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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28화 (28/45)

〈 28화 〉 6장. 엑소더스(3)

* * *

지하실에 마녀는 없고 남은 것은 용사와 현자뿐이었다.

넓으나 한없이 답답한 공간. 그곳에는 광애(??)에 목숨을 겨우 건진 남자가 막 틈을 찌르고 있었다.

“응? 말해봐,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래?”

용사는 현자에게 감정적으로 물어보았다.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냐고.

치료해주겠다는 명목으로 나에게 수면약을 먹이고 납치 · 감금한 그를 어떻게 해주길 바라느냐고, 그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입이 열개 있더라도 돌아올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애당초 정상이라는 범주 안에 있지 않은 예외라면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리고 용사가 알기로 현자는 그 예외에 속한 부류의 인간이었고, 그 예상은 들어맞았다.

“...내게 원하는 게 뭐야?”

감정적인 물음에 현자가 이성적으로 대꾸했다.

“네 목적을 말해. 내게 원하는 게 있으니까 바로 죽이지 않는 거 아니야?”

“별 거 아니야. 정보. 이 지하실은 어느 국가의 어느 지방에 위치해 있는가, 아이르는 자리를 비우고 어디로 갔으며 언제 돌아오는가. 내상약의 정확한 효능과 복용 주기. 완전히 회복되는 데 걸리는 시일. 그리고 네 진정한 목적까지 그 모든 걸 원해.”

간단히 말해서 죄다 불라는 의미였다.

가슴팍이 짓눌린 채인 현자는 말뜻을 알아듣고선 헛웃음을 쳤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언어 체계에 대격변이 일어났나? 언제부터 '별 거'가 '전부'가 되었는지 모르겠군.”

“대신 없었던 걸로 해주겠어.”

현자는 순간 움찔했다.

“예전에도 대비를 해뒀느니 죽을 일은 없다드니 하면서 사지로 등을 떠밀었었잖아. 그거랑 동일 선상으로 봐주겠다는 거야.”

“동일하게 봐주겠다…?”

용사의 제안에 현자는 솔깃해했다.

“그래. 네가 날 속인 것. 그로 인해 받은 위협. 모든 걸 불문율에 붙여줄게. 어떠한 불이익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그러니 말해.”

“한 번에 다 말하진 못해. 그래도 상관없나?”

“이제와서 담보라도 들어두겠다는 거야? 좋아. 그럼 먼저 하나만 대답해. 그리고 결정하겠어.”

수긍하는 현자를 보며 머릿속에서 수많은 의문을 떠올렸다.

용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질문을 하기로 했다.

“아이르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내가… 약초를 구하라고 내보냈다. 네 부상을 치유할 그 약 말이다.”

“역시 약은 네가 만든 거였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찾아오는 건데. …그러면 네 생각에는 아이르가 언제쯤 돌아올 것 같아?”

“대략… 세 시간 정도 되겠군. 약초가 희귀하지만 이 근처에서 자생하지 않는 건 아니거든. 대신 겸사겸사 몇가지 심부름도 시켰으니 오래 걸릴 거다.”

아이르가 이곳까지 돌아오는 데 세 시간이라….

일단 벗어나면 추적 기술이 전혀없는 그녀가 쫓아올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더군다나 그녀는 길치 아니던가.

현자 위에서 비킨 용사는 그를 붙잡고 일으켰다.

그리고 양팔을 붙잡고 180도 돌렸다.

“좋아. 그럼 업어.”

“……설마 널?”

“날.”

잘 들리지? 라며 용사는 아직도 팔다리에 묶여 있는 족쇄를 짤랑거렸다.

***

일레느 마을에서 태어난 보부상 폴은 부지런한 남자였다.

그는 도시에서 구한 생필품들을 쉬이 접근하기 어려운 외지 지역을 골라서 팔고 다녔다.

또 폴은 신앙심이 깊은 남자이기도 했다.

다른 보부상들은 물건을 사고 파는 과정에 막대한 폭리를 취했다.

그러나 폴은 달랐다.

그는 '베품의 여신'을 믿는 신도였다.

베품의 여신 교파가 설파한 교리.

그에게 있어서 판매란 '베품의 신앙'을 따르는 길 중에 하나였으며, 천만다행이게도 이 일은 그에게 적성이 맞았다.

폴은 그 사실에 언제나 감사했다.

항상 '베품의 여신'께서 신실한 신자를 가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에.

그리고 지금.

­크르르르.

“…아. 아아아….”

그의 믿음은 시험을 받고 있었다.

“울프팡…!”

마수와 늑대의 교잡종.

무리를 짓는 늑대의 습성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마수의 튼튼한 육체를 겸비한 울프팡은, 폴과 같이 야지를 도보로 다닐 수 밖에 없는 보부상들에게는 죽음의 사신이나 다름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철마(?馬)를 타고 와야 했었다. 고난 끝에 베품이 더욱 값지다는 내 어리석음이 내 목을 졸랐구나!”

폴이 어떠한 말로 한탄할지라도, 그저 괴물에 불과한 울프팡 무리는 먹잇감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발톱을 세우며 폴의 인생을 비웃듯이 이를 드러냈다.

“사, 살려줘!”

폴은 겁에 질려 재빠르게 뒤를 돌아 뛰었다.

그러나 맹수 앞에서 등을 보인 사냥감에게 기다리는 미래는 오직 죽음 뿐.

­크아아아앙!

울프팡은 저 멍청한 사냥감에게 그 지고의 사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순식간에 폴의 뒤를 점하고 아가리를 쩍 벌리는 울프팡.

