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4장. 회상(3)
* * *
“이런 젠장! 젠장!! 뭐어? 성지순례에에?! ‘너와 나와 단 둘이♡’ 이런 쪽의 성지 순례겠지?! 응?!”
“……콜록.”
“이제는 알아둬라 용사! 자고로 알콩달콩한 연인은 나무창으로 찔러 죽이는 게 관례다! 옛부터 지성이 뛰어난 자들은 독생(??)만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걸….”
“이러어언! 여자 손도 잡아본 적도 없는 늙은이의 괴상한 논리는 듣지 말게나! 게다가 한창 재미있을 때 끊어버리다니, 흐름이 끊겼잖가! …자자, 눈치도 요만큼도 없는 사람은 무시하고.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떻게 됐나?”
“뭬야?! 내가 손을 잡아봤는지 안잡아봤는지 니가 어떻게 알고 그딴 망발을 지껄여?!”
“딱 보면 알지!”
…이야기는 계속된다.
*
「성지 순례?」
「네!」
들뜬 기색으로 긍정하는 성녀.
언제나 침착한 모습과 다르게 다분히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성지 순례는 선대 순례자들의 발자취가 깃든 길을 따라 대륙 각지에 있는 성소나 성당에 들르는 걸 의미해요. 다른 세계에서 오신 용사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희에게는 일생에 꼭 한번은 거쳐야 하는 과업이랍니다.」
내가 그 의미를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지 그녀는 열띤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그 과업의 시한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저는 전쟁이 끝나도 죽은 분들이 많으니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요. 성지 순례를 떠나면 돌아다닐 수 있으니 다치고 병든 생명들을 위로하는 데 용이할 거라고 생각해요」
「아, 그런 거구나. 그런데 왜 나랑 같이 가자는 거야?」
그런데 그건 착각이다.
나는 성지 순례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이전에 동료로 받아들였던 교단의 인원에게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말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는 죽었다. 이미 죽어버린 ‘옛’ 동료는 가장 늦게 합류한 성녀와도 연이 적지 않았다. 오히려 유일하다고 봐도 좋은 존재였다. 그녀의 아버지였으니까.
「그야 용사님이시까요! 상냥하고 부드러우시고…. 저보다는 모두에게 힘이 되어주실 수 있으실 거에요. 저와 함께 다치신 분들을 위안해드리고 치료도 하고, 팔짱도 끼고….」
「저기, 성녀야?」
「아, 아아. 그… 죄송합니다, 철없이 들떠선.」
눈에 띄게 실망하는 성녀.
그러나 나는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만인을 위해서라며 대의명분으로 포장했지만, 연기를 하려면 올라가질 못해서 부들거리는 입꼬리부터 어떻게 했어야 했다.
내게 있어서 성녀의 말은 누구는 계약서도 안봤는데 지장을 이미 찍었다는 듯이 들려왔다.
「아직 이런 말을 하기엔 이르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도 결코 해지할 수 없는 계약을.
「그래,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일이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네.」
「…기억은 해둘게.」
「……! 네, 네!」
성녀는 환한 얼굴로 웃었다.
기쁜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팔을 막 잡아 끌었다.
얼른 전쟁을 끝내고 순례길을 떠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지만, 나는 그녀의 인도를 거부했다.
「용사님?」
「미안, 먼저 돌아가 있을래?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볼 일이요… 어떤…. 아, 아아아! 죄송해요. 제가 그만 눈치없게… 일 시원하게 잘보고 오세요!」
뭘 오해했는지 성녀는 붉게 물든 얼굴을 한 채로 야영지 쪽으로 후다닥 돌아갔다.
똥 마려운 거 아닌데.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가는 바람에 오해를 풀지도 못했다.
그녀가 떠나간 숲에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나는 당황했다. 그녀로부터 이런 적극적인 대시를 받을 줄은 몰랐다. 물론 지금껏 그녀가 보였던 은근한 호의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난 눈없새가 아니었다.
지금와서야 단지 그 방향을 착각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전부터 나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소위 ‘플래그 꽂기’를 하고 다녔다.
유력자의 딸들이나, 도움이 될만한 능력을 가진 이성들을 여러 방법으로 꼬셔서 나를 돕게 만들었다. 그 대상은 설령 제국의 황족이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계승 순위에서 멀고 단순히 장기말로 키워졌던 황족 하나를 선별.
‘만인의 희망’이자 ‘대륙의 등불’이라고 치켜 세웠던 ‘용사’인 나와 연결될 수 있는 통로를 한정하여 권력에 접촉함으로써 역으로 권력의 간섭에서 멀어지는 계책의 대상으로까지 썼다.
그럼에도 내가 성녀의 마음을 정확히 눈치채지 못한 것은 나 자신의 편향된 생각과 시각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국의 황족에게도 시행한 ‘플래그 꽂기’를 정작 성녀에게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 소환되서 힘이 없을 당시, 교단이라는 이름 하에 통합되기 이전에 자신을 소환한 종교 쪽에서 ‘우리들의 신이 보내온 선물’이라면서 종마로 쓰려 했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종교는 마른하늘에 떨어진 수백 개의 벼락을 처맞고 물리적으로 말했다.
