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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25화 (25/45)

〈 25화 〉 5장. 겨울이 돌아오는 때(5)

* * *

“…………누구?”

아이르가 반문했다.

겨우 반응해주었다.

나는 속으로 '드디어 내 말을 들어주나.' 하고 기뻐했다.

이전 날까지 은근히 속내를 떠봐도 명확히 답없던 “안 돼. 안 보내줄 거야.”의 반복에서 벗어나게 된 쾌거였다.

물론 구태여 그녀에게 구애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무력을 쓰고 싶진 않았다.

탈출은 힘을 쓴다면 간단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이 지하실이 어느 국경의 요새도 아닌데 벽면만 툭 쳐도 무너질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 와중에 막으려드는 현자와 아이르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 일은 불가피해질 것이다. 그건 죄악이다.

현역 시절, 동료들끼리의 다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파티 내의 분위기는 자유로웠으며 그건 많은 갈등을 야기시켰다.

그건 모두 내 성향이 권위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더군다나 용사와 일행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목숨이 위태로운 전장에 뛰어들어야 했으니 필연적인 갈등이라고 하겠다.

외부에서는 우릴 대륙적 위기에 맞서 한데 똘똘 뭉쳤다고 보는 듯 하지만, 우리도 엄연한 사람이었고, 지성체였다. 종족이 다른 동료들도 똑같이 화낼 줄도 알고 짜증낼 줄도 알았다.

그러나 우리들은 서로 힘을 합쳐서 위기를 헤쳐나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우린 하나의 규칙을 정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동료들 간에 폭력만큼은 쓰지 말자고. 그건 지금도 유효한 절대적인 규칙이다.

불가피하다는 변명으로 동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건 있을 수 없다. 설령 납치되어 감금될지라도 이 원칙을 깨진 않을 것이다. 끝내 내 목숨이 위험해질 지경이라면 모를까.

무력은 원칙에 의해 배제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곤경에서 벗어나는가.

그 답은 이미 주어져 있었다.

“플로렌스 말이야, 알슈타르의 황녀 플로렌스. 지금은 황태녀가 된 모양이지만. 어쨌든 너도 알잖아. 그 왜, 네가 보던 책들도 다 걔가 보내준 거야.”

“……기억해. 아이르랑 비슷한, 사람.”

아이르는 일개 인간을 일일히 기억하지 않았다. 아마도 긴 세월을 지내며 얻은 버릇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아이르가 플로렌스를 기억하는 건, 그녀의 말대로 둘은 비슷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눈의 색.

둘의 동공색은 자줏빛 계열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다만 플로렌스의 것은 남청색에 가까운 아이올라이트고, 아이르의 것은 순수하고도 찬란한 자수정에 비교된다.

“그래. 어쩌다가 플로렌스랑 만나게 되었는데 부탁을 좀 받았어. 유사 [마왕의 파편]을 발견했는데 조사해달라고.”

“……만났어. 언제?”

“얼마 전에. 그러니까… 이제 한 20일 정도 됐으려나.”

“…그래. 만난 거구나.”

별안간 아이르가 날 밀쳤다.

정말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억?!”

그 때문에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나는 당황하면서도 재빠르게 일어나려 했지만, 뒤이어 실린 무게감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아이르가 쓰러진 내 가슴 어귀에 올라탄 것이었다. 나는 폐가 압박되는 느낌에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대체…?”

“…왜?”

기묘하게 연결되는 두 단어.

위에서 내려다보는 아이르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왜 나는 만나러 와주지 않았던 거야?”

“뭐, 뭐?”

아이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내 숨이 터억 막혔다.

“왜 나를 떠났어? 왜 나를 혼자로 만들었어? 왜 나를 괴롭게 만들었어?”

아이르의 말에 충격을 받아 머리가 멍해진다거나 슬픔이 느낀 것이 아니었다.

“쓸쓸해. 외로워. 불안해. 두려워. 허전해. 괴로워. 이런 건 처음이라서.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는지, 몰라서. 하지만 용사가 있어줘서, 싫지 않았어.”

꽈아아악.

머리로 통하는 혈류를 가로막는 손길.

아이르가 나에게로 가냘픈 손을 뻗고 있었다.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아이르는 믿었어. 그날 용사와 나눈, 계약을 믿었어. 함께해준다고, 그랬으니까. 그랬는데.”

무언가 이상하다. 아이르는 육체파가 아니다. 그런데도 숨통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건 절대로 그녀의 팔에서 나올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왜 날 버렸어?”

…이제 알았다.

아이르가 강해진 것이 아니다, 내가 약해진 것이다. 아마도 그 원인은 지금 차고 있는 족쇄. 어떤 특수한 처리로 내 근력을 떨어트려 둔 것이 확실했다.

아이르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가 내 ‘선’을 넘기전에 제지해야만 했다.

이리 된 이상 강제로라도 족쇄를 부순다……!

“……소용, 없어. 내 영혼을 깎아, 만들어낸 사슬. 내가 바라지 않는 한. 풀리지, 않아.”

그러나 아이르는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용사, 용사, 용사. 알려, 줘. 날 왜 버렸어? 날 왜 두고 갔어?”

꽈아아악……!!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아이르가 아침을 먹으라는 듯한 평탄한 어조로 반복해서 되뇌인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얼굴을 가리던 그림자가 걷혀 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르의 얼굴이 보였다.

“…저기, 용사. 예전에 아이르는 알려달랬어. 사랑을. 용사는 모른다고 답했어.”

“…저기, 용사. 드디어 아이르는 사랑을 깨달았어.”

