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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22화 (22/45)

〈 22화 〉 5장. 겨울이 돌아오는 때(2)

* * *

자연의 돌을 그대로 쌓아 만든 것만 같은 벽의 질감.

정신이 들고 난 뒤, 용사는 자신이 한 지하실에 있음을 깨달았다.

족쇄와 그에 매달린 쇠사슬로 간단하게나마 결박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그 후, 용사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솔직히 상황은 파악됐지만 낭패감보다는 당혹감이 훨씬 크게 느껴졌다.

현자가 이런 무리수를 벌일 사유가 마땅하지 않아서다.

‘문제는 괜히 이런 일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건데.’

현자는 동료로 지낸 기간이 상당히 오래된 축에 속한다.

그렇기에 본인의 행동이 간이 배밖으로 나온 행동임을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배신의 예외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테니까.

‘경우의 수로 보자면 지금 벌인 일을 뒷감당할 자신이 있거나, 혹은 배신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 정도.’

전자의 경우 상당한 반대급부가 있을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았을 테니까.

후자의 경우 조금 복잡해진다.

배신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의 행동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인데.

‘…예상은 가는데 쉽지 않다.’

납치라는 ‘적대적인 행위’를 저질렀으면서도 ‘나’를 위한 것이라….

끼이이익.

상념에 빠져 있던 용사를 깨우는 소리.

방 안을 둘러보며 유일하게 눈에 띄었던 문.

그 문이 열리며 현자가 들어왔다.

“상당히 늦게 일어났군.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는 내상이 더 심한 탓에 반동이 나타났네..”

“…….”

“어찌됐건 약효가 잘 들은 것 같아서 다행이로군.”

살짝 열받네.

용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야, 솔직하게 대답해라.”

“얼마든지.”

그 말에 현자가 말해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우리 말이야, 상당히 오래 알고 지낸 사이잖아. 아마 15년 정도는 되었을려나.”

“정확히는 15년 6개월하고도 3일 정도다.”

“세세하네. 어쨌든 너도 나를 알고 나도 너를 알고, 피차 몇가지 개인사를 제외하고는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나는 생각해. 그러니까 묻는 거야.”

“…….”

“대체 무슨 생각이야? …아니.”

멍청한 질문을 해버렸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용사는 물었다.

“누굴 위해서 이딴 개짓거리를 하는 거지?”

성자와 현자.

같은 파티의 브레인이었으나 그 성질은 판이하게 다르다.

“다름 아닌 너니까 아무 계산도 없이 무작정 저지르고 보진 않았을테고.”

“정확해.”

“…아무래도 쉽게 털어놓진 않을 건가본데. 일단 내 예상부터 말해줄까.”

철두철미한 성자와는 다르게 현자는 교토삼굴이라는 사자성어가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따지자면 먼저 퇴로부터 확보해두고 일을 저지르는 스타일.

대책없이 일을 벌려놓고 상황을 볼 정도로 멍청한 인물이 아니다.

“나는 지난 5년간 전 대륙을 줄곧 돌아다녔어. 그런 도중에 아는 사람이라곤 만난 적도 없지. 모습을 감출 수 있게 도와준 딘 녀석을 제외하곤 말이야.”

정보의 부재.

내 몸의 이상은 단 한 명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었’다.

“결국 내가 ‘용사’라고 정확히 타인에게 인식된 건 알슈타르 제국의 황궁에서의 일이 처음이야.”

그렇기에 용사는 모종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너는 망할 노친네가 전투 외에는 눈치가 없다고 말했는데… 네 말이 맞아. 그는 피가 튀기고 살이 찢기는 ‘전투’ 외에는 남을 신경 쓰지 않아. 그 때문에 정치 싸움에서는 잼병이지만 실전에서는 누구보다 파악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지. 그리고 나는 ‘전투’를 벌였어.”

싸움법의 기본 중의 기본은 정보 수집이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로 ‘먼저 상대를 파악’한다.

싸우기 전에 정보 수집을 하든 싸우면서 상대의 버릇이나 전투법을 본능적, 의식적으로 익히든 간에, 이 법칙에 예외란 없다. 예외는 전부 죽었으니까.

아르벨트 대공은 사적으로는 굉장히 짜증 나는 인물이지다. 그러나 그는 자타공인 제국 최강이다. 즉 싸움법에 도가 터도 한참은 텄다는 의미다.

황궁에서 대공과의 전투는 전투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회피만 주구장창 해댔으나, 뇌가 검과 싸움으로 가득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 근육뇌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전투가 발생한 황궁이라는 폐쇄적인 장소. 그 와중에 내 상태를 대공이란 인물. 보름이 걸려 도착한 곳에 하필이면 있는 특효약.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손바닥 위에서 굴릴 수 있는 자는 유이해.”

그 중에서도 내 신변을 노릴만한 사람은 단 하나다.

