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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24화 (24/45)

〈 24화 〉 5장. 겨울이 돌아오는 때(4)

* * *

창고로 쓰였을 지하실은 서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세 사람 중에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했고, 누구 하나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그 모습에, 나는 마치 꼬여버린 실타래를 보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테세우스도 아닌데 이 실타래를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한단 말인가.

점점 땡겨오는 뒷목을 풀어주기 위해 나는 목을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자, 이제부터 납치 피해자로부터 질문 사항이 있을 예정이다. 되도록이면 솔직하게 털어놓는 걸 추천하도록 하겠어.”

만약에라도 그렇지 않는다면 끝이 영 좋지 못할 것이다.

그런 속내를 담아 말한 걸 눈치챈 것인지, 현자는 답답한 듯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 불능. 아이르는. 어디까지나 구조자 역…”

반면에 남은 하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굴 모양이었다.

연극의 역할을 강조하려는 것인지 자신은 구하러 온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지금 아이르가 뒤집어 쓰고 있는 건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정의의 가면.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속아 넘어갈 정도로 얼굴색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나는 저 가면을 벗길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쟤가 이미 다 불어버렸으니까 이제 그만해도 돼.”

“…정말?”

“미치겠네?! 그니까 날 쳐다보지 말라고!”

아이르는 또 속았다.

그것도 모르고 또 눈길을 주는 아이르 때문에 현자는 답답해하며 환장했다.

이러면 이제 발뺌도 못한다.

그니까 일을 꾸밀 땐 사람을 보고 꾸며야지.

한창 파티의 멤버일 때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못 봤는데 참 잘도 호흡이 맞겠다.

21세기의 키보드 워리어 실력으로 갈고 닦은 낚시에 아이르의 가면은 자연스럽게 벗겨졌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쉬웠지만 말이다.

그제야 핫하고 놀란 아이르가 돌연 현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르는. 무죄. 먼저 제안한 건. 저쪽. 아이르는 나쁘지 않음.”

“끄, 끄어어억!”

어디서 배운 건지 이젠 글렀다는 걸 눈치채고는 바로 책임을 떠넘기려 들었다.

일이 잘 안 풀리자 곧바로 이어진 뒤통수에 혈압이 급상승하는지 현자는 뒷목을 잡았다.

하지만 아직 쓰러지면 곤란하지.

적어도 사정 청취는 들어봐야 저놈의 모가지를 꺾을지 말지 판단이 서지 않겠나.

“첫번째 질문, 상대방에게 먼저 연락한 사람은 누구?”

“…나다.”

일을 꾸민 건 누구냐는 취지의 말을 에둘러 묻자, 현자가 손을 들었다.

하긴 너무 뻔한 질문이었나.

“두번째 질문, 5살 짜리 꼬마도 비웃을 이번 연극을 꾸민 사람은?”

“…너무해.”

동화 작가 지망생이 얼굴을 붉혔다.

한창 현역으로 뛰어다닐 떄의 기억을 떠올려보니, 아이르라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르는 오랜 세월 사회와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사람처럼 사람들의 생활상이 담긴 부류의 책을 탐냈으니까.

그 중에 셰익스피어의 희극같은 연극 대본이 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무슨 내용의 연극인지는 짐작하기도 싫다만.

“마지막 질문, 나를 납치하자고 한 사람은 누구야?”

이번에는 현자를 겨냥한 질문이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

“…….”

“…허.”

시선교환을 나눈 두 사람은 동시에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러니까 아이르도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저 순진한 마녀가? 세상에나.

“둘 다라….”

나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면서 말을 이었다.

심적 충격이 굉장히 컸지만 어쨌든 의견이 맞아들어갔다는 거다.

두 명 중에 두 명이 찬성했으니 만장일치냐.

“가지가지한다. 둘 다 똑같네. 아주 그냥 끼리끼리 놀아요.”

“비교. 곤란해. 아이르는 어디까지나 피해자. 먼저 유혹한 쪽이 범죄자.”

“그래, 그래… 내가 죄인이다 죄인이야.”

“그건 굳이 말 안해도 안다. 네가 한번도 여자랑 손 잡아본 없다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지.”

인정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들었던 현자가 피눈물을 쏟으며 굉침당했다.

