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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23화 (23/45)

〈 23화 〉 5장. 겨울이 돌아오는 때(3)

* * *

­영원의 숲에 있던 아이르가 리유스에 나타났다?

“그렇네.”

새로이 연결된 은메달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놀라워했다.

용사가 사라진 이후로 따라 사라졌던 아이르.

뭇 호사가들은 용사를 따라갔거나, 원래 지내던 곳으로 돌아간 게 아닌가 떠들어댔다.

대부분 그렇게 떠들어 대는 것은 거짓말이 대부분이었으나, 아이르의 행적에 관한 건 놀랍게도 들어 맞았다.

아이르는 용사가 사라지자마자 상심한 듯이 더는 움직이지 않는 인형마냥 모든 의욕을 잃었다는 걸, 남아 있던 용사의 동료들은 봤기 때문이다.

부르르르 떨리는 은메달.

전해져오는 목소리는 짜증어린 투였다.

­망할 자식이 설마 그녀를 움직일 줄이야. 골치 아파졌잖아. 시간을 따져보면 이전부터 이미 뒤쪽으로 은밀히 연결되어 있던 게 분명해.

다음 순간,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꾹 참아 보려는 듯한 느낌.

아슬아슬하게 발화점에는 도달하지 않은 듯 싶었다.

­……상황은 이해했어, 이해했는데.

그러나.

은메달을 대도는 침착하게 귀마개를 꺼내어 귀를 막았다.

아니나 다를까.

­제길, 똥물에 튀겨 죽일 짱돌새끼! 목 위에 달린 건 장식이야? 또야, 또! 멋대로 사고를 치다니!

그 후로 온갖 욕설이 난무했다.

음성을 전해 주는 은메달이 그 진동만으로 들썩거린다. 어지간하다.

그러나 대도는 일상이라는 듯이 굴었다.

하루 이틀 이 꼴을 보는 것도 아니고 일일이 반응하기도 지친다.

다만 귀마개 덕분에 잘 들리진 않아도 온갖 창의적인 욕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잠잠해진 은메달을 향해 대도가 말을 걸었다.

“…참. 자네 둘은 여전하군.”

­항상 이딴 식으로 구는데 고운 말이 나오겠어? 나잇살을 처먹었으면 그만큼 값을 해야지. 망할 어째 망둥이처럼 날뛸 궁리만….

아직 분이 덜 풀린 듯이 꿍얼거리는 목소리.

그러나 시간이 충분히 지체되었다.

더 이상 끌 생각도 여유도 없는 듯 목소리가 단호한 말투로 말해 왔다.

­아까워서 미치겠지만 기존의 계획은 포기하는 수 외에는 없겠어.

“하지만 아직 파토내기엔 밝혀진 것도 없는데 너무 이른 결정인 거 아닌가.”

­잘 생각해.

다 내던지기에는 빠르지 않은가 싶은 대도.

목소리는 그런 그를 은근한 말투로 설득하려들었다.

­이건 너무 커. 일그러졌다고.

성자와 만나고 성녀에게 쫓겨 대공과 싸우며 황녀와 조우하고 대도와 재회하고 현자를 찾아간 결과, 용사가 납치되었다.

­안 그래도 급하게 일을 진행한 감이 있었어.

“실제로 급했으니깐 말이지.”

­그래. 그만큼 첫단추가 중요했어.

단추가 달린 의복은 첫단추를 잘못 끼우게 되면 다른 단추들도 다 맞아들어가지 않는다. 붕괴. 억지로 입어도 평행사변형마냥 뒤틀려 우습게 보인다.

­난 용사를 남부로 보낼 생각이었어. 유도할 방법은 많으니까 일은 쉽게 진행되었겠지. …하필이면 거기서 성녀가 난입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목소리…는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다는 투였다.

­어쨌든 일그러짐이 심하지만 않으면 그대로 속행하려고 했어. 그런데.

­이건 너무나도 커. 알겠어? 억지로 끼워 맞출려다간 전제부터가 통째로 붕괴되는 수가 있다고.

