붙여 졌다는 것뿐.
이야기를 다들은 현자는 어처구니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리유스의 시장이 저 도둑놈의 패거리였다? 잘 차려 입고 다니는 게 어쩐지 기시감이 들더니만!”
“패거리가 아니라 ‘옛’ 수하일세. 그는 손을 씻은 지 꽤 오래되었거든. 가끔 쓸모 있는 정보를 전해주는 것 외에는 아예 무관계하네.”
“정보책이라는 말을 참 빙빙 돌려서 하는군. 빌어먹을.”
어깨를 으쓱으쓱대는 대도에게 현자는 분통을 터트렸다.
“그래서.”
일순간 현자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혜가 뻔뜩이는 눈으로 그는 제 손 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이한 빛을 내는 조각이 사람을 홀리는 마성의 빛을 흩뿌린다.
바로 용사가 가져온 [마왕의 파편]이었다.
“‘이것’때문에 날 찾아왔다 이거지?”
“그래.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냐.”
흔들림 없는 대답을 듣고선 남은 꿀차를 쭈욱 들이켰다.
“명확한 결과와 수치로 보여주는 편이 너나 나한테도 더 좋겠지. 잠시만 기다려라.”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자는 식탁의 두 사람을 뒤로하고 골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구석에 놓여져 있던 가죽 가방을 찾아내었다. 외견은 현대의 약품 상자를 닮아 있었다.
수십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고 다녔던 물건.
리유스에 정착하고 나서는 한번도 꺼내어 보지 않은 그의 시약 가방이었다.
되돌아온 현자는 여러가지 시약을 꺼내어 파편 위로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천연색 불빛이 번쩍이고 때로는 푸른 김이 떠오르기도 한다. 대화는 없었다.
용사는 마왕의 파편의 진위 여부를 알고 싶다. 대도는 그런 용사를 성심성의껏 도와줘야한다. 현자는 아무튼 둘 다 빨리 꺼져줬으면 좋겠다.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았다.
이해가 일치된 셋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맺어졌다.
물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탓에 불가피하게 일에 휘말린 현자의 의향은 1/3 밖에 들어가지 않은 합의였다.
“더 볼 것도 없다. 가짜다.”
마침내 현자는 단호한 말투로 단언했다.
이 마왕의 파편은 가짜이노라고.
“마성을 뿜어내는 것과 침식하는 특성은 원본을 빼다 닮긴 했군. 하지만 완성도 면에서는 크게 뒤떨어져. 어린애가 조잡한 찰흙으로 모양만 흉내내놓은 것 같군. 아무리 정교해도 그래봤자 찰흙이라는 소리다.”
이를테면 그리다만 수채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룩덜룩해서 알아볼 수 없다는 의미였다.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게 무슨 소리야?”
용사는 현자에게 물었다. 일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벌써 꿀차를 7잔째 비우고 있는 당사자에게서 말이다. 다만 대도는 파편의 조성을 보고 추측한 것일 뿐이었다.
대도의 안목은 물건의 값어치를 정확히 가려내는 것으로. 원인을 규명하고 쓰임새를 파악하는 현자의 것과는 종류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건 안정성도 떨어진다는 거다.”
완전히 설명 모드로 들어간 현자를 보면서 용사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용사는 마왕의 파편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봐서 익숙해졌지만 파편은 꽤나 까다로운 물질이었다.
현자는 파편의 주요 기능을 세가지로 압축하였다.
숙주를 잠식하여 강화시키는 침식.
완전히 침식된 숙주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증폭.
증폭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부터 활성화되는 생산.
이 세가지 기능들이 파편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할 수 있었다.
“마왕의 파편의 실체가 밝혀졌을 때 마법사들을 두려움에 빠진 건 바로 이 3가지의 효율이 너무나도 높았기 때문이다. 신체의 기능을 활성화시켜주는 것은 물론이오, 마나 회로마저도 튼튼하고 조밀하게 변형시키면서 폭주할 위험이 전혀 없었으니까.”