그녀는 황홀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진심으로 내 숨통을 위협하며 웃고 있었다. 점점 흐릿해져가는 의식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얼굴에서,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고마워. 용사가 아이르에게 보여준 수많은 것들. 알려준 모든 것들. 다채로운 빛을 얻었어. 그러니까 보답이야. 아이르도 하나지만 알려줄 게 있어.”

「계약대로, 알려줘. 사랑이란 건, 뭐야?」

언젠가 있었던 에두른 사랑의 고백.

답답한 듯이 제 가슴을 꾹 누르며 내게 안겨오던 그녀.

그날 보았던 보랏빛 눈동자는 봄과 같은 따쓰함을 품고 있었더랬다.

그러나 지금 마주보고 있는 눈에는 봄은 이미 없었다.

*

“사랑은 아픔이야.”

시간이 흐른 것이다. 세월이 흐른 것이다.

봄은 가고 여름이 그 눈동자 속에 들어앉아 있었다.

“용사를 떠올릴 때면 가슴이 아파왔어. 어째서일까. 계속 고민하던 아이르는 깨달았어. 아이르가 느끼는 아픔. 괴로움. 이게 바로 사랑이구나. 아이르는 용사를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그녀를 이루는 모든 것들은 새하얗고 겨울처럼 단조로웠다.

“165,673,398초.”

그러나 온기가 찾아와 그 존재를 알게 되고, 그녀에게는 봄이 왔었다.

찰나에 불과했을 시간.“

그리고 시간은 흐른다.

찾아온 온기가 떠나고 봄은 끝났다.

그러나 아이르는 봄을 떠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르는 꺠달았다.

이미 그녀는 봄에 마음을 빼았겨 버렸다고.

”너를 몰랐을 땐 그랬는데 이젠 영원처럼 느껴져. 네가 사라졌을 땐 영원히 없어진 줄 알았어. 나를 두고 떠난 것만 같았어. 기억 속의 너는 언제나 웃어주고 있는데 내 곁에 너는 없었어.”

주저없이 털어지는 속내.

비와 함께 섞여내린 진눈깨비처럼 그 말은 발목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봄과 함께 했던 나날들을 잊고 싶지 않다.

계속해서 같이 있고 싶다.

그래서 봄이 사라지자 스스로를 불사르며 여름이 되어버렸다.

“아이르는 정했어.”

“이젠 놓치지 않아. 버리게 하지 않아. 떠나게 두지 않아. 그 누구라도 당신에게 꼬리치게 두지 않겠어.”

“당신은 나만의 것. 누구에게도 주지 않아. 아무데도 못가.”

영원히──

생전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열렬한 구애.

빠져나가지 못하게 꽈악 붙잡는 겨울의 사랑고백.

그 모든 것들을 들으며 용사는 의식을 완전히 잃기 직전에 보았다.

문 너머에서 치렁치렁한 백발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현자의 모습을.

주름진 얼굴에 경악과 당황이 한데 어우러진 진심을 보았다.

‘……발견했다. 틈새.’

*

정적 속에서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내 의식은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고요히 부유했다. 때로는 어둠에 완전히 삼켜졌고 또 벗어나기를 반복했다. 어둠이 반복되기 전 회색일 때, 나는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

다그닥, 거리는 소리.

푸르륵, 우는 소리.

분명히 말소리였다. 그러니까… 말하다의 말 말고 달리는 말 말이다. 육지에서 60km의 시속을 뽑아내며 부와 귀의 상징이자 구식 교통수단인 호오올스.

……아무튼. 상황이 무언가 변한 듯 싶었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지하실 방에 감금되어 있던 내게 말의 소리가 들릴 이유가 없을텐데.

그 순간 나를 감싸고 있었던 어둠이 서서히 걷혀갔다. 어느 순간, 영화관의 도입부처럼 ‘화악!’ 하고 시야가 밝혀졌다.

푸르르륵. 푸륵.

눈을 뜨자 바로 보이는 건 검은 색의 말갈기였다.

나는 안장이 얹혀진 말 위에 있었다. 그것도 직접 고삐를 잡은 채로.

푸르르륵.

말이 아까부터 연신 불안하게 울었다.

이럴 땐 기수가 목 부근을 쓰다듬으며 안정시켜줘야한다.

그런데 말을 쓰다듬어주어야 할 내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고삐를 놓칠 세라 더욱 움켜쥘 뿐. 예민한 동물들은 그런 건 또 잘 알아채기에 기승 교육을 받은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보니 몸도 전혀 움직여주지 않는다.

느껴지는 감각이 온전히 전해지는 데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니.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또 현자가 무슨 괴상한 약을 먹이기라도 한건가.

“그런 식으로 고삐를 잡으면 말이 불안해한다. 그럴 거면 그냥 과감하게 놓아버려.”

그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담한 어조에는 피곤한 기색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은 조언대로 고삐를 잡는 힘을 살짝 풀었다.

아주 지멋대로네. 내 몸인데 내 말은 안듣고 남의 말은 잘 들어?

얄궂게도 제 의지를 배반한 몸은 멋대로 시야를 뒤쪽으로 돌렸다.

…젠장. 욕이 나올 일이다. 나는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이 악몽임을 깨달았다. 뒤에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남성을 보고 알 수 밖에 없었다.

“하. 승마 실력이 썩 좋진 않군. 내 조언을 하나 해주자면, 그렇게 어설프게 힘을 주지 말고 말에게 몸을 맡겨라. 훈련도 잘 되어 있는 녀석이니 그러면 알아서 갈 거다.”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인물이었기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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