“플로렌스 황태녀.”

“……!”

대륙 전토에 영향을 끼치던 세 제국 중에 대전을 거치며 유일하게 살아남은 알슈타르 제국, 그 후계자이자 물심양면으로 ‘용사’를 도운 것으로 음과 양 가리는 곳 없이 지지를 받고 있는 차기 지배자.

“그녀가 바로 네가 비빌 언덕이다.”

“…허.”

정곡을 정확히 찌른 것일까.

헛웃음을 내뱉은 현자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대단하군.”

다시금 숙였던 고개가 치켜들어지고.

“그래 정답이다. 나는 황태녀 전하의 명을 받아 널 납치했다.”

현자의 얼굴에는 감탄어린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정말이지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었어. 사람을 험하게 부린다니까. 내상이 어느정도 수준인지 알려주고서 준비하라고 해야지.”

내상의 그러니까 술을 진탕 먹이고 나서 약을 처먹인 거겠지.

정신을 잃기 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려보면 약을 그 술에도 탔을 거다.

부상을 입었다곤 하나, 보통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신체의 면역력을 극도로 낮춰야 할 필요가 있었을 테니까.

“낭비는 싫은데 말이야. 적재적소는 쓸데없이 남발하는 행위. 정말 구역질이 나는데… 쯧. 갖은 약을 다 써야했잖아.

아니나 다를까, 예상이 꼭 들어 맞았다.

”그래도 약은 가짜가 아니니까 너무 원망치 마라.“

확실히 속이 조금 편안해진 느낌이 있었다.

내상에 특효약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원래라면 당장에라도 머리통을 까부술 걸 참아주고 있는 거다.

용사의 질문에 현자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를 위해서.”

“…….”

“그리고 ‘너’를 위해서다.”

“…똑같다. 라는 거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물론.”

일일히 설명해주기보다는 겪으면서 깨닫기를 원하는 일처리 방법.

그래서 현자는 파티의 동료들에게 경외시 당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막무가내로 밀어넣고 보는 거니까.

사건이 끝날 때 즈음이면, 다들 현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알아차리게 되지만.

막상 일을 벌일 때는 아무런 설명도 없다.

현자야 다 대책을 마련하고 방비도 끝났다고야 하지만, 그건 본인의 망상에 그칠 뿐이라고 여기는 동료도 있었다.

은근한 규탄을 받고 있는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도 현자는 꼿꼿한 대나무마냥 자신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덕분에 용사가 현역일 당시에는 고생이었다.

“슬슬 시간이로군.”

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쾅!

외부로부터 덮쳐온 충격에 강철 재질의 문이 산산조각이 났다.

찢어지고 부러진 강철 속에서 투명한 얼음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갔다.

*

“허참….”

한편 같은 시각.

“오베런 그 친구, 이번엔 어떤 꿍꿍이 속인지….”

홀로 리유스에 남겨져 있던 대도. 원망하는 마음을 담아, 원흉 중에 하나의 본명을 뇌까렸다.

“그래도 말이야.”

딱딱딱─ 따뜻한 봄철과는 맞지 않은 소리. 때아닌 추위에 벌벌 떨면서 대도의 이빨이 떨리는 소리였다.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사람들의 활기가 온 거리에 넘치던 항구 도시 리유스.

그런 도시는 지금 멈춰있었다.

나아가던 마차의 바퀴가 지면과 함께 얼어붙었다.

사람들은 웃고 목소리를 내던 그 모습 그대로 투명한 얼음에 갇혀 동상이 되어 있었다..

흉수는 시민들이 채 인지하기도 전에 얼려버린 모양이었다.

가까운 얼음동상에 가서 살펴본 대도.

머지 않아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되면 풀리게 해뒀군.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되지 않겠어.”

그러면 안심이다.

도시에서 움직일 수 있는 본인만 조심한다면 다 무사할 수 있다는 의미니까.

혹시라도 잘못 건드려 깨질세라 물러난 대도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딸려나오는 것은 금색의 메달.

바로 통신기였다.

대도는 은은한 빛을 내며 고급스러워 보이는 메달의 테두리를 두어번 돌려가며 쓰다듬더니만, 이내 귓가에 대었다.

“저입니다.”

­보고하세요.

형식적인 말투로 대꾸가 돌아왔다.

감정이란 일절 느껴지지 않는 대답에 분개할 법도 했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은 그래도 무방한 신분이었다.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여인.

“플로렌스 전하, 안타깝지만 일이 나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현자가 전하의 제안을 걷어 찼습니다. 용사는 사라졌고요.”

­…정확히 설명해주시죠.

“아무래도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을 벌인 모양입니다. 용사는 저항능력을 상실한 채로 현자에게 잡혔습니다. 파편도 같이 가지고 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먼 발치에서 용사가 현자에게 업혀가는 모습을 보았다.

현자는 지혜로 싸우는 타입이지 무투파가 아니다.

