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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34화 (34/45)

〈 34화 〉 7장. 산중마을의 실종 사건(6)

* * *

재빠르게 움직인 우리는 사각지대에 몸을 숨겼다.

나온 것이 누군든지 몰라도 보이지 않을 각도였다.

우리는 슬쩍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의외의 인물이 보였다.

실성한 것처럼 보이던 노인이었다.

폴의 말에 의하면 이 마을의 촌장이라던 그는 집에서 나오던 버릇이 나온 듯, 문까지 닫고선 어디론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성했다는 추측과는 달리, 지금 그의 비틀거리기는 하지만 발걸음에서는 힘이 느껴졌다.

자신이 갈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재차 문이 열리고 폴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사방을 살피던 폴은 벌써 멀어져가는 노인을 발견했다.

그 순간 폴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안도의 기색을 정확히 포착했다.

다급히 노인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듯이 보이면서도 노인의 속도는 제법 빨랐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대도였다.

“제법 빠른데. 서둘러 쫓아가야겠군.”

“기다려라. 먼저 여자의 상태를 살펴보는 게 먼저다.”

도둑의 본능이 발휘된 듯 성급히 따라가려던 대도를 제지한 후, 현자는 몸을 숨기고 있던 사각지대에서 나와 닫힌 문을 향해 걸어갔다. 혹시라도 안에서 뛰쳐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몸을 문 옆으로 붙이더니 손만 뻗어서 조심스레 열었다. 조심성은 많아서 손해볼 건 없으니까.

“……아까와 똑같다.”

“그럼 어서 저들을 쫓아가지.”

“둘 다 잠시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명은 남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용사,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다만 힘들다.”

의식을 잃고 있는 사람을 홀로 두기엔 위험하다.

내 말에 현자가 가로로 고개를 저었다.

“누가 남을 거지? 마나를 썼다가 자칫하다간 아이르의 추격을 받을 수 있는 너, 아니면 나?”

둘 다 곤란하다.

직감적이지만 아이르를 만났다간 무슨 큰일을 당할 느낌이었다.

그걸 무시하기엔…. 나는 성검을 성자를 통해 봉인하며 남을 돕다가 스스로마저 위기에 빠트리는 건 더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뭐, 관성이라도 있는 것인지 가끔 튀어나오려 할 때도 있긴하지만 기본적으론 그렇단 이야기다.

그럴 듯한 이유가 없는 이상, 더이상 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저들을 쫓아가서 무슨 일이 벌어질 줄도 모르는데 뺀질거리는 도둑놈을 남길 순 없다. 지금 당장은 믿을 건 저 녀석밖에 없으니까.”

“자, 자, 자네! 지금 나를 믿는다고 했나?!”

현자가 인상을 찌뿌리며 말을 이었다.

정말 말하긴 싫지만 말할 수 밖에 없다는 투였다.

그러자 대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자 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만, 너도 듣지 않았냐며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그래 나도 들었다. 맨날 도둑놈 도둑놈 노래를 부르던 현자가 설마 그를 믿는다는 말을 할 줄이야.

마치 개와 원숭이가 이제부터 친구라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있을 수 없다는 거다.

옆구리를 쿡쿡 찌르던 대도는 내가 별반응을 하지 않자 귀를 후비기 시작했다.

“용사, 자네가 말이 없는 걸 보니 내가 늙긴 늙었나보군. 환청을 듣다니. 더 추해지기 전에 은퇴하길 잘했어.”

“아니, 나도 들었어. 워낙 충격적이어서….”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고? 더더욱 은퇴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두 놈 다 시끄럽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놓칠 거다. 어쩔 거야? 빨리 결정해.”

현자가 얼른 결정을 하라는 듯이 나를 보며 외쳤다.

“쫓자.”

나는 대답하며 양팔을 내밀었다.

“……뭐하는 거냐?”

“뭐긴, 까먹었어?”

나는 한쪽 발을 최대한 들었다 올렸다.

기껏해야 무릎팍까지 밖에 올라오지 않는 발.

동시에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르의 특제 족쇄가 내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현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빨리.”

“끄으으응…!!”

*

촌장, 레반은 지금 자신에게 덮쳐온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던가. 순탄했던 인생이 어쩜 이렇게 망가질 수가 있느냔 말이다.

그는 원래 이런 산중에 처박힌 마을의 촌장 따위가 아니었다.

고위 귀족.

아름다운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대도시의 지배자.

……의 사생아.

원래라면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하는 몸.

그러나 그에게는 출중한 상재(??)가 있었다.

그렇게 가문에 정식으로 입적했다.

그런데 그의 친아비에게는 배가 다른 형제가 존재했다.

아비의 정식 후계자였다.

자신보다 한 살 어린 그 멍청이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단 한단어로 요약 가능했다.

개차반.

행실이 썩 좋지않은 놈을 양과 음으로 밀어내고 마침내 소영주 자리를 거머쥐었을 때.

[꺄아아아악! 몬스터다!]

[우린 끝장이야! 저 많은 몬스터가 도대체 어디서…]

[군은 어디서 뭘하고 있는 게야?! 에이이잇! 나를 지켜라! 나를 지켜! 내가 지금까지 낸 세금이 얼만 줄 아느냐! 너희 천것들과는 다르단 말이다!]

[이 미친 놈은 뭐야! 꺼져!]

[으아아악!!]

나라가 망했다.

그들의 군대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러나 몬스터의 외향을 한 군대를 상대하는 방법은 몰랐다.

그들의 군대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러나 전술·전략을 쓸 줄 아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방법은 몰랐다.

