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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30화 (30/45)

〈 30화 〉 7장. 산중마을의 실종 사건(2)

* * *

사람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뻔뻔해질 수 있는 생물이다.

물론 얼마든지 진솔해질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었다.

하지만 살아가며 솔직한 것보다는 그 반대 상황이 많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사실일 것이다.

뻔뻔하다.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길을 잃었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눈 앞이 노래지더군. 어림짐작으로나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보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멍청한 짓이었어.”

“정말 고생 많았구려. 아, 수프 더 드시겠소?”

“고맙네.”

조난자를 가장하고 일행에 섞여든 대도는 뻔뻔했다. 세기의 도둑은 변장에도 능했다. 현자가 ‘지랄한다.’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수프를 먹던 숟가락이 그쪽을 가리켰다,

“저, 친구들은?”

“아…… 음. 혹시 내가 대신 소개해도 괜찮겠소들?”

“얼마든지.”

무의미한 소개 일터이지만. 나는 짧게 대답했다.

“젊은 분이 장. 그리고 다른 분이 발장이오.”

“호오. 보니까 용병같은데 그대가 고용한 겐가?”

“아아, 아니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보부상 폴은 지난 며칠간 말동무를 한 깜냥이 어디가진 않았는지, 능숙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가관인 것은 그것에 맞춰 추임새를 넣는 대도였다.

대도가 놀랍다는 말투로 말했다.

“아주 뛰어난 용병이신가 보군.”

“아무렴. 때마침 나타난 그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쯤 여신님의 곁으로 갔을 거요. 물론 신자로서 언젠가 순리에 따라야 한다는 걸 알고야 있지만. 젖도 못 땐 배냇둥이도 있어서….”

“음. 아기는 보물이지. 아주 진귀한 보물이야.”

그 마음을 알겠다는 듯이 폴의 어깨를 툭툭 치는 대도.

저 순진한 보부상은 알까.

그 잠깐 사이에 대도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었다는 것을.

남의 것을 훔쳐가는 이답게 묻지도 않는 정보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게 만드는 분위기에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눈뜨고 코를 베인다는 표현이 걸맞을까.

아니면 코를 베진 않았으니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할까.

도둑질을 그만 두었다는 저번의 말과는 달리 한껏 제 재능을 발휘 중이었다. 그런 그를 내가 어이없게 보든지 말든지 하던 찰나, 대도가 말했다.

“자네들이 불편하지만 않다면 그 마을까지 함께 가고 싶은데.”

“불편한데.”

“…….”

곁에서 불퉁한 목소리가 들여왔다. 현자가 조건반사적으로 내질른 것이다. 불쌍하게도 순진하고도 순수한 보부상 폴께서는 썩 당황한 눈치였다.

“저, 발장 씨. 너무 그러지 마시고.”

“이봐, 조난당한 사람치고는 너무 태연하잖아. 저런 사람을 뭘 믿고….”

“난 찬성.”

그 말에 조목조목 따지려들던 현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임마, 용… 아니. 장.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도 똑같은 처지지. 누굴 끼워주나”

그리고, 라며 뒷말을 묵음 처리하고 고개를 살짝 숙여 입 모양을 폴이 보지 못하게 만든 다음, 벙끗거렸다.

‘니가 안된다고 해서 대도가 포기할 거 같아? 아닐 걸. 안되면 안되는대로 따라올 건데 차라리 곁에 두는 편이 더 나아.’

‘너 알고 있는 거냐? 저놈 저거 황태녀 끄나풀이라고.’

‘전직 끄나풀인 니가 할 소린 아니야.’

그것도 날 하마터면 피폐물의 주인공으로 만들 뻔한 원흉이다.

현자는 말없이 인상을 와락 구기더니, 말을 돌렸다.

‘…그래, 그건 그렇지. 그래도 쟤는 현직이잖아. 앙?’

내 시선을 받은 대도가 슬쩍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했다.

내가 찬성하는 이유를 아는 자의 미소.

은근히 현자를 고개짓하는 대도.

이미 한번 곤란을 겪은 입장에서 두번은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얼굴이었다.

“끄으으응…!”

현자는 그 광경을 목격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

“끈질긴 도둑놈.”

“좀 조용히 하게, 꼬장꼬장한 성질머리를 죽이라고. 친절한 상인 양반이 깨겠군.”

“신소리는 집어치워.”

타닥타닥.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신경질적인 말들이 서로를 찔러댔다.

결국 대도는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고, 얼추 평평한 지대를 찾아 야영지를 꾸리고선 취침에 들어갔다. 보부상 폴은 먼저 쉬라는 셋의 권유에 떠밀리듯이 잠들었다.