현대에선 무신론자였던 내가 진심으로 신을 믿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 이후로도 그런 종류의 일들을 적잖게 겪게 된 나는.
이쪽에서 먼저 ‘플래그’를 꽂지 않았는데 상대가, 그것도 이성이 나에게 ‘사랑’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 건도 있고 나이 차이도 있지만, 나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그런 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걸 자각했기 때문이다.
…….
그로부터 몇십 분 후, 군 회의를 짦막하게 마치고 돌아온 나는 겨울의 마녀, 아이르와 만났다.
장소는 성녀가 부부 계약을 돌려말한 그 숲 속이었다.
─아니, 여기서 그쪽으로 넘어간다고? 사람 새끼신가. 너 양심이 있냐?
─왕년의 나를 보는 느낌이로군. 그때는 분초 단위까지 계획표를 짜가며 그녀들을 만나고 다녔지…. 여덟 명 모두 매력적인 여인들이었어.“
─캬악! 이런 문어 새끼가!
「아이르, 속은 좀 어때.」
「……이해, 무리. …음식이 아파.」
「아니, 그건 음식이 아니라 실험 약품이니까. 고작 아픈 걸로 끝난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봐야하나.」
이건 진심이다.
그런 걸 먹고서 아픈 걸로 끝나다니 바로 식중독으로 황천길 보내버릴 비주얼이면서 말이다.
……음. 뱃속에서 잘 끓고 있구만.
「용병 여왕은, 연금술사?」
「그렇게 치면 저건 성공일까, 실패일까.」
「단언컨대, 최악의 실패 쪽.」
자기 감정이 희미한 그녀로서는 꽤나 부정적인 감정이 그득 실린 말이었다. 거기에 희미하게 눈썹 끝자락이 아래로 내려앉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옛 기억을 떠올린 나는 작게 웃었다.
그러자 아래서부터 사늘한 한기가 올라왔다.
내려다보니 신비로운 보랏빛 눈이 희미한 불만을 품고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웃는, 이유. 알려줘.」
「아 그 왜 처음에 만났을 때 말이야.」
「…아이르는 그런 거 몰라.」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아이르도 기억을 떠올린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숲 속을 한참이나 헤매다가 겨우 만나서 뭐든 얘기를 나눠보려고 했는데 그냥 쌩까버리고. 그러다가 배고파서 비스킷 꺼내니까 ‘…먹는 게, …뭐야.’라면서 내가 먹던 뺐어먹었잖아. 그런 주제에 몇번 씹다가 뱉어내곤 ‘인간은 돌을 먹는 생물.’이라면서 ──커억! 왜 때려?!」
「부끄러운 기억은, 물리적인 삭제가 필요한 걸.」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늘었구나, 이 아빠는 기쁘다….」
「무슨, 의미?」
「그냥 내가 왔던 곳의 밈이야. 별 뜻은 없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자그만 머리를 갸웃갸웃거렸다.
그나저나 나도 참 나다.
정작 내 이름도 까먹은 주제에 이런 건 또 기억하고 있었네.
어쩐지 오늘따라 새삼스러운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싶었다.
「그보다 무슨 일이야? 슬슬 출발해야 하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아이르는 자그만 체구와 어울리지도 않게 목을 큼큼 거리더니, 확신이 담기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기억해? 아이르와, 용사가 나눈 …계약.」
「어, 물론이지.」
겨울의 마녀, 아이르는 영원의 숲에서 홀로 존재했다.
누구 하나 찾아오는 이 없었고 누구 하나 떠나는 이도 없었다.
머나먼 옛날에는 아이르 또한 무언가를 찾아서 헤매었으나 셀 수 없는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전부 부질 없는 일에 불과할 뿐.
그녀는 그저 겨울이라는 자연 현상으로 머물고 있었다.
겨울의 마녀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내가 찾아가기 전까지는.
「이런 살풍경한 곳 말고도 여러 곳을 보여 줄테니, 대신 마왕을 없앨 때까지 나를 도와달라는 내용이었지.」
「…거의, 맞아. 그런데 아니야. 알려준다고 했어.」
아이르는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새로운 것들. …사람과 접하는 기쁨. …다채로운 삶을. 돌아가는 굴레로부터 벗어나 느끼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 분명히.」
하나하나 나열 될 때마다 내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떠올릴 때마다 이불킥을 하게 될 멘트들이라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는데.
아이르는 그것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공기가 달짝지근하다.
물론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대기가 달진 않을 터였다.
그 진원지가 어디인지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아이르의 머리가 내 가슴을 콩 찍었다.
「많이 알았어. 많이 느꼈어. 그런데 하나는 모르겠어 …하나는 모르겠어.」
「……뭘?」
당황과 미열이 섞인 듯한 어조로 빠르게 말하는 아이르.
마치 품 안에 파고든 것 같은 상태로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어쩐지 설레는 것 같으면서도, 기뻐하는 듯 한 얼굴.
보랏빛 눈동자가 봄과 같은 따쓰함을 품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르는 두 손을 기도하듯이 맞잡고 본인의 가슴을 꾸욱 누르며 물어왔다.
「계약대로, 알려줘. 사랑이란 건, 뭐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