어느 쪽이 먼저 제안했든 간에, 납치 감금 당한 당사자로선 둘 다 괘씸한데 어딜 감히….

“후.”

솔직히 줄곧 시달린 탓에 지친 감조차 느껴졌다.

약에 취해 잠들어 있다가 막 일어난 참이지만 다시 잠들고 싶어졌다.

약으로 인한 인위적인 수면이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깊은 잠에 푸욱 빠지고 싶어졌다. 일단 이것들 좀 풀고나서 한숨 자야지. 나는 양손과 양발을 묶고 있는 족쇄를 절그렁거리며 말했다.

“됐다, 됐어. 이렇게 말해봤자 뭐하겠냐, 일단 이거부터 풀어주고 계속하자.”

“……”

근데 어째 분위기가 뭔가 요상하게 돌아간다.

글래스 하트가 쪼개져버린 현자는 그렇다고 치자.

“…아이르? 이것 좀 풀어주지 않을래?”

“……”

그녀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대체…?

“아이르?”

불러도 대답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는 아이르.

그녀의 말대로 피해자라 주장하고 싶으면 당장이라도 날 풀어줘야 할텐데.

“…싫어.”

“뭐, 뭐?”

“풀어주고 싶지 않아. 해방시키지 않을 거야. 용사는. 그대로 있어.”

“그게 무슨… 야, 야?! 아이르 너 어디…?”

아이르는 부서진 문의 잔해를 넘어서 밖으로 사라졌다.

손발이 묶인 채로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나와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는 현자.

기묘하고도 어색한 상황에 나는 당황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대체 뭐야…?”

*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감옥에 갇힌 수감자들은 출소할 날만을 기다리며 매 하루를 헤아린다고 한다.

당연히 난 수감자가 아니었기에 벽에 표시하거나 시간을 재는 행동 자체를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할 수가 없었다.

양 손목을 뒤로 한 채 중세 시대에서나 쓸 법한 수갑으로 묶인 탓이다.

다리도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양 발목에 채워진 족쇄는 여유도 없어 움직이려면 토끼마냥 깡총깡총 뛰어다녀야 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눈으로는 볼 수가 없어 손으로 더듬거려보고서 알았던 건데, 아무래도 족쇄와 수갑은 쇠사슬

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행동을 제약하기론 현대의 구속복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런 구속 따위가 날 잡아둘 수는 없었지만, 몇 가지 걸리는 점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부수고 튈까? …아니. 아직이야.’

아직 도망가기엔 이르다.

바로 지금 들려오는 발소리가 원인이었다.

끼익.

겉보기에는 소녀처럼 보이는 순백의 여인이 임시로 달아둔 판떼기 문을열고 들어왔다.

“약 먹을. 시간이야.”

그렇게 말하며 아이르는 쟁반을 들고 와서는 내 앞에 살포시 앉았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익숙한 듯이 쟁반을 내려놓는다.

달그락. 달그락.

내가 이 지하실을 벗어나지 않는 이유 중 하나.

현자가 말했던 내상에 특효라는 약.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고 현재 진행형으로 몸 상태는 호전되는게 느껴졌다.

한때 치유 능력과 강림이라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는 성자조차 고개를 저었던 부상을 회복할 수 있다니. 어떻게 현자가 이런 약을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치료만 받을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몸은 아파봐야 안다.

난 지난 세월 간 줄곧 치료방법을 찾고 있었으나 정체를 숨기고 다닌 탓인지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에, 현자의 약은 목마른 대지에 단 비와도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치료되기 기다리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아파오는 머리를 느끼며 심호흡을 했다.

‘겁나 쪽팔리긴 하지만 참아야한다…!’

아이르가 들고 있던 은수저가 움직였다.

수저가 이전에 봤던 찐덕이는 진녹색 액체가 담겨 있는 접시에 푸욱 담겨졌다.

그 상태로 마치 응어리가 잘 풀어지라는 것처럼 빙빙 휘젓고선.

“아. 아아~.”

약이 가득 담긴 수저를 입으로 들이밀었다.

“아~.”

미칠듯이 부담스럽다.

줄곧 이랬다. 약을 먹기 시작한 그날부터 아이르는 날 이유식을 막 먹기 시작하는 아기를 대하는 것 마냥 굴어댔다.

이 나이 먹고 아기취급이라니.

제정신으로 있기 힘들 정도로 창피했다.