현자는 손을 몇 번 휘젓는 것으로 폴에게 수면 마법을 걸고선 대도를 향해 따지듯이 물어왔다.

“이 산길에서 대체 무슨 수로 우릴 쫓아온 거냐, 응?”

“쫓아왔다니 무슨 소린가. 야산에서 조난당한 가련한 신사를 구한 건 친절한 상인일세. 자네들과는 우연히 만난 거라고. 알겠나? ‘우연히’라네.”

“변명 한번 끝내주는군.”

질렸다는 듯이 현자가 진저리를 쳤다. 뒤통수를 냅다 갈기고 도망간 현자의 입장에서야 대도는 껄끄러운 상대일 것이다. 막상 무력으로나마 배제하려고 해도 둘 다 전투 요원이 아니었던지라 실력이 고만고만하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을 두고보고 있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판정승을 거둔 현자가 기분좋게 웃으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년의 도둑이 잘 기른 수염에 언뜻 보이는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플로렌스 전하가 삐졌네.”

“……?”

나는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플로렌스가 삐졌다?

제국의 황궁에 있을 그녀가 마음 상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내 의문을 알아챈 듯, 대도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잊고 있었나보군.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용사, 자넨 분명 전하를 정기적으로 만나 보고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연락이 너무 늦는다고 뭐라 하시더군.”

그러고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때가 너무 이른 거 아닌가.

체감상 그녀와 만난 건 기껏해야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정확히는 한 달 하고도 보름일세. 뭐, 아직 시일이 남긴 남았는데 그거야…… 사람 마음이 다 그런거 아니겠나.”

음흉한 도둑은 다 알지 않느냐는 듯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그런데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안색이 영 좋지 않군.”

“…여러모로 일이 있었어.”

정말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아이르의 변모는 그만큼 내게 크나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세상에, 진퉁 얀데레라니. 약물납치감금이라니!

내겐 그런 취향따윈 없는데. 일일히 밥을 먹여줄 때는 얼마나 쪽팔렸는가.

“너무 애매모호한 답변을 해버리면 내가 도와줄 수가 없잖은가. 좀 더 세세히 말해보게나, 응?”

도움을 준다기 보다는 가십거리가 필요한 얼굴인데. 말하지 않는다면 끝까지 엉겨붙겠다는 의지가 팍팍 전해져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간 있었던 이야기 보따리를 자세히 풀어놓았다.

유쾌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대도는, 점점 안색이 진중해지더니 끝내는 안쓰럽다는 눈초리로 날 쳐다봤다.

“가능한… 아니, 절대로 그녀완 마주치지 말아야겠군.”

콧수염을 손가락으로 튕기던 대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상상이 간다는 듯 몸을 부르르르 떤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잠시만. 자네 그럼 여기서 느긋하게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않나? 동부든 서부든 어디든간에 쫓아오기 힘든 곳으로 도망쳐야하지 않느냔 말일세. 아니면 쥐죽은 듯이 숨든가.”

“그래서 가고 있잖아.”

“북부로?”

대도가 고개를 저었다.

썩 좋지 않은 판단이라는 모양이다.

“차라리 이대로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는 건 어떠한가.”

“그게 그냥 누구 하나 끝장보겠다는 거랑 뭐가 다르냐.”

대도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거야말로 자충수나 다름없었다.

유일하게 된 알슈타르 제국과 강함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마녀를 싸움 붙이겠다는 것 아닌가.

“될 수 있다면 그런 방법은 피하고 싶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인적으로도, 물적으로도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할 거다.

나 하나 살자고 큰일을 벌이게 할 순 없었다.

이제 성검이 없다곤 하나 용사로서 살아온 지난 세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식견이 남다른 대도가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테지만, 그만큼 내 처지가 심각해보인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자네를 묶고 있다던 그 족쇄나 좀 보여주게. 풀어줄 수 있는 거라면 풀어주도록 하지.”

나는 현자를 바라봤다. 조심성이 많은 현자는 잠들어 있는 폴 쪽을 살피더니 내게 걸려 있던 환영 마법을 풀었다. 그러자 양손과 양발을 묶고 있는 족쇄가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혼으로 엮어낸 사슬인가. 억압의 개념이 부여된 예장인 듯 하군. 혹시 오러를 사용해 끊어낼 순 없겠나?”

“되긴 할거다. 대신 지금의 위치가 아이르에게도 알려지겠지.”

“헛수고라는 게로군.”

옆에서 현자의 부연 설명을 들은 대도는 유심히 관찰하더니 이내 손을 뻗었다.

“조금 아플테니 참게나.”

우두두둑!

돌안간 내 오른손을 그러쥐더니 엄지손가락 관절을 빼버렸다. 신체 말단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이 팔뚝을 타고 어깨로 오더니 절절하게 울린다. 생소하지만 고통을 참는 것에는 일가견이 쌓여버렸다.