그건 대도도 마찬가지지만 도둑질에는 유려한 몸놀림이 필요한 법, 싸웠더라면 십중팔구는 대도가 이겼을 것이다.

때마침 들어온 방해만 없었더라면.

”실수를 늦지 않게 깨달았지만 ‘발을 뺄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오는 바람에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걸 놓쳤다는 말입니까? …그보다 ‘발을 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대체 뭐죠?

“아이르.”

­……겨울의 마녀?!

통신기 너머로 숨을 급히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어째서 거기에 있을 수 있죠? 용사님이 자취를 감추고 얼마 안 있어 사라졌었는데?

잠시의 침묵 후, 당혹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부턴 제 추측입니다만…, 저희의 연락을 받고 난 뒤, 속내를 달리한 현자가 아이르에게 붙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더 이득이라는 거지요. 다른 이라면 모를까 현자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요컨데 두 다리를 걸친거죠.”

­믿을 수가 없군요. 더 이득이라서 상대에게 붙었다? 현자에게 약속한 보상이 뭐였죠? 황궁 서고의 소유권 아니었나요. 이 훌륭한 제안을 걷어차고 어째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그야….”

대도의 말이 탁하고 끊어진다.

머뭇머뭇 거리며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이걸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던 대도는 이내 결심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진즉에 현자는 황궁 서고의 내부 책들을 전부 복사해서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

온갖 기밀 자료가 가득한 황궁 서고가 일개 개인에게 복사당하다니?

“거, 그 왜 아직 황태녀 전하께서 황녀이실 적에 일이라… 큼. 죄송합니다.”

­누구도 모르게 서고의 자료들을 베꼈다? 그런 시도를 경비 시스템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 불가능하니까요. 필시‘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겠군요. 안 그렇습니까? 대도.

“커험….”

­아뇨,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넘어가겠습니다.

“현명하신 처사입니다.”

“그리고 이해했습니다. 애초에 제 제안이 매력적일 수가 없었군요.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침묵한 것도 넘어가겠습니다.”

“쿨럭! 쿨럭!”

사정없이 폐부를 찔러대자 차마 대꾸할 면목조차 없었다.

통신기 너머로 기세를 회복한 플로렌스 황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습니다, 대도. 이제부터 당신은 사라진 현자를 추격해주십시오. 그가 저희와 뜻을 달리했지만 용사님을 위해서라는 일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겨울의 마녀는 어림짐작으로도 의도를 알 수가 없으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거로군요. 잘 알겠습니다.”

대도는 바로 지시에 따르려 했지만, 통신기 너머에서 전해져오는 정보에 잠시 멈칫했다.

­얼마 전에 들어온 정보입니다만, 교단 본부 쪽에서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였다는군요. 총 17개의 성기사단이 움직였습니다. 총 수의 과반을 초과하는 숫자지요. 일단 공식적인 통로로는 각지에서 날뛰는 마물 잔당의 토벌이라고 합니다만.

“아닙니까?”

­성녀가 은밀히 동행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서둘러야겠군요.”

끊기 직전, 대도는 잊어버린 물건을 되찾아간다는 듯이 말해왔다.

“아참. 플로렌스 전하. 사실 여담이 하나 있습니다만.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 무슨 일이죠?

대도는 메달을 귀에 댄 채로 서쪽을 바라보았다 바라보았다.

항구가 세워진 이유이자 언제나 도도히 흘렀던 바다를.

“아베스 해협이 통째로 얼어 붙었습니다.”

이제는 얼어붙은 바다를 말이다.

­…그게 무슨?

“아이르가 해협 건너편에서 건너오면서 건너오면서 싸그리….”

이는 즉.

수십 킬로 정도 되는 폭의 해협을 얼려가면서 건너편으로 걸어왔다는 의미였다.

일개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힘의 행사.

그러나 대도는 망설임없이 아이르가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바다를 얼려가며 걸어온 아이르로부터 현자의 추적을 방해받았기 때문에.

“아무튼 당분간 해로의 통상 운행은 불가능할 듯 보입니다.”

­……믿기 힘들지만 납득했습니다. 정말 놀랍네요. 누천년을 버텨온 마녀의 저력이라면 대자연의 흐름마저도 잠시나마 꺾을 수 있다는 전설이 사실일 줄이야….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은 끊어졌다.

빛을 잃은 금메달을 내려다보는 대도.

바지 주머니 속에 금메달을 넣으며 중얼거린다.

“흠. 황태녀는 이걸로 되었고.”

그러면서 다시 한번 품속에 손을 넣었다.

주름진 손에 딸려나오는 것은 ‘은빛’의 메달.

대도는 금메달에 했던 그대로 테두리를 돌려가며 쓰다듬고선.

은은하게 빛이 흐르기 시작하는 은메달을 귀에 대었다.

“자네인가? 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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