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6장. 엑소더스(2)
* * *
오른 뺨에 차갑고 울퉁불퉁한 감촉의 면이 닿는 걸로 추측해보건데, 나는 아무래도 엎어져 있는 모양이다. 용사는 생각하며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목을 조르고 있던 아이르의 손은 느껴지지 않았고, 단지 환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마냥, 목은 메마른 고통을 호소했다. 분명 겉으로 보면 붉거나 푸른 손자국이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죽진 않은 모양인데.’
정신을 잃을 때만해도 꼼짝없이 이대로 교살 당할 줄 알았는데 용케도 살아난 모양이었다. 용사는 좋아해야하나 순간 판단을 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아이르는 정말 예측 외였다.
설마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할 줄이야. 정작 현자나 대도는 멀쩡했는데 말이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성별, 그리고 자신이 플래그를 꽂은 대상이라는 것 뿐이었다.
용사 직감은 후자의 기여도가 압도적으로 크다고 알려왔다.
‘난리났는데 이거.’
솔직히 말하자면 플래그를 몇 명에게 꽂았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지위가 높거나, 가진 바 무력이 쓸만하거나, 머리가 비상하거나. 그런 뛰어난 능력을 보유한 여성들에게는 온갖 방법으로 ‘공략’하며 플래그를 꽂아두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차이는 존재한다. 동료 중에서는 세 명, 협력자에서 하나. 결과적으로 호의를 뛰어넘어 애정의 플래그를 박아둔 여인은 총 네 명이다.
성녀 그라시아.
황태녀 플로렌스.
겨울의 마녀 아이르.
용병여왕 셀리나.
이렇게 네 명 중에서도 아이르는 가장 내성적인 성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보니 극하드 얀데레로 각성한 상태다.
그 이유는 그녀가 말해주었다.
그리고 잠시 검토해본 결과 그녀의 말대로 나의 부재가 결정적이었다고 용사는 깨달았다.
물론 부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긴 했으나….
그걸 말한다고 해도 아이르가 납득해준다는 보장이 없는 이상, 솔직히 털어놓는다고 잘 풀릴거라는 가정은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야만 했다.
‘그나저나 영혼을 깎아 만든 사슬이랬나? 너무 사기잖아. 몸 안에 마나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게 만들다니.’
…아니, 생각해보면 효과가 별로다. 수천 년을 살아온 마녀가 영혼을 깎아 만든 사슬이 고작 체내 마나를 못쓰게 만드는 거면 거의 쓰레기템이다. 예상컨데 그건 부과효과일 뿐이고 알짜배기는 원하기 전까지는 구속이 풀리지 않는 쪽이겠지. 무섭다 진짜….
달그락. 달그락….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에 용사는 한쪽 눈만 슬쩍 떴다.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고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이쪽을 등지고 있는 현자를 발견하고선 다시 눈을 감았다.
‘음. 아무래도 없는 거 같지…?’
용사는 그 순간 거세게 기침을 뱉었다.
“콜록! 콜록!
숨을 쉬지 못하다가 겨우 공기를 들이마신 사람처럼 기침을 한다.
그러자 뒤돌아 있던 현자가 재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콜록…! 콜록!”
“야, 정신이 좀 들어?!”
“콜록……무, 무.”
“어? 물? 물? 그래. 잠시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물병을 집어드는 소리가 들리고, 입 벌리라는 현자의 말에 그대로 따르자 시원한 물이 벌리고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혹시나 체할까, 뒷목까지 받혀주고서 먹여주는 물을 다 마시고 난 뒤, 용사는 괴로운 듯이 몸을 비틀었다. 그러면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까 봐뒀던 벽을 향해 움직였다.
용사는 바로 등에 벽이 닿는 느낌이 들자 겨우겨우 상체를 일으켜 벽면에 몸을 기댔다.
수갑에 의해 뒤로 묶인 양 손목.
그대로 벽에 기대자 손등이 까슬까슬한 돌벽에 닿는 바람에 쓸리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으….”
힘겹게 보이도록 눈을 뜨자 현자의 표정이 보였다.
숨길 수 없는 감정의 동요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얼굴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넌 아이르가 날 갑자기 죽이려 할 줄은 몰랐을 거다.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으니까. 애당초 아이르 본인도 그럴 생각은 없었을 테니. 그러니 더더욱 예상은 하지 못했겠지.
이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고 죄책감을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혀, 현… 자. 아.”
그리고 난 그 죄책감을 이용할 것이다.
본인이 저질러서 벌어진 일은 스스로가 해결해야하는 법. 죽이진 않는다 대가를 치르게 할 뿐. 이용해주마.
용사는 속으로 희게 웃으며 밖으론 더듬거렸다.
“추, 추, 추어. 추어.”
“춥다고? 내가 저번에 가져다 둔 담요가 여기 어디 있었는데… 찾았다!”
때는 봄철이긴 했으나 그들이 있는 곳은 지하실.
저장고 용도로 지어진 듯한 넓은 방은 자연히 공기 중에 냉기가 흐르도록 되어있다.
내뱉어지는 목소리가 쌕쌕거리는 걸 깨닫는다. 아이르에게 목이 졸렸던 무형의 흔적이다.
용사는 그 사실을 알게되는 순간 이것 또한 훌륭한 재료가 되어줄 것임을 알고 더욱 쌕썍거림의 강도를 높였다.
