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4장. 회상(4)
* * *
그때, 나는 아이르의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그녀와 나 사이에 그어진 모종의 선이 급격하게 좁혀온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직은 안되었다. 아직은.
그래.
나는 사랑을 몰랐다.
당초에 사랑이란 게 무엇인가?
이를테면 육체관계를 나누면 사랑한다는 것인가?
육체관계에 그치지 않고 플러스 알파로 정신적 교감이 동반되어야 진짜 사랑인가?
육체관계를 배제하고 애틋한 감정을 주고받는 것으로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당최 모르겠다.
뭐라 표현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반강제적 고졸 중퇴에게 사랑은 너무 철학적이고 어려운 낱말이었다.
「음, 사랑이라…. 대답해주기 어렵네. 혹시 다른 사람들한테서 이런 거 저런 거 들은 것들은 있는데 그걸로는 안되겠지?」
「…응.」
「그럼 나도 사랑은 잘 모르겠네. 미안해, 알려줄 수가 없어서. 그런 걸 겪어볼 틈도 없었거든. 사랑을 나눌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 나는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아이르는 실망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뜻밖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새하얀 도화지 같은 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그 겨울의 마녀가 막 고백을 받고 어쩔 줄 몰라하는 처녀처럼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응. 알겠어.」
아이르는 재빠르게 휙 뒤를 돌더니 숲 밖으로 종종 걸음으로 멀어져간다.
일련의 행동이 너무 급작스러워 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뭐지?」
…도대체 무얼 알았다는 것일까?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을 해준 입장에선 그녀의 태도가 다분히 당혹스러웠다.
대신 무언가 느껴지는 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유를 분명히 규정할 수 없었다.
‘뭔가가… 잘못되고 있어.’
술렁거리는 마음을 안고서 야영지로 돌아왔다.
「어, 왔군.」
현자가 두툼한 편지봉투들을 들고서 내게 다가왔다.
그는 구깃구깃한 짙은 갈색의 봉투들 사이에서 빳빳하고 흰색의 편지를 빼내 건네주었다..
붉은 인장으로 봉납까지 되어 있는 고급스러운 편지였다.
「알슈타르 황실로부터 편지다. 최전선에서 싸워주시고 계시는 용사님과 장병분들께… 라고 겉지에 적혀있긴한데 뻔하지.」
「역시 플로렌스가 보냈나 보네.」
나는 하얀 편지를 받아 들었다.
손끝에서부터 보드라운 감촉이 전해져왔다.
한낱 봉투 주제에 이런 촉감을 가지다니 세계가 달라도 지배자들은 뭐든 고급을 쓰나 싶었다.
쓸데없는 허례허식을 싫어하며 병적으로 싫어하는 플로렌스의 성격으로 미루어봤을 때, 어쩔 수 없는 의태(??)였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러면서도 플로렌스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따로 있다.
알슈타르 제국과 나 사이의 연결점은 플로렌스 황녀 하나로 한정되어 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휘둘리는 것을 방지하는 것과 동시에, 연합의 지휘부에 내 편을 만들어두기 위한 술수.
권력자라면 이런 기회를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넓히는 것도 가능한 윈윈 전략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꼭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다.
현대에 있을 때 나는 장르 소설같은 책들도 즐겨 봤기 때문이다.
즉, 마왕이 사라지고 난 다음의 일을 생각할 수 있다는 거다.
일이 다 끝난 뒤에 토사구팽 당하는 건 사절이다.
자고로 진정한 K한국인이라면 언제든지 팀이 트롤할 때를 대비해야하는 법.
협곡에서 정글 차이로 바텀이 터진다면 탑도 터진다는 걸, 꼭 겪어봐야 알 필요는 없는 법이다.
아무튼 그 일환으로 플로렌스는 내게 주기적으로 편지를 보낸다.
그녀 말대로라면 둘의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여겨지면 부려올 수작질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데….
「…….」
왜인지 내세운 명분에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 있었다고 읽혀졌던 건, 단순히 과대망상일 뿐이지 않을까라는 지금까지의 생각이, 이 편지 한장에 의해 바뀌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만인의 희망이신 용사님께 전합니다.
베헤른 제국의 일은 전해 들었습니다.
마지막 군단장에 의해 제도가 무참히 짓밟혔다더군요.
전보에 간략하게 기재된 정보 몇 줄만으로도 드러나는 위용에 두려움이 일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맞서 싸우신 용사님은 얼마나 두려우셨을까란 걱정에 밤잠을 설칩니다.
중략
원래 이번에 이리 서신을 전하게 된 것은 바로 전후처리에 관한 사안 때문입니다.
아직 논하기에는 이르다고 여기실 수도 있으시겠지요.
그러나 전쟁의 끝이 보인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용사님의 대우 문제입니다.
용사님이 일궈내신 위업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공(大?)입니다.
수세기 전, 외교와 통상 조약으로 대륙에 수백년의 평화를 가져왔다는 카를 대제의 업적조차 이에 미치지 못하겠지요.
연합은 그런 공적에 알맞은 대가를 갖고 있지 않다고 내부적으로 결론내렸습니다.
