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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18화 (18/45)

〈 18화 〉 4장. 회상(2)

* * *

“별로 말하기 싫은데.”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주제가 나오자 용사의 말투는 딱딱히 굳어졌다.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왜, 어?”

그럼에도 현자는 은근히 털어놓을 것을 종용했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쑤셨다. 얼른 털어놓으라는 의미다.

“그러고보니 나도 그건 궁금하구만. 혹시 자네만 괜찮다면 말해주지 않겠나.”

“안 괜찮아. 그리고 너까지 그러기냐….”

대도도 옆에서 한팔 거들었다.

딱 봐도 안줏거리가 없으니 대신 씹을 요량으로 썰을 풀어놓으라는 것이었다.

물론 대도는 술에 빠져 익사하기 전에 구명줄을 잡아챈 거겠지만.

반면에 현자는 정말로 궁금한 듯이 쉬이 포기할 기색이 없었다.

“왜, 부끄러워? 괜찮아. 그땐 다 그래. 한번 털어놔봐. 오히려 속이 후련할 걸?! …책에서는 그렇게 나왔다.”

“얘기할거면 최대한 길게 늘어지게 부탁하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으니.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현자, 자네에게 조언하나 해주자면 마지막 말은 덧붙이지 않은 편이 좋다네.”

정말로 내키지 않는 용사였지만, 이유는 달라도 목적은 같은 두 사람이 주고 받는 티키타카에 그만 입을 열고야 말았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

그날의 아침은 평소처럼 시작되어서, 오히려 화인처럼 기억에 남는 하루였다.

그때 벌어진 일들은 단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었다.

업보.

살아남기 위해서라며 지금까지 저질러 왔던 모든 행동들이 내게 대가를 요구하며 소리쳤고.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애써 외면해왔던 모든 것들을 전부 자각한 날.

─서론이 좀 기네.

─쉿!

……그 날 아침, 깨어나서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눈을 뜨니 바로 보이는 진한 쌍커풀에 매끄러운 피부. 성녀였다. 그녀의 얼굴을 보던 나는 미묘한 감정을 느꼈었다. 오늘도다. 분명 잠에 들 때는 각각 텐트를 따로 쓰는데. 언제부턴가 그녀는 몰래 내 잠자리로 숨어들어 왔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나? 지금.

─조용히 하라니까!

잠에서 덜깨어 멍한 눈으로 성녀를 바라보고 있자, 내려왔던 눈꺼풀이 스르륵 열리고 선명한 황금빛 동공을 드러냈다.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 신성한 광채가 언뜻 내비치는 듯 했다. 본인은 부담스럽다며 늘상 눈을 감고다니지만 정말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색이었다.

「깨어나셨나요, 용사님?」

「…어. 좋은 아침.」

「네. 좋은 아침이에요. 용사님. 아, 벌써 일어나지 않으셔도 되요. 아침 식사 준비가 아직이라니 더 누워계셔요.」

뜬 눈을 살며시 다시 감는 성녀.

아무래도 그녀는 진즉에 일어났던 모양이다.

「…너 근데.」

「네? 무슨 문제라도?」

그러면 원래 네 텐트로 돌아가야지.

…라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문제는 없지 않느냐는 은근히 동의를 구하는 성녀의 말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팔베개로 쓰고 있던 자신의 팔을 꽈악 쥐었기에.

「……아니야. 아무것도.」

「…….」

그때 반대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오른팔에 가벼운 무게가 실렸다.

고개를 돌리자 은으로 빚어낸 실타래같은 머리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래로 고개를 내리자 솜털 하나 없는 눈처럼 새하얀 얼굴이 보였다.

품 안에 쏙 들어와 있었기에 오똑한 코에서 소곤소곤 내쉬는 숨결이 목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자그마한 손은 꼭 다른 누구처럼 용사의 팔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겨울의 마녀.

엄동설한이라는 표현도 부족할 영원의 겨울 숲에 홀로 머물던 여자.

성장이 영원히 멈춰버린 채 박제되어버린 동화 속의 마녀.

그러나 지금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동료 중 하나.

─이번엔 똑똑히 들었어! 내 귀는 잘못되지 않았다고! 용사 너 이자식! 양손에 꽃을… 이 아니라 동침이라니!

─망상 좀 하지 말게.

─망상은 개뿔! 지 입으로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망상이라니!

─후. 이제 와서 말해주는데. 자네 빼곤 다 알고 있었네.

─……엉?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매일매일 그랬다는 걸세. 오늘은 누가 용사의 잠자리에 숨어들까 내기도 했었지. 결국 돈 따간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럼 난 왜?

─왜 몰랐냐고? 그야 자네가 원체 아침잠이 많지 않은가. 기억 안 나나.

─끄응. ……그래서 했냐?

했겠냐!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너도냐, 싶어 오른팔을 흔들자 자그마한 머리도 가볍게 흔들렸다.