그들의 군대는───

그들의 시민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동쪽에서 오는 적을 피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서쪽으로.

죽음을 피해 떠나가는 피난민들 속에는 레반도 섞여 있었다.

산다!

살고 싶다!

살아남고야 말겠다!

그러나 끈질긴 적들의 추적은 피난민들의 행렬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레반의 바로 옆에서 같은 처지의 사람이 덮쳐져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고서 그저 도망쳤다. 다음에는 내가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그러나 애석하게도 외면의 대가를 치룰 날은 빠르게 찾아왔다.

마기의 영향을 받아 통상의 1.5배는 거대한 [아이언베어].

그 강대한 폭력 앞에서 레반은 눈을 꼭 감았다.

단 한방으로 끝내주길 바라며.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끝은 오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레반이 슬며시 눈을 떴을 때, 놀라운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괜찮으세요?]

아직 젖살이 덜 빠진 청년.

깊게 베인 목에서부터 선혈로 분수를 뿜으며 쓰러지는 [아이언베어].

휘릭 피를 털어내고 눈부시게 빛나는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는 젖살이 덜 빠진 청년.

[다, 당신, 아니. 아니지. 귀하께서는 누구, 십니까?]

[겁먹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화의 말미에 나왔다는 구세주가 이러했을까.

[저는 용사, 당신들을 지키기 위해 왔습니다. 안심하세요. 이제부터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드릴테니까요.]

그 순간.

동이 터오는 하늘을 등지고 선 그를 보았을 때, 레반은 그에게 경도되었다.

“……레반!”

꿈꾸듯이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보던 레반에게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부셨던 과거가 저멀리 달아나버리고 되돌아온 현실의 눈앞에 보이는 건 웬 사내의 얼굴이었다.

“……폴?”

친절하고도 순수한 상인.

징발과 징병을 피해 도망친 자들을 위해서 이 먼곳까지 친히 찾아와주는 친애하는 폴.

상재로 능력을 증명했던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망설임없이 ‘호구’라고 불렀을 그가 레반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그래, 나야. 다행이야. 이제야 정신을 차렸군!”

폴은 감격한 듯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갑자기 왜 저러지? 그나저나 벌써 폴이 올 시기가 된 건가.

아니다.

“자네가 왜 여기있나?”

“그건 내가 할 소리일세! 도대체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사람들은 다 어디갔고?”

이건 또 무슨 영문 모를 소리를.

산골에 처박힌 마을에 일이 있긴 뭐가 있겠어.

기껏해야 누가 발이 삐었네, 씨암탉이 슬슬 알을 못 낳네.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이나 벌어지는 곳에서.

그보다 사람들? 그들이 자리를 비울 일이 뭐가 있나.

그 썩을 마왕 놈이 죽었다는데 축제 준비라도 하는 건가?

이런 바보같은 사람들 같으니.

사정이 어찌됐던 폴이 왔는데 마중 하나 안 갔단 말인가.

그런───.

어.

“……그들이 데려갔어.”

“그들? 그들이 누군데 이러나!”

“나는… 몰랐지. 설마 그들이 우리들 사이에 섞여 있을 줄은.”

“레반? 괜찮은가?”

“십여 년을 같은 마을에서 먹고 자고 하며 더불어 살았는데.”

“레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 하지만 괜찮네, 폴.”

레반은 바로 앞의 나무를 쓰다듬었다.

“수호목이 멀쩡하지 않은가.”

“수호목…? 고작 수십 년도 안된 이 나무가 말인가?”

“그래. 아주 고귀한 나무지. 자네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거야. 나만의 비밀이라네.”

고귀한 나무?

주민들이 다 사라진 마당에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레반.”

“왜 그러나. 폴.”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지금의 자네가 정상으로 보이진 않아.”

“나는 지극히 정상이라네, 이 친구야.”

언제나 이지적이던 레반의 변모를 폴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뒤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흘끗 보니 세 사람이 이쪽을 보며 서 있었다. 그 중 두 사람은 폴이 위험에 처했을 때 도와준 사람이기도 했다. 저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폴은 속으로 결정했다. 그들은 용병이니 대가를 넘치도록 준다면 이번 일을 받아들여 줄 것이다.

“레반, 저 사람들이 보이나?”

“……외지인? 자네. 자네말고도 외지인을 데리고 왔나?”

“그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곳에 오지 못했을 거야. 그들은 울프팡을 처치해줬지.”

“제법 뛰어난 실력을 가졌나보군.”

“그들에게 의뢰를 하게. 나도 있는 것 전부 털어서 보수를 준비하겠네.”

“무슨 소린가. 수호목이 멀쩡하다니까?”

가냘파보이는 나무가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이 끌어앉는 레반.

폴은 그에게 최대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애썼다.

“지금 자네에게 필요한 건 이런 마음만 먹으면 아예 통째로 몸채를 부러트릴 수도 있는 나무따위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야!”

“말 조심해! 수호목을 어느 분께서 주신 줄 알고 그러는 거야?”

레반은 당당하게 그 이름을 외쳤다.

“무려 용사님이 내게 주신거야! 그 용사님이! 씨앗을 심고 기르라고 하셨다고! 그러니까 문제 없어. 그럼 수호목만 멀쩡하면 용사님께서 나타나 우릴 지켜주실 테니까!”

*

‘그렇다는군.’

‘그렇다는데.’

‘……난 식목일 캠페인을 벌인 적이 없어!’

당당히 나를 큰 소리로 부르짖는 노인 앞에서 나는 간만에 뒷머리가 땡겨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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