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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21화 (21/45)

〈 21화 〉 5장. 겨울이 돌아오는 때

* * *

‘술이 없다고?!’

식탁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대도의 눈이 그 순간 번뜩 뜨였다.

‘살았다!’

드디어 빌어먹을 술자리가 끝났다!

간이 뒤지기 일보 직전이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것이다!

더 이상 위장에 술이 다이렉트로 술이 들어갈 일 자체가 없다.

정작 마셔야 할 술이 다 떨어진 걸 어쩐단 말인가.

“그만 마실 수 밖에 없겠네, 아! 정말 아. 쉽. 구. 먼.”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내가 가만있을 수 없지. 도시에 가서 사 와야겠어.”

“잠까아아안!”

다행이라는 티를 팍팍 냈는데, 이 새끼가 진짜로 사람을 잡으려는 건지 태연하게 지껄여댄다. 대도는 식겁하며 일어나던 현자를 잡아 끌었다. 그러자 현자가 미간을 좁혔다.

“응? 왜? 사오는 데 얼마 안 걸린다. 도시에서 집까지 넉넉잡고 30분이면 갔다올 수 있어. 금방 다녀올게.”

그 말에 대도는 달래듯이 말했다.

“아닐세! 자넨 너무 마셨어. 많이 취했지 않은가. 더군다나 오다 보니까 길이 많이 험하던데 그 상태로 어딜 가겠다는 건가!”

그러면서 술을 마시느라 벗어두었던 윗옷과 실크햇을 챙기더니.

“……그러니 내가 다녀오겠네!”

혹시라도 누가 말릴 세라 부리나케 일어났다.

한편 용사는 지쳤다.

고주망태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주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멀뚱하니 대도가 하는 양을 보고만 있다가.

‘…어?’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 자식 설마…?!’

그 사이에 대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용사가 다급해하며 외쳤다.

“……! 아니야, 내가 갈게! 여기 술 취하지 않은 사람 없어! 그니까 좀 더 젊은 내가 가야지!”

“하하!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네!”

쿠와앙!

제 속내를 들킨 대도는 재빠르게 행동에 나섰다.

부웅­ 몸을 날려 빗장이 걸려있던 나무 창문을 깔끔한 날아차기로 뚫어버리더니, 그 기세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금방 사오겠네! 기다려주게나, 언제까지고 말이야! ……하하하하하하핫!! 나는 자유다~!”

“야이 배신자 새끼야!!”

수풀을 헤치며 비탈길을 뛰어 내려가는 뒷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심지어 뒤도 안 돌아보고 튀어버린다. 나쁜 새끼, 지가 오자고 했으면서….

덥썩.

그냥 어깨에 손을 올려진 것 뿐인데 끈덕지게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현자는 코가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 길동무를 붙잡았다.

“도둑놈이 사올 때 동안 넌 여기 앉아 있어라.”

“아니, 나도 따라가는 게….”

쿵.

빈 술병이 한가득 쌓여 있는 식탁 위로 새로운 병이 나타났다.

진녹색의 반투명한 병. 묵직한 소리로 보아 봉납도 깨지 않은 새로운 술이었다.

용사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잠깐만. 분명히 다 떨어졌다고…?”

“거짓말이다.”

“하, 아니. 잠깐.”

“됐고. 앉아라.”

현자가 새로운 술잔 두 개를 꺼내며 자리를 강권했다. 보니까 대도를 제외하고서 대작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용사는 죽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었다. 2:1로도 감당이 안되는 주당을 홀로 상대하라니. 용사는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이러다 진짜 술병나서 죽겠다.”

“엄살 피우지 마. 사람은 고작 그 정도 먹고서는 안 죽어.”

엄살 아닌데.

반쯤 울상인 채로 굳어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고, 현자는 할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진상을 말해주었다.

“에효, 표정 풀어라, 이건 술 아니니까.”

뽕!

코르크 마개가 뽑혀나왔다.

내용물이 잘 숙성됐다는 걸 알려주는 듯한 경쾌한 소리였다.

코 끝에 언뜻 향기가 스쳤다.

새롭게 개방된 술의 향기는 꼭….