그 순간 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베품의 신조차, 마음씨 좋은 보부상의 위기를 외면하는 듯이 보였다.

뛰어오른 울프팡이 폴의 뒷목을 물어 채려던 그 순간!

­깨깨깨갱!

울프팡은 샛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폴은 귓가에서 울린 울음소리에 무심코 주저앉았다.

­깽!

­깨깨깨갱!

­깨깽!

폴의 이성은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달리라고 소리쳤지만, 폴은 이미 본능의 지시에 따라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뭔 놈의 개새끼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사람을 물려고 들어. 역시 미친개는 매가 약이지. 약이야.”

짜증어린 기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뒤를 돌아본 폴의 눈이 커졌다.

그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울프팡 무리는 눈과 귀에서 피를 흘리며 지면을 뒹굴고 있었다.

그렇게 쓰러진 울프팡들의 중심에 두 남자가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건데 그들이 울프팡을 쓰러트린 게 틀림없었다.

“저, 정말 고맙소... 오?”

자리에서 일어나 두 남자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려던 폴은 멈칫했다.

두 남자의 행색이 다소 기묘했기 때문이다.

둘은 하얀 백발을 한 노인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문제는 노인이 젊은 남자를 업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 반대여야 하지 않나?

폴은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우선이 무엇인 줄 알았기에 하다만 감사 인사를 마저 건넸다

“당신들이 아니었더라면 난 여기서 죽었을 거요. 필히 사례드리겠소이다. 난 일레느 마을 출신의 폴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실례가 안된다면 두 분의 존함을 알 수 있겠소?”

둘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서로 귀앳말로 상의하더니 이내 그에게 다가왔다.

지척까지 다가온 그들 중에서 업혀 있던 남자가 먼저 말했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폴 씨. 제 소개를 하지요. 저는 장. 떠돌이 용병을 하고 있지요.”

“...발장이오.”

*

길안내를 부탁받은 보부상 폴이 앞장 서는 동안, 두 남자.

“용사 지금 내가 새로 깨닫게 된 건 딱 하나다.”

“말해봐.”

“네 작명 솜씨는 형편없다는 거지. 어떻게 이름이 장과 발장이냐.”

“너 지금 부유층보다도 많은 기부와 관심을 빈층에게 쏟아붇고 수양딸을 위해 아버지의 길을 걸은 위대하고도 가정적인 탈옥수를 모욕하는 거냐?”

“젠장! 그러니까 그게 대체 누구냐고!”

용사와 현자는 서로 다투고 있었다.

“이게 맞는지 모르겠군.”

“좀 믿어봐라. 이젠 한배를 탄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렇다면 인제 그만 내려오는 게 어떠냐. 같은 배에 탄 사람이 허리가 나가시겠다 망할.”

“한배를 타긴 탔지만 처지가 다르지. 넌 밑창에서 노질하는 선원이고 나는 1등 객실을 잡은 승객이거든.”

말하는 법만 늘어가지고, 현자의 인상이 팍 구겨진다.

“쯧. 아무리 나라도 이 판단이 맞는지는 모르겠군. 정말 이렇게하면 도망치는 게 가능하냐? 아이르의 손아귀로 떨어지는 형국인데.”

“그래 확실해.”

엎혀 있던 용사는 고개를 쳐들었다.

앞서가는 폴의 등을 바라보았다.

길잡이가 필요하던 차에 우연찮게 울프팡 무리에서 구해낸 저 보부상은 이 근방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자였다. 보부상의 목적지는 용사에게 있어선 중간 기착지였다.

이제부터 길어질 여정을 다시 한번 점검해본다.

여정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면, 그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문득 흰 구름이 흘러가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용사란 존재는 비유하자면 살아 움직이는 핵폭탄에 가까웠다.

그것도 여러번 쏠 수 있고 재활용도 가능한 그런 핵폭탄.

마왕또한 핵폭탄이며 자체적인 억제력이기도 했다.

농담 같지만 이 대륙에는 핵폭탄의 파괴력을 갖춘 강자들이 실제로 존재했다.

그 중에서도 용사는 특출난 강함을 보유한 ‘강자였었다.’

그런데 마왕을 토벌하고 난 뒤 그는 크나큰 부상을 입었다.

성자조차 쉽사리 치유하지 못하는 상처였다. 그래서 숨었다.

마왕이라는 대적자가 사라진 이상 용사의 쓸모는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

용사는 밖의 위협이 있을 때나 ‘어이구 우리의 희망.’하면서 겉으로나마 떠받들어주지, 속에서는 한낱 외인이라면서 멸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왕이 죽은 마당에 그 태도가 영원할 것이

라고 믿는 건 순진하다못해 멍청한 판단일 것임에 틀림없다고 여겼다.

용사를 용사로서 만들어주는 명분이 사라지고, 명분을 뒷받침하던 강대한 무력이 손상을 입었을 때 달려들 하이에나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용사는 그를 경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용사는 역시 운이 좋았다.

때마침 부상을 회복할 방법이 알아냈다.

그렇다면 시간을 벌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온전히 제 몸상태를 찾는다면 그때야말로 당당히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거다.

“아이르는 영리한 편이야. 내가 태어난 나라에는 이런 속담이 있지. ‘등잔 밑이 어둡다.’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일을 오히려 모른다는 뜻이야. 영리한 아이르이기에 역으로 속아넘어 갈거다.”

대륙 북부.

대륙 동부의 소국들이 무너지고 그 난민들이 떠나와 정착한 오지.

“우리는 북부로 간다.”

그리고 수천 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아이르가 지내던 영원의 숲이 있는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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