그 잠깐 사이, 대도는 오른 팔목에 채워져 있던 족쇄를 미끄러트리듯이 빼냈다. 그리고선 빼냈던 엄지손가락의 관절을 다시 끼워맞춰버린다.

“반대쪽 주게.”

우두둑!

왼 팔목에 있는 족쇄도 이전의 과정을 똑같이 거쳤다.

완전히 자유가 된 양 팔목을 돌려보며 이젠 발을 내밀었다.

그런데 발목을 만지던 대도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이쪽은 힘드네. 관절을 빼낸다고해도 나올 정도로 공간이 남지 않았어. 미안하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양 팔목에 이상이 없는 걸 확인했다.

고맙다고 대도에게 말하려던 찰나, 그의 시선이 풀어진 족쇄에 못 박혀 있는 걸 발견했다.

이새끼 설마?!

“야, 너 뭐….”

철컥.

“…….”

“…….”

“풀 수 없는 구속이라니… 나쁘지 않군.”

…환장할 노릇이다.

정말로 미칠 것 같았다.

대도의 양손에는 바로 전에, 스스로 내게서 풀었던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내 다리의 족쇄와 대도의 팔의 족쇄 사이에 연결된 사슬이 출렁거렸다.

“이… 뭔….”

현자는 방 안에서 기어가는 바퀴벌레를 본 듯이 인상을 한가득 찌뿌린 채, 극도의 혐오를 담아 외쳤다.

“뭐야 이새끼 왜 이래?!”

나도 몰라….

*

다음날 아침.

망할 도둑놈의 취향 덕분에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던 그때였다.

앞서 걸어가던 폴이 무언가에 걸린 듯 휘청이더니 멈춰섰다.

“이보시오들! 여기! 여기로 와보시오!”

이거 어디선가 본 레퍼토리다.

나는 의심하는 눈빛으로 대도를 째려봤다.

현자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왜 다 날 쳐다보나?”

둘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대도는 나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누구지?

쓰러진 사람을 뒤집자, 그 얼굴을 확인한 폴의 안색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다나!”

폴의 지인인 듯한 20대 초반 여인.

그녀는 정신을 잃고 야지에 쓰러져 있었다.

다른 셋 중에 대표로 나선 대도가 말했다.

“이 여인이 누군지 알고 있소?”

“다나요!”

그러니까 그게 누구냔 말이다.

셋의 표정이 묘해지자, 폴이 제 실수를 깨닫고 급히 덧붙였다.

“지금 가고 있는 마을의 방앗간 집 둘째 딸이오.”

“둘째 딸? 그 마을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나?”

“앞으로 반나절 정도면….”

폴의 말을 한 귀로 들으며 나는 쓰러진 여성을 자세히 살폈다.

성인 남성의 걸음걸이로 반나절 거리의 마을.

그 주민이 여기에 쓰러져 있을 이유는 무언가 일이 터졌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분히 수상한 점이 눈에 띈다.

정신을 잃은 것치고는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없다.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쳤다기에는 출혈이 발생하거나 혹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잠옷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그녀의 발은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아무리 마을 주변이라하더라도 산길을 다니기에는 굉장히 부적절한 차림아닌가.

입을 열려는 순간, 등뒤에서 현자가 앞으로 나왔다.

“눈이 완전히 뒤로 넘어갔어. 깨우더라도 쉽사리 일어나지는 않을 것 같군.”

그는 능숙한 손길로 방앗간 집 둘째 딸의 눈꺼풀을 뒤집어보더니 덧붙여 말했다. 일 났군. 일행 중 가장 박학다식한 그가 이리 말할 정도면 하루 이틀 정도로는 깨어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말은 즉슨, 그녀가 마을과 동떨어져 있는 이곳에 쓰러져 있는 정확한 사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으니 누가 업고 가야하는데….”

현자가 손을 툭툭 털며 일어나서 일행을 돌아보았다.

“야, 대도……가 아니라.”

현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폴을 흘끗 보더니 호칭을 바꿨다..

“거기 ‘전’ 조난자께서 ‘현’ 조난자를 맡아주면 되겠네.”

“음….”

대도는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 힘 좀 써보지.”

“좋아. 폴, 그쪽은 하던대로 길잡이를 부탁하지.”

“알겠소이다. 여, 역시 용병이라 그런가. 참으로 믿음직스럽소.”

“별 거 아니야.”

어째서일까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이번 일의 말미에 크게 데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주 강렬한….

*

산 봉우리를 넘어 도착한 산중마을.

그 어디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마을에는 기이한 적막감만이 가득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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