그러나 아이르는 내 사정을 헤아려주지 않는다.

그저 다문 입술을 열라는 듯이 수저 끝으로 꾹꾹 누를 뿐.

먹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그럴 것이 확실했다.

나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수저 위에서도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진녹색 액체는 정체를 모른다면, 백이면 백 독극물이라고 할 비주얼이었다.

실제로 성분도 독극물에 가까울 것이다.

이 지하실에 갇힌 후로 처음 약을 먹었던 날을 떠올려보면 거의 확실했다.

그때 나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현자의 집에서 술에 꼴은 상태로 먹었을 때랑, 맨정신으로 먹었을 때랑 맛이 천지차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아아아아~.”

기억이 떠올라버린 나는 반사적으로 벌리던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아이르는 고래를 갸웃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먹으면. 꿀도 한숟갈. 줄게.”

그럼 해볼만 하지.

“…아.”

쑥하고 들어오는 수저.

나는 묘한 느낌을 받으며 약을 받아먹었다.

그렇게 한입 두입 삼켜가자, 아이르는 문득 수저를 들지 않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잘했어요.”

…쪽팔려 뒤질 것 같네.

그렇게 접시에 담긴 약을 막 다 먹어가던 그때였다.

주륵.

한줄기 진녹색 액체가 입가를 타고 흘렀다.

마지막 수저를 뺴내면서 남아 있던 약이 흘른 것이다.

아이르의 실수였다.

애당초 수천년을 홀로 살아온 마녀가 남을 능숙하게 챙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실수.”

막 바닥으로 떨어질려던 찰나, 아이르는 본인이 입고 있는 드레스의 소매를 잡더니 흘러내리던 약을 닦아냈다.

그러면서 새하얀 천에 녹음이 번져나가니, 하얀 설원에 발자국을 남기는 듯한 기묘한 배덕감마저 들었다.

“다음에는 실수. 안 해.”

빈 접시를 쟁반에 정리한 아이르는 양손을 들어 올리더니, 힘내겠다는 듯이 주먹을 쥐었다.

오늘도 한단계 성장했다는 성취감을 느끼는 듯한 그녀를 보며 나는 말했다.

“저기, 아이르.”

“듣고. 있어.”

“내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풀어달라는 것만 빼면. 뭐든 가능.”

너무 단호하구나.

“그럼 적어도 수갑은 풀어주지 않을래? 약을 먹는 것도 그렇고, 매 식사 때마다 먹여주는 것도 힘들잖아? 밥 정도는 내가 알아서 먹을게. 그러면 너도 귀찮을 일은 없지 않아.”

솔직히 그냥 약만 받아 먹었더라면 이정도 수치심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숟가락도 들지 못할 정도로 아픈 사람에게 약을 먹여주는 일은 특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르의 시중은 약에 그치지 않았다.

뜨거운 스프를 후후 불어주지 않나 검은빵을 잘게 찢어 입에 넣어주기까지했다.

이쯤되면 환자가 아니라 그냥 글러먹은 게으름뱅이 아닌가?

더는 안된다.

내상이고 나발이고 내 안의 자립심이 떨어지기 전에 이 시중 지옥에서 탈출해야한다.

귀찮지 않느냐는 말에, 아이르는 양볼을 부풀렸다.

“귀찮지. 않아.”

“아니 그래도 불편하니까.”

“불편하지 않아. 용사는. 불편해?”

그리 물으며 아이르는 내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살짝 내게 몸을 기대더니 스윽. 고개를 들었다.

이색적이다.

매력적이다.

그녀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새하얀 가운데, 유일하게 이색(?色)을 가진 신비로운 보랏빛 동공이 빛을 내며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신비한 눈 안에 담긴 감정이 너무나도 올곧게 다가온다.

이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리곤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 그러니까. 음. 미안하지만 아이르. 나는 나가봐야 해.”

“…싫어. 함께 있어줘.”

떼를 쓰는 듯한 어조로 말해왔다.

그녀의 보랏빛 눈의 광채가 더욱 빛을 발한다.

“그, 사실 내가 지금 할 일이 있거든. 아주 급한 일이야. 그 걔가 부탁한 건데. 그 왜, 너도 몇번 봤잖아. 플로렌스….”

“…………누구?”

빛이 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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