“정확히 문제 되는 게 뭔가?”

줄곧 부르르 떨리던 은메달이 잠잠해졌다.

그러나 대도는 그 너머의 인물이 무언가를 두고서 고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럴 땐 보채봐야 역효과다.

차분히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렸던 대도는 이윽고 원하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후…. 다른 건 다 넘어갈 수 있다고 쳐도, 그 용사에게 ‘위기감’을 준 게 위험해.

“‘위기감’…?”

­큼. 콜록. 그래.

순간 뚝뚝 끊기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떨려왔다.

“자네 괜찮은가?”

­신경 쓰지 마. 며칠 동안 깃발 대신 걸려 있었더니 감기가 걸렸나 봐.

“……?”

­방해 조금 했다고 진짜 종탑 위에 걸어버릴 줄은 몰랐어.

따뜻한 차라도 마시는 지 호로록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차 한잔이 땡긴다.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 대도는 도시를 나서 오두막 집이 위치한 곶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걸었다.

­본론으로 돌아가지. 용사는 특이한 일면을 가지고 있어.

현자의 집으로 돌아온 대도.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도둑은 버릇처럼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

찬장을 뒤적거려서 몰래 숨겨져 있던 꿀병을 발견하고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소환 당시에 안 좋은 일을 겪은 탓일까. 본인도 모르는 듯 하지만, 위기 상황이라는 판단이 서면 사람이 달라져. 사고 방식이 자체가 뒤집힌다고 해야 하나. …듣고 있어?

“듣고 있네.”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비어 있던 찻잔에 꿀을 한가득 퍼담은 대도.

끓는 물을 붓자 달달하고 향긋한 향기를 맡고 조심스레 마시며 대화를 이어간다.

­그 상태의 용사는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미친 짓거리도 태연하게 저질러대지. 문제는 그 방식이 다른 이들을 위해서 정작 제 안위를 내던지는 모순된 방법이라는 게 제일 문제야.

“이상하군. 난 지금껏 그런 특이 행동은 들은 적이 없네만.”

호로록. 호록.

­용사가 그러지 않도록 내가 항상 주의하고 있었으니까. 늦게 합류한 너는 모를 수도 있어.

탁.

술병들로 어지러져 있던 식탁에 찻잔을 올려놓았다.

양손깎지를 끼고 등받이에 등을 기댄 대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설마 자네는 용사가 그 특이 행동을 현자와 아이르에게 보일까, 그게 염려되는 건가? 자네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용사가 안위를 지켜 주는 당사자에 해당한다만.”

­확실히 그가 동료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어. 하지만 무조건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해. 더군다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 만에 하나라도 용사가 그들을 ‘옛 동료’로 취급하고 지금은 적으로 규정한다면….“

”난리가 나겠군.“

­그 난리에선 대도, 당신이나 나나 피해갈 수 있을 확률은 매우 적어.

그 후로 대도와 목소리는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상황을 더 긴밀히 파악하기 위한 정보 교환부터 앞으로의 일까지. 여러 사족을 붙여가며 현황을 면밀히 파악해갔다. 그리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듯이, 둘의 대화에도 끝이 다가왔다.

­처음 그렸던 것보다는 엉망진창인 그림이 되겠다만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즉석에서 그려내는 수 외에는 남지 않았지. 임기응변으로 대처한다니. 이 짓거리를 또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자네가 발안자이니 책임을 진다고 여기게. 그럼 나는 일단 황태녀의 지시대로 움직이겠네.”

­좋아. 다음 연락 때 보자고.

*

쾅!

부서진 문에서 나온 철쪼가리들이 허공에 비산한다.

그 파괴행각을 보며 나는 생각을 이어갔다.

‘아마도 지금 들어오는 사람이….’

타박.

산산이 흩날리는 잔해들 사이로 한 여인이 들어왔다.

타박타박.

성인 남성의 가슴 언저리에나 올 법한 자그만 키.

비칠 듯 비치지 않으며 펄럭이는 은빛의 장막과도 같은 옷자락.

