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4장. 회상
* * *
“그러면 뭐라도 해야….”
“쓸데없는 참견이다. 네가 할 일도, 그리고 내가 할 일도 아니지. 그리고 용사 네가 할 일도 아니다. 이 일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났다.”
대도는 급한 듯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말을 이었지만, 현자는 단호한 말투로 말을 딱 끊었다.
“플로렌스 황태녀가 보냈다지?”
“그래.”
“그럼 구태여 떠맡지 않아도 되는 일일 거다. 그녀가 허투루 일을 처리할 리가 없으니까.”
“끄응….”
대도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반론하지 못하고 신음성만을 흘렸다.
용사는 의문을 가졌다.
맡지 않아도 되는 일일거라고…?
“잠깐 기다려, 플로렌스가 한 말은 조금 달랐는데. 아는 사람은 그 자리에 있던 세 명 외에는 없댔어. 보안도 철저히 유지했다고.”
그건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 옆에 있던 대공조차도 처음 듣는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으니 플로센스의 말은 확실히 사실이었을 것이다.
“하.”
용사의 말을 들은 현자는 코웃음을 쳤다.
순진하게 그걸 믿느냐는 듯이 비웃는다.
“그래, 그랬겠지. 그때는 그 말대로 아는 사람은 ‘세 명’이었을 거야.”
“지금은 아니다?”
“당연하지. 그녀는 장차 하나의 국가를 책임질 후계자야. 이번 건처럼 중대한 사안을 덜렁 한 명에게만 맡길 리가 없잖냐. 그게 설령 너라고 해도 말이다, 이미 따로 사람을 부리고 있을 게 뻔해.”
오히려 후자 쪽이라면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황족들이 불쌍하다고 하는 현자.
“그녀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맹수야. 기다리기보다는 찾아서 잡아먹는 쪽이지. 비유하자면 호랑이와 고양이다. 같은 종자이긴 해도 엄연히 다르지. 그녀는 호랑이다. 그런데 마냥 기다리고 있을 것 같으냐.”
호랑이는 진즉에 먹잇감을 쫓아 추격을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미 끝났어. 더 할 필요도 없지. 이미 쌓인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이 말을 끝으로 현자는 침묵했다.
기나긴 장황설을 늘어놓던 입은 꾹 다물렸다.
판결을 내린 재판관같은 현자의 얼굴에 대고 더이상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었다. 은은하게 집 안을 떠돌던 마력이. 그 흐름이 이야기가 더 나아가게 하는 것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그렇단 말이지.”
현자에게는 한가지 말버릇이 있었다.
앞선 이들이 지식을 계승받고 후인들에게 베풀었기에, 수혜를 받은 후대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성인의 의무라 하였다. 함께 다닐 때는 귀에 피가 날 정도로 들었던 말이었다. 무슨 말을 할라치면 반드시 저 말을 한 다음에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자는 달랐다.
“그래.”
용사는 현자의 얼굴을 세세히 살폈다.
주름지고 살이 늘어지는 지친 얼굴.
처음 만났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중년의 나이였지만 팽팽했던 피부와 세상을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바꿔보이겠다며 패기가 넘치던 신념을 가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팽팽했던 피부가 어느샌가 자글자글하고 거칠어져 있었다.
그 주름의 골에서 패기 넘치던 중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더는 고생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도와달라 강요를 해봤자 소용은 없다.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도 재주가 한가닥 정돈 있지만, 하기 싫었다.
아마도 현자 또한 그러길 바라않을 것이다. 혹은 그러길 바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되도록 그의 뜻을 존중하고 싶었다.
“잠깐만 기다려보게나!”
그렇게 납득하려하자 돌연 대도의 급박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그냥 갈 셈인가? 문제가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았네. 찾아온 보람이 없단 말일세.”
이대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물러난다고?
대도는 당연히 납득할 수 없었다.
용사와 이곳까지 찾아오는 데만 보름이나 되는 시간을 소모했다.
그런데 결국 현자의 말은 일전에 일전에 자신이 했던 추리의 복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나. 저치가 저래도 자네가 말하면 틀림없이 한 팔 거들어 줄 것이 분명하네. 그게 아깝단 말일세. 더구나 자네나 나나 전면에 나설 상황이 못되니, 하다못해 현자가 직접 나서준다면 일이 더 수월해진단 말일세.”
“그거야 그렇겠지. 그래도 안 돼.”
단호하게 거절하자 대도는 궁시렁거리면서도 콧수염을 매만져댔다.
뜻에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떠나기 전에 용사는 다시 한 번 현자를 바라보았다.
「이 평온을 깨고 싶지 않아. 이제 쉬고 싶다.」
자신을 따라나서고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고생과 고난을 겪은 후, 마침내 정착한 현자는 그런 마음이 들었으리라. 이번 방문은 그의 허물을 지적하는 것과 같았겠지.
거진 은퇴한 처지인데 오랜만에 만난 동료는 여전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용사 본인도‘어어어어.’하다가 떠맡은 거나 다름없지만 정황상 그렇게 보이진 않았으리라.
“쩝. 미안하다. 우리가 괜히 찾아온 것 같네.”
사과의 말을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험상 이런 분위기일 때 눈치채지 못하도록 빠르게 자리를 뜨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말하긴 그렇지만… 고생했다. 지금까지 날 도와 줘서 정말 고맙다. 네 말은 항상 큰 도움이 됐어. 이만 푹 쉬어라.”
지금까지 함께해 줘서 고맙다는 투의 작별 인사를 건네고선 뒤로 돌아섰다.
“아, 아니.”
뒤쪽에서 황당해하는 대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흘끗 봤더니 이젠 비어 버린 찻잔을 매만지며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쩐지 아무렇지도 않게 현자를 만나러 가자하더라니.’