“으웨에엑─ 이거 구정물이야?!”

하수구 물을 닦은 걸레를 빨지도 않고 으슥한 곳에 처박아놓고서 몇 달은 숙성시킨 냄새였다.

“우욱─!”

차마 ‘마신다’라고는 상상도 못할 구린내였다. 근데 문제가 있었다. 그러면 현자가 저 병의 밀봉을 뜯을 이유가 없었다. 용사는 아니길 바랐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곧 찐득찐득한 진록의 액체가 넘칠 듯이 가득 담긴 잔을 하나 받을 수 있었다.

“됐고 쭈욱 마셔, 몸에 좋은 거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물론 맛이 냄새와 다르게 좋을 수 있다. 두리안 같은 예도 있으니까. 그러나 저런 냄새라면 차마 입에도 대기 전에 속을 게워낼 게 뻔했다. 그만큼 심했다. 용사는 속으로 '참을 인'자를 순식간에 세 번을 되내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뭔데.”

“아주 좋은 약이다, 약. 내상 치료에 특효약이지.”

그 순간, 용사의 몸이 덜커덕 멈췄다.

그러더니 눈알만 데구르르 굴렀다.

“어….”

적잖이 당황한 모습.

현자는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취기 한줌 남아 있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약? 내가 약을 왜 먹어. 내가 아픈 것처럼 보이냐?”

“어, 존나게 아파 보인다. 멍청한 놈아.”

현자는 험한 말로 거세게 질타하기 시작했다.

“내 눈깔이 병신으로 보이디? 그런 꼴로 안 들킬 줄 알았어? 수염을 길렀다고 해도 내가 니 얼굴빛 하나 읽어내지 못할 것 같았냐고. 착각하지 마. 내가 널 몇 년이나 바왔는데 그거 하나 몰라볼 것 같았냐? 나 뿐만이 아니야. 널 아는 녀석이라면 마주치자마자 눈치챘을 거다, ‘아! 우리 용사님이 몸이 많이 불편하신가 보다!’ 하고 말이다.”

참다참다 못 참고 터져나온 힐난은 걱정의 감정이 물씬 풍겨져 나왔다.

심려어린 질책은 용사의 혼백을 뒤흔들어놨다.

말없이 듣고 있던 용사의 얼굴에 쓴웃음이 그려졌다.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거구나. 성자도, 대도도…… 아, 노친네는 모르는 것 같던데.”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황궁의 그 양반이야 싸움아니면 눈치가 개등신 수준이니까 그런 거고.”

“그건 그렇지.”

제국검의 아르벨트 대공이 가볍게 씹혔다.

지혜로운 현자는 이전부터 그 빡대가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닌데. 아니, 오히려 그 무위를 쌓을 정도라면 머리가 준수하다 못해 뛰어난 편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싸우기 전의 준비와 싸울 때 빼고는 활용을 전혀 안하니, 재능은 뛰어난데 노력을 전혀 안하는 학생을 보는 선생의 심정을 공감한 현자는 당연히 복장이 터지다못해 짜증이 날 수밖에.

그런 점에서 용사와 현자는 뜻을 같이했다.

그러니 이전부터 죽이 잘 맞아도 너무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현자가 용사의 몸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리라는 관측은 너무 헛되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마왕이냐.”

“어, 그거 겁나 쌔더라고. 하마터면 죽을 뻔한 거 무리를 여러 번 하는 걸로 벗어났더니, 끝나고 보니까 몸이 축나있더라.”

“딘은? 너, 그 녀석과도 만난 적이 있을텐데.”

“그나마 이것도 처치해준거야.”

마왕을 토벌하고 난 직후, 용사는 약해졌다.

아마 성인 남성 한 명 정도로. 그래서 숨었다.

그 과정에서 미리 준비해둔 안배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동료이자 믿을 수 있는 이인 성자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일 년 동안 아무도 모르는 은신처에서 숨어지냈다.

비로소 움직일 수 있을 때는, 이미 힘이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난 뒤였다.

마왕의 권속들을 상대하기 쉽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

“그놈 껀 한층 더 지독하드라. 하마터면 그대로 요단강을 건널 뻔 했어.”