하여 전후 처우를 용사님 본인이 전적으로 결정하심이 옳으시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물론 앞서 말한 것은 명목상의 이유에 불과합니다.
사실상 연합이 발행하는 백지수표라고 보시면 되리라고 봅니다.
취하고 싶으신 건 취하시고, 버리고 싶으신 건 버리시면 되겠습니다.
당연한 대가이니 부디 마음쓰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사족이지만, 저는 용사님께서 기거하실 곳으로 저희 알슈타르 제국을 선택하여 주셨으면 무궁한 영광일 것입니다.
추신. 일전에 저를 사칭한 편지를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할 망발이 적혀져 있었다고요. 용사님을 상대로 하루 세 번 사, 산(글자가 흐려져 있어서 알아볼 수 없다.). 편지를 보낸 이를 적발하여 반드시 대가를 치루게 만들겠사오니, 용사님께서는 부디 오해하지 말아주시길 바립니다. 저, 플로렌스는 용사님을 사….(북북 그어져 있어서 알아볼 수가 없다)를 시킨다는 망측한 상상을 요만큼도 하지 않았음을 조상님들께도 맹세할 수 있습니다.
알슈타르 제국의 제 27황녀 플로렌스 슈트람이.』
참고로 말하지만, 일전에 받았던 편지란 황궁으로 오라는 말과 함께 하루 세 번의 산책이라는 아주 대담한 내용을 담은 편지였다.
「이제 조상님들도 팔아먹을 줄 안다니, 낯이 제법 두꺼워졌네.」
「? 왜 무슨 안 좋은 소리라도 적혀 있냐?」
「아냐, 아무 것도.」
응. 이런 게 보여졌다가는 나나 플로렌스에게 좋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겠지.
과장되게 지울 필요도 없을텐데 일부로 저리 해놨다는 건 반대로 강조한다는 의미.
돌려말하기가 특기인 귀족적인 수사로 가린다고 가렸지만 누가봐도 목적은 명백했다.
현자를 돌려보내고 내 텐트로 돌아간 나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주먹에 땀이 찬다.
문득 뒷목을 만져보면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르고 있음을 자각했다.
「오늘따라 감이 좋지 않더라니만.」
성녀가 고백했다.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서 성지순례란, 아힝흥행한 목적을 겸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마녀가 고백했다.
사랑을 알려달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갖고 말한 것인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나는 바보가 아니다.
황녀가 고백했다.
이 처자는 못보던 사이에 무슨 취향을 개방했는지, 은근히 제 취향을 드러내고 앉았다.
「무력, 금력, 권력.」
사회를 돌리는 세가지의 힘.
하필이면 자신에게 엮인 세 여인 모두 이 중 하나를 갖추고 있지 않은 여인이 없었다.
자고로 사랑에 빠진 여인이란 질투심이 많은 생물이라 하였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여파를 불러오는 힘을 가졌거나, 지위에 있는 여인들이 단 하나의 이성을 좋아한다면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은 당연하게도….
「죄다 박살나겠군.」
선명히 그려지는 미래상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확신한다.
마왕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 뒤의 인생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하필이면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라 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그냥 요리 잘하는 여자가 취향인데 대체 왜….」
이대로라면….
*
마침내 이야기가 끝나자 욕두문자가 날아왔다.
“우리 지성인들은 너 같은 걸 기만자라고 부르기로 합의했어요, 씨발놈아!”
현자가 만면에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버린 노인은 그만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야 만 것이다.
“거, 그만 좀 하게. 어디까지 추해질 생각인가? 연애 한번 못해본 사람처럼.”
“크아아아아아악!”
설마 그런 사람이 존재하겠냐는 듯이 흥얼거리는 대도.
당연하겠지만 알면서도 저리 놀리고 있는 거다. 잔인한 사람 같으니라고.
“여자의 손도 잡아보지 못한 게 어쨌다는 거냐! 대화를 나눠본 게 오십년이 넘어도 어쨌다는 거냐! 인생에 단 한번도 먼저 말을 걸어본 적이 없다는 게 어쨌다는 거냐고오오오!”
“어… 음, 크흠. 커험! 콜록. 콜록! 자네. 잠시 진정을….”
“시끄러워!! 문어새끼! 성욕에 미친새끼! 바람둥이 새끼! 부러운 새끼이이!! 으아아아아!”
현자는 가장 가까이 있던 술병을 껴안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안쓰럽다 못해 슬프기까지 한 경험들을 술기운에 주절거려대며 술병을 기울였다.
같이 늙어가는 입장에 하필이면 영 좋지 못한 곳을 찔러버린 걸 알아 죄책감이 일어난 대도는 빼지도 못하고 술자리에 어울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현자는 주당이었다.
그 틈을 타서 몰래 내빼려던 용사를 붙잡고, 절규하면서도 빈잔을 계속 채워버렸다.
그만 마시겠다고 말을 꺼낼라치면 피눈물이 흐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얼굴을 들이밀어댔다.
슬슬 해가 중천을 넘어갈 때 즈음.
“뭐야, 술이 다 떨어졌잖아.”
기울여진 마지막 병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통통 한방울이라도 더 나오게 병을 기울이는 현자 뒤로 오십에 가까운 술병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