하늘로부터 새하얗게 내리는 눈을 맞은 하얀 동백꽃이 아로새겨진 나이트 드레스.

허리 부근까지 내려오는 머리칼부터 앙증맞은 발을 감싼 단화 끝까지 순백.

살아 움직이는 겨울이었다.

완벽한 비율의 이목구비. 그녀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새하얀 가운데 유일하게 이색(?色)을 가진 신비로운 보랏빛 동공이 빛나는 가운데.

“……찾았어. 용사”

체리꽃처럼 붉은 입술이 열려 나를 불렀다.

“오랜만. 그리고. 구하러 왔어….”

나를 바라보고 있던 현자는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경악하는 표정이 되었다.

뒤를 돌아보고 난 뒤 경악은 한껏 크기를 키웠다.

“아닛?! 마녀, 네년이 어떻게 여길?”

…국어책 읽기는 너무 성의가 없지 않나. 한심해하며 쳐다보자 어떻게 알았는지 고개를 돌리고 있는 현자는 보지도 않고서 내 조인트를 깠다. 개새끼.

“현자. 멍청해. 쫓아온 게 당연.”

“바보 같은?! 추적 기술도 없는 주제에! 더구나 네년은 길치잖아!”

“…길치 아니야.”

연기를 하다 보니 아이르는 진심으로 발끈한 듯이 대꾸했다.

……이거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 하지?

“응, 응? 응.”

그때 무언가 지령을 들은 것인지 금세 태도를 바꾸는 아이르.

아마도 현자 놈이 눈짓이나 입 모양으로 뭐라한 것 같은데…

“역시. 현자는 바보야.”

우매한 자를 가르치는 듯이 말하는 아이르.

어째선지 그녀의 코가 무진장 높아 보인다.

“사랑의 힘은. 무적.”

소름이 돋았다.

뒤로 묶인 팔에 오소소소 닭살이 돋아나는 게 보이지 않아도 알겠다.

사랑 타령이라니.

동화책에서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진부한 말을 잘도 저렇게 태연히….

그런 대사를 친 주제에 한 점의 부끄럼도 없이 의기양양하게 허릿춤에 양손을 올리고는.

“엣헴.”

했다.

이에 현자는 분개한 듯이 발을 굴러댔다.

어찌 보면 정상적인 반응이긴 한데. 너무 정석적이지 않나.

심지어 연기 실력도 썩 좋지 못했다.

‘속아 줄래야 속아줄 수가….’

“큿!”

‘……아주 가관이다. 가관이야.’

자세를 잡는 두 사람.

그 사이에 서로 아이컨택을 끝낸 듯 싶었다.

솔직히 앞으로 일은 뻔했다.

대충 이얍이얍하면서 치고받다가 결국 사랑의 힘은 승리했다! 3부 끝! 으로 끝나겠지. 아니면 사랑의 멋짐 엔딩인가.

“납치법. 각오.”

“에에에잇! 아무리 너라해도 쉽지 않을 거다!”

…내가 다 쪽팔리네.

지하실을 한가득 채우는 마력의 향연.

제법 날아다니는 공격들이 살벌하지만 어색하다.

꼭 C급 영화에서 처음으로 캐스팅 된 주연과 막 엑스트라를 졸업한 조연이 서로 눈짓발짓으로 연기를 맞춰가는 느낌이었다.

그냥 이대로 어디까지 가나 두고봐도 되지만 솔직히 더 보고 있기 힘들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연기는 그만하는 게 어때?”

막 육탄전으로 들어가려던 둘은 우뚝 멈춰섰다.

“받아랏! 원소대폭발!”

“……어?”

현자는 티나지 않게 바로 다음 동작으로 들어 갔지만.

정작 합을 맞춰줘야 할 아이르는 움직이지 않고 당장 설명하라는 듯이 째려 보았다.

“이이이익!! 거기서 날 보면 어쩌자는 거냐?!”

“…아.”

이제와서야 시선 처리를 해봤자 늦었다.

이미 다 봤는데 이제와서 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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