그 중에서도 마나를 깨우친 실력자들만이 군단장과 직속 병력을 상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변질된 마나, 마기가 존재했기에.

정순한 마나가 비틀려서 만들어진 마기는 연결고리에 규칙을 파괴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그러한 마기의 침식력은 마왕이 가장 강했다.

바로 마기 때문에 용사는 약해졌다.

정확히는 몸 내부에 스며든 마기는 해결했으나 할퀴고 지나간 내상은 치유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용사는 강했다.

제국의 무력의 상징인 제국검 공격을 보고 피할 수 있었고, 여차하면 한판 붙고 도망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반신에 다다르는 힘을 보유하고 있던 과거보다는 비교도 안될 정도였다.

“요단강이 어디 붙어 있는 강인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마셔라.”

옛 기억을 되돌아보며 마음의 준비를 조금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못참고 마시라한다. 그러나 용사는 기분나빠하지 않으며 잔을 들이켰다.

“으윽!”

사약이냐.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마다 손발이 절로 파들파들 떨렸다. 맛은 형용할 수 없었다. 차마 표현하기 힘든 맛과 구린내가 식도를 타고 위장 속으로 사라져갔다.

“쯧.”

그 반응을 보고 혀를 찬 현자가 가득 채운 잔을 재차 들이밀었다.

“혹시 몰라서 말해두는데. 행여나 뱉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이 약 많이 비싸?”

“비싸? 이놈 말하는 싸가지 좀 보소. 비싸고 자시고 사람이 생각해서 줬으면 알아서 원샷을 때릴 생각을 해야지. 가격대를 처묻고 앉았냐? 닥치고 마시기나 해, 새끼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다시 한번 잔을 들이켰다.

두번째지만 여전히 맛은….

괴로웠기에 체감시간은 훨씬 길었다.

그러나 끝이 다가왔다.

“꺼윽.”

마지막 잔을 쑤욱 비운 용사는 트름을 했다.

그리고선 풍겨나오는 입냄새에 그만 졸도할 뻔했다.

이딴 걸 마셨다니.

자신을 생각해서 준 성의가 없었더라면 죽어도 먹지 않았을 거다.

“으으으.”

그런데 몸이 뭔가 이상했다.

꼭 지독한 몸살 감기를 걸린 것만 같았다.

“……어우, 뭔가 좀 이상한데. 이거 정상적인 약 맞냐?”

“속이 막 울렁울렁대고, 잠이 솔솔 오면서 눈이 감기지.”

“………어.”

“시야가 흔들리긴 하지만 지진 난 것처럼 심하진 않는 것 같고.”

“…………그래.”

“하지만 의식은 멍해지면서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그런 느낌.”

“……………딱 맞아.”

“그럼 됐어, 다행히 거부 반응은 없는 것 같네.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각들은 약이 정상적으로 돌고 있다고 몸이 알려주는 거야.”

“………………그런가?”

“그래. 아는지는 모르겠는데 신체에는 자체적인 면역력이 있다. 그걸 낮추는 약들을 지금까지 너가 마신 술에 섞어 넣었지. 그래야 이 약이 잘 듣거든.”

“…………………그러냐, …그런데 어감이… 조금….”

시야가 그네를 탄것마냥 위아래로 흔들린다.

내장으로부터 홧홧 거리는 열기가 치솟는다.

팔다리가 늘어지며 서서히 저 밑으로 가라앉는다.

명백히 이상하다.

이게 치유되는 게 맞나?

용사를 갖고 장사를 하려던 종교에서 구해졌던 옛날.

그때 마차를 타고 가다 들렀던 한 귀족이 대접한 식사에서 유사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게 분명 ──때문이었던 거 같은데?

“너, 이거…?”

점점 주변의 풍경을 분간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보일 건 확실히 보였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지는 현자의 입가와 성취감에 빛나는 두 눈동자가.

“너에겐 잠깐 일 거다. ──가 올 때까지 푹 자고 있어라.”

“…………………누구?”

“──말이야, ──. 아, 이젠 들리지 않──.”

그 순간 뚝, 하고 의식이 끊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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