눈치가 백단이던 도둑은 늙으면서 일단으로 줄어 든 모양이다.
‘두고 갈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지.’
용사는 뒷짐을 지며 보일 듯 말 듯 하게 손목을 꺾었다.
현자를 뺀 나머지 동료들끼리만 사용하던 신호였다.
“어?”
눈치가 완전히 죽진 않은 모양이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 아! 그래, 꿀차 잘 마셨네. 그럼 이만 가봄세.”
금세 상황 파악을 마친 대도가 삐딱해졌던 실크 해트를 고쳐쓰며 뒤를 따라왔다.
용사는 이미 문 앞에 다다라 있었다.
침울해 있던 현자가 눈매를 좁힌 건 그때였다.
“잠깐 기다려.”
철커덕.
말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재빠르게 문고리를 잡아당겼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늦었나! 굳게 잠긴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부술까?’
“이놈들 좀 보게?”
어이없는 걸 본다는 말투에 재빨리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이미 기차는 저 멀리 떠나가 있었다. 순식간에 뒤를 잡은 현자가 팔을 꽈악 붙잡았다. 이대로 휘두른다면 육체파가 아닌 현자는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다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하하.”
일단은 웃자.
그리고 틈을 봐서 도망치는 게 좋았다. 애써 웃는 얼굴을 한 용사는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왜 그래? 같이 가고 싶었어? 미안하지만 그 이야기는 없던 걸로….”
“개소리 집어치워라. 어딜 제 볼일만 보고 홀라당 내 빼먹으려고 들어.”
어디서 개수작을 부리고 있냐. 라는 듯한 흉소를 짓는 현자. 눈이 잠시 마주쳤는데 스파크가 튀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언제 기운이 없었냐는 듯,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뀐 현자가 말했다.
“내가 언제나 말했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한다.”
“잘 만 기억하고 있으면서 토낄려 한 게 더 괘씸해. 그리고 넌 또 어디가냐?”
“으헉!”
쾅!
큰 소리가 났다.
유일하게 열려 있던 창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크헉!”
슬쩍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있던 대도가 창문짝에 맞아 바닥으로 데구르르 떨어졌다.
용사가 시선을 잡아 끈 사이 몰래 내빼려던 것이다.
시선이 집중되자 관리를 잘 된 콧수염이 추욱 늘어진다.
그 반응과 아까 전의 일을 떠올려 보니 아무래도 쌔까맣게 까먹고 있던 것이 분명하다.
‘현자의 도움을 구했다면 대가를 치러야한다.’
옛 동료들도 질릴 대로 질려한 현자의 그 버릇을.
“오늘은 죽어 보는 거다.”
*
탈무드.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흔히 교훈을 주는 우화집으로 알려진 이 책에는, 술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술을 처음 마실 때는 양처럼 온순하고, 좀 더 마시면 사자처럼 사나워지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원숭이처럼 노래하고 춤추고, 결국 돼지처럼 토하며 추해지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우화에서 곧잘 사람들은 착각을 하곤 한다.
가장 외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마지막 ‘돼지’가 가장 나쁜 것이라고.
그건 편견이다.
마지막에 위치한다고 다 나쁜 건 아니다.
사람이 술에 취해 ‘돼지’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잠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술 자리를 가졌던 경험을 돌이켜보건대, 가장 귀찮고 짜증나는 유형은 바로 ‘원숭이’다.
그것도 아무리 술을 마셔도 ‘돼지’로 넘어가지 않고 ‘원숭이’ 상태에서 머무는, 술을 들이 부으려면 지 위장에나 부을 것이지 대작하는 사람의 위장과 간도 씹창을 내놔야 직성이 풀리는 일명 주당이라 불리는 인종들.
“으하하하하핫!”
현자는 바로 특급 주당이었다.
“끄어어억. 끄허어억.”
“어우야, 우리 도둑이가 술이 잘 들어가네. 역쉬 뭘 좀 아니까 마쉴 줄 알어어어~. 그런데 너 잔이 비어 있다?”
“마셨으니까…! 그야 막 마셨으니까 없지 않겠나…!”
뽕!
“아, 아아아아! 그, 그만.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 그만 좀 붓게!”
“으히히히하하하핫! 쭉 들이켜 쭈우욱! 오이구, 오이구, 그래 잘 먹네. 자 한 잔 더 받아…”
대도는 술잔 한가득 차오르는 술의 수면을 본다.
슬슬 간이 위험한 나이인데.
안색이 점차 푸르죽죽해졌다.
그의 시선이 측면을 향한다.
‘살려 줘!’
눈물이 그렁그렁한 시선을 외면했다.
수시간 전 자기를 미끼로 던져두고 몰래 도망치려 했었기 때문이다.
지가 먼저 오자고 했으면서.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이어졌다.
불과 수시간 전만 해도 세 개의 찻잔이 올라와 있던 식탁 위에는 각양각생의 술병 한아름과 세 개의 술잔이 놓아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내려다본 순간, 투명한 액체가 가득 부어졌다.
“너어, 너어. 마셔, 음. 마셔어어.”
시뻘개진 얼굴로 현자는 술을 권하는 듯하면서 강요했다.
아슬아슬하게 출렁대는 술잔을 보면서 멋쩍게 웃었지만 현자는 “얼른 마시지 않고 뭐 하냐.”라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아아아, 이거 기분 조타아아아. 끄윽. 아. 아아아아! 맞다 마저.”
혀가 꼬부라지는 현자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무릎을 탁 쳤다.
그러더니 용사를 향해 물었다.
“이 혀자님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느 게 있어요오. 너 말이야, 너! 너너너너… 왜 도망쳐 다니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