이 세 가지의 기능은 하나의 공정이 되고 싸이클을 이루어 무한히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마왕의 파편은 한때 신의 물질이라고 불렸었다.
최초로 발견한 마법사가 생산 페이스로 넘어간 숙주로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데 이 모조품은 안정성이 굉장히 떨어진다. 공정을 대충 2번… 아니. 3번만 돌려도 숙주나 파편 둘 중 하나가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거다.”
얼추 예상해보건데 대륙법으로 금지된 약물 즈음… 그 정도라면 위험성은 극히 낮아진다. 파편이 위험시 된 것은 증폭율이 숙주와 파편이 버틴다는 가정하에 사실상 무한정하기 때문이었다.
“주체가 되는 파편의 안정성이 뒤떨어진다면 증폭율도 그리 대단하지는 않다. 그런 주제에 반드시 죽어버린다는 단점을 갖고 있으니 약물로도 부적합하지.”
요컨데 신경쓸 물건이 되지 않는다며 현자는 새로 따라낸 꿀차를 마셨다. 무언가 이상하다. 용사와 대도가 시선을 교환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꺠달았다. 그 수상함에 대도가 인상을 찌뿌리며 물었다.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가?”
“앞뒤 다 짜르고 말하면 아무리 나라도 못 알아 들어.”
“우리가 가져온 파편이 가짜인 건 이미 알고 있었다네.”
“…뭐야. 그럼 번거롭게 시약을 쓸 필요도 없었잖아. 진작 말할 것이지.”
불만어린 기색으로 현자가 삐쭉거리며 투덜거렸다. 주제를 은근슬쩍 돌릴려고하지만 용사나 대도나 그렇게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 넘어가주고 싶지 않았던 대도가 대표로 말문을 열었다.
“이 나조차도 잠시나마 진짜로 착각할 정도의 퀼리티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진짜인 줄 알겠지.”
“그래. 그렇기에 우리는 알아야만 하네. 이걸 누가 만들었는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는가, 이 유사 파편의 존재가 알려졌을 때 세계는 어떻게 반응할 건가.”
“말도 하기 싫다는 눈치를 주면 입 좀 다물어 줄 순 없나? 그러면 어디가 덧나나?”
현자는 자신이 말하고서도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위험은 덮어둔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으니까.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혼란이 찾아오겠군.”
뛰어난 지성을 가진 그의 머리는 그 혼란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하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보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었다.
“열화 중의 열화품이고 가짜이긴해도 그 특성은 너무나도 비슷해. 진위 여부는 중요치 않아. 알려지는 순간 누구나 그 악몽을 떠올리고야 말거다.”
그거면 끝.
사람의 정신은 연약한 고무줄과도 같았다.
고무줄은 한계까지 팽팽해졌다가 다시 되돌아오지만, 어느 기점을 넘어버리면 탄성을 잃고 머잖아 끊어져버린다.
요컨데 지금의 인류는 PTSD에 걸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른 이종족들의 사정은 다를 수도 있으나 연합에서 다수를 차지했던 인간 측에 이상이 발생한다면 그들도 멀쩡하진 못한다.
“적을 물리치고 자멸로 끝나다니. 세상사 참 요지경이겠군.”
미간에 골이 패인다.
정말이지 골치아픈 걸 가져와버리지 않았나 이놈들은.
역시나 용사는 역귀다.
용사라는 별은 고난과 역경의 상징성(?)이다.
이를테면 평화롭던 시골 마을에 용사가 들른다면 마족 숭배자들이 가득한 마굴로 바뀌는 어처구니 일은 일상다반사로 일어난다. 잠잠하던 바다인데 용사가 섬을 건너가려고 배를 구하면 역대급 풍랑이 몰아치고, 멀쩡하던 가도가 산사태로 흔적도 없이 없어지는 일도 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역귀, 역신인 것이다.
이럴때야말로 무지라는 축복이 활약해야 하지 않느냐고 현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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