색색거리는 목소리를 더듬기까지 하자, 지하실의 찬 공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현자는, 당연히 기절한 동안 가벼운 감기에 걸렸다고 판단되는 내게 두꺼운 담요를 덮어주었다.
“아으. 여… 여기가 어디…. 아, 맞…다. 나는… 네게… 아. 왜… 그런…데. 어.”
용사는 어디까지나 정신이 혼미한 사람을 연기했다.
이제 막 기절 상태에서 깨어났고, 목이 졸려 기절했으므로 가벼운 기억상실과, 그를 되찾아가는 상황을 연기하며 최대한 안쓰러운 인상을 받을 수 있도록.
용사는 애써 연기를 펼쳤다.
그는 필사적이었다.
“…일단 진정해라. 용사.”
좋아. 죄책감이 성공적으로 눈과 귀를 가려주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죄책감이 서려있던 어조가 침착해져가는 느낌을 강렬히 받았다.
이성적인 현자는 버릇적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배제시키고 있는 것이다.
저걸 막기 위해선 조금 더 독하고, 특단의 수단을 발휘해야만 했다.
“그… 런데 내… 가 왜… 쓰러… 져, 아……!”
여기서 말을 끊는다, 기억을 더듬다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그리고는 눈물을 쥐어 짜낸다!
용사는 단 한마디의 말을 반복해 생각했다.
후.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아, 아이…르. 아이르…. 흐, 흐으윽…!!”
“너, 너, 너, 너 우, 우는 거냐!?”
이걸로 끝나면 안된다!
바로 이때! 덮고 있는 두꺼운 담요에 고개를 파묻는다!
고개를 처박기 직전에 목격한 현자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아, 아아아… 아아. 무, 무서워. …무서, 워. 흐으으으….”
용사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온몸으로 두려움을 표출했다. 그러자 감정을 배제하려던 현자의 버릇이 완전히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 자, 잠시만. 이런 망할! 이럴 줄은 몰랐는데. 설마 동료에게 공격 받았다고 정신이 한계에 부딪힌 건가?! 이 녀석이?!”
“흑! 흑! 흑! 흑! 흑!”
“에이씨…! 이러면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아이도 달래본 적 없는데!”
목소리에서부터 어쩔 줄 몰라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참고로 나는 동료들 앞에서 울상도 지어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어린애처럼 울고 있으니 ‘아! 이거 심상치 않구나!’라며 당황해하는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쪽팔림? 그딴거 개나 줘벼려!
용사는 쭈그려 앉은 채로 담요에 머리를 파묻고 오열했다. 그러고 얼마 안 있자, 머뭇거리던 현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흑! 흑!”
“지, 진정, 진정해라. 진정하고. 괜찮으니까. 응?!”
애처럼 울고 있다고 내가 진짜 어린애로 보이냐.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전진으로 점점 둘의 간격을 좁혀져가고 있었다.
용사는 담요를 더욱 끌어안는 시늉을 하며 준비를 마쳤다.
“아이르… 무서워… 아이르… 무서워… 으으으흐으….”
“괜찮아. 괜찮다니까? 무서운 거 없다. 없어. 내가 저 멀리 쫒아냈다. 그러니까 그만 뚝하자. 응?”
“아 그래?”
그 순간, 용사는 담요를 발리볼 치듯이 그대로 올려쳤다.
“뭐, 뭐야!”
“뭐긴 뭐야. 정의 구현의 시간이다!”
현자는 날아드는 담요를 재빠르게 쳐냈다.
과연, 전장의 감이 아직 죽진 않았다는 건가? 훌륭한 대처법이다. 단지 내 몸통박치기를 막진 못했지만.
흡사 볼트태클같은 기세로 들이박자 뒤통수로 바닥에 키스한 현자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싶었다.
“이새끼 날 속여? 가만히 안 두….”
그래봤자 한박자는 늦었다.
재빠르게 마운트 자세를 잡고 일어나려던 움직임을 봉쇄한 용사는 현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 뭐야?! 너 어떻게 족쇄를 풀었냐?”
결코 풀리지 않는다는 사슬로 만든 수갑으로 뒤로 하여 묶여 있었을 ‘두 손’으로.
현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푼 거 아니다. 빼낸 거지.”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용사는 수갑을 풀지 않았다.
그저 빼냈을 뿐이다.
뒤에서 앞으로.
“어깨뼈를 빼면 뒤로 손이 묶여있더라도 엉덩이 아래를 통해서 앞으로 빼낼 수 있다더라고? 한번 해봤는데 효과 죽이네.”
체내 마나를 쓰지 못하고 사지가 자유롭지 못한들, 용사는 지난 수십 년을 전장에서 살아왔다. 그건 현자도 마찬가지였으나 엄연히 용사는 무투파고 현자는 지략파다. 사정거리에 들어와버린 이상 현자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요컨대 현자는 지금 도랑 안에 들어온 가재 신세라고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용사에게 구속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려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도둑놈의 새끼가 쓸데없는 걸 가르쳐놓아서!”
“왜 그래. 배움에는 귀천이 없어요. 배워두면 어딘가 쓸모가 있다는 말이 괜히 있는 줄 아냐?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야.”
현대에 떠도는 말들 중에 하나를 떠올리며, 용사는 살기어린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너를 어떻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