「일어나, 아이르. 아침이야.」

「우응….」

「밥 먹어야지.」

「……당번. 누구?」

「어제 식사 당번은 나였으니까 오늘은 야만 전사야.」

기억이 확실하다면 분명히 오늘 식사 당번은 야만 전사였다. 야만 전사는 머나먼 북방에서 왔다. 투박한 말솜씨와 단조로운 성품에선 상상도 못할 섬세한 요리 솜씨가 일품인 동료였다. 그가 식사 당번을 맡는 날이면 현자조차도 늦잠을 자지 않고 뛰쳐나올 정도였다.

「그럼. 먹을래.」

아이르는 폴짝 일어나더니 총총걸음으로 텐트 밖으로 나섰다. 저럴 때마다 첫만남때완 다르게 정말 표현이 풍부해진 걸 느낀다.

막 따라나서려던 찰나, 성녀가 옷깃을 살짝 잡아 당겼다.

「용사님, 식사 후에 잠시 시간 괜찮을까요?」

「응? 바로 군 회의에 가봐야해서 얼마 길게는 안될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아요.」

「그럼 알았어.」

성녀는 어쩐지 굳어있던 안색을 풀더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텐트 밖으로 나갔다.

대체 뭐지.

─그거 잖나, 그거!

─제발 부탁이니까 조용히!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일단 나중에 들어보면 알 것이라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걷지 못하고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먼저 나갔던 아이르와 성녀 둘 다 입구를 가로막듯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밥을 먹으러 가야 하지 않나.

그러다가 문득 고릿한 냄새가 맡아졌다.

아이르의 시선은 야영지의 중앙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아이르가 진짜 불곰을 만난 테X베어처럼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야영지 한가운데 놓아진 검은 솥.

야만 전사가 고향의 향신료를 듬뿍 써서 만드는 황금빛 수프가 미역빛깔의 진액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아, 그날인가. 그 왜 오늘은 느낌이 왔다면서….

─더는 말하지 말게. 그 고약한 무언가를 떠올리기만해도 미각이 사라지려고 하니.

그 솥 안을 전설 속의 마녀처럼 주걱으로 휘적휘적 젓고 있던 여인이 인기척을 눈치채더니 이쪽을 보며 손을 치켜들었다.

「이얏호! 이제 일어났네, 잠꾸러기들! 어서어서 자리에들 앉으라고! 이몸이 끓인 특제 수프가 막 완성됐으니까!」

「어째서.」

아이르는 기대가 배신당한 어린아이의 표정이었다. 한껏 맛있는 식사를 기대하며 일어났는데 기다리고 있던 건 돈을 주면서 먹으라고 해도 안먹을 무언가였으니.

다른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게 뭔가. 그 순박한 친구는 어디가고 용병여왕 당신이…?!」

아침 산책을 다녀와서 돌아가는 사태를 몰랐던 듯한 대도가 경악하며 외쳤다.

「아, 그녀석은 많이 피곤한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대신 해줬어.」

「그게 무슨…?」

「여, 여기 좀 보라냥!」

다급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들고양이가 야만 전사의 텐트 앞에서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움직이질 않는다냥! 죽은 거 아니냥?!」

「진정하게나, 내가 한 번 살펴보겠네. 이… 이건!」

「뭐야 설마 진짜로 죽은 거냥?!」

「그냥 정신을 잃은 것 뿐이네.」

「장난 치는 거냐냥….」

하마터면 이 중요한 시기에 바보같은 이유로 동료를 잃을 뻔했다.

용사는 용병여왕이 식사 당번에서 열외된 이유를 스스로 깨달아줬으면 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고 희망찼던 하루 아침은 차마 있던 식욕도 짐싸서 달아날 정체모를 수프로 시작되었다.

「꺼윽. 끄윽.」

「용사님, 괜찮으세요? 제가 소화에 도움이 되는 물약을 조금 챙겨왔는데.」

「아, 고마워.」

야영지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속.

오염된 대지 깊숙한 곳까지 진출한 마당에 이렇게 동료들과 멀리 떨어지는 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성녀에게선 모종의 결심이 느껴졌다.

그 결의가 이런 숲속까지 걸음을 옮기게 만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녀가 저런 얼굴을 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그때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불러놓고서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머뭇 거리던 성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용사님.」

「응.」

「머지 않았습니다. 이 길었던 전쟁도 곧 끝나겠지요.」

「다들 노력해주고 있으니까.」

「그렇지요. 저희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도…」

숙였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형용할 수 없는 그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성녀는 느닷없이 음량 조절에 실패한 스피커처럼 빼액 소리를 쳤다.

「호, 호,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저와 함께 성지 순례를 떠나보시지 않으시겠어요?!」

*

“멈춰! 멈춰! 멈춰! 동반 성지 순례라니! 둘이 부부도 아닌데! 그게 할 소리냐!”

“……그걸 말해버리면 어떻게 하나, 바보같은 사람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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