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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36화 (36/45)

〈 36화 〉 8. 사교(2)

* * *

신앙은 의외로 사소한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누군가가 곤경에 빠진다.

그런 누군가를 돕는 또 다른 누군가.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맺어진다.

신앙이란 그 관계에 초월적, 관념적 존재가 새로이 엮이는 것이다.

처음으로 그것을 마주한 지성체는 그것을 ‘신’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이후로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시야로 신을 규정하려 했다.

전쟁의 신, 가뭄의 신, 천상의 신, 지옥의 신, 비의 신, 산의 신, 강의 신, 태양의 신, 달의 신….

그러나 그것은 반만 맞는 것이다.

신이라고 다 같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가 시작될 때부터 존재해왔던 신, 선천신.

지성체의 믿음에서부터 태어난 신. 후천신.

선천신은 하위 존재인 지성체들이 뭐라 떠들든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소통은 서로 주고받아야 진가를 발휘하는 법.

신관들의 마음이 어떠하든 신이 별 관심이 없는지라, 선천신을 모시는 본전(??)은 신령의 강대함에 비해 세가 약하다.

그러나 완전히 잊혀지진 않고 명맥을 이어간다.

반면에 후천신은 지성체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태생부터가 하위 존재로부터 비롯되어서 그런지, 상위 존재여도 완벽히 자유로울 순 없다.

대신에 후천신은 지성체들에게 관심이 아주 깊다. 그런지라 후천신을 모시는 본전은 세가 확연히 남다르다.

그들은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다.

더많은 신앙을 받기 위하여.

지성체들은 신앙을 보낸다.

신은 이에 마땅한 기적을 내려준다.

“카카카카카…!”

그런 순환의 고리에 주목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달리 기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램을 갖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원할 뿐이었다.

오로지 그들만을 위하는 그들의 신을.

저급한 욕망을 그대로 들어줄 신을.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은 신을 만들기로 했다.

신화를 모방하고 섭리를 모욕하는 그들을 일컬어.

“…….”

“크카카카……!”

사교라 한다.

“어리석…구나. 거짓된 표상을 따르는 자들이여…. 그대들을 위한 그대들만의 멸망이 찾아왔었거늘.”

그리고 그 사교의 주교는 입가에 피를 흘리며 마지막 숨을 색색 몰아 쉬고 있었다.

“이를 역리로써 거부하고 진실한 신성을 따르는 우리를 다시 박해하는가….”

팔다리가 꺾인 채로 널부러진 그는 앞에 서 있는 남자.

근육질의 몸을 품이 넉넉한 사제복으로 가린, 비올레트 사제를 붉게 물든 눈으로 노려보았다.

어딜 너따위가 날 내려다보냐는 듯이.

하늘을 찌릴 듯한 건방짐을 참아준다는 듯이.

그 시선에도 비올레트 사제는 오연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제 3자가 보았더라면 잘 만들어진 목상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칵, 과다출혈로 새하얗게 물든 얼굴에 순간 핏빛이 돌았다.

“…그러나 우리는 관대하다. 따라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도록 하지. 진실된 가르침을 따르라.”

그때였다.

비올레트 사제가 움직였다.

그는, 그들의 신이 오기라도 한 것인지 황홀한 표정으로 주절대는 사교 주교에게로 몸을 숙이더니.

“그분들을 모시고 진정한….”

“닥쳐라!”

목을 꽈악 틀어쥐었다.

숨이 막힌 사교 주교는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비올레트를 어떻게든 떨어트리려 노력했다.

“컥! 컥!”

그러나 그 노력은 보답받지 못하고 사교 주교의 몸이 부르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사교 주교의 신체를 들어올린 비올레트 사제는 분노와 경멸로 일그러진 얼굴을 그에게로 들이밀었다.

“거짓? 멸망? 그딴 거 모른다! 네놈들의 신을 따르라고? 거절한다!”

비올레트 사제의 손은 악력기마냥 점점 조여들었다.

사교 주교의 동공이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무지하고 무력한 이들에게 기생하는 거짓신 따위는 우리가 죽일 것이다!”

“이, 런 건방진……! 끄르륵…. 끄륵.”

“악독한 배덕자 놈들.”

풀썩.

더는 숨쉬지 않는 쓰레기를 내다버렸다.

그 사이 자신 이외의 형제자매들은 이미 일을 끝마치고 한창 뒷정리에 열심이었다.

그들에게 합류하려던 비올레트 사제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리도 푸른 하늘을 참으로 오랜만에 보아 마음이 부풀어 오르기 마련인데, 늙은이에게는 벅찬 일만 일어나는구나.

그 잠깐의 상념은 누군가 걸어오는 것으로 끝이 났다.

슬며시 감은 눈.

밀빛과도 같은 머리칼.

“성녀님!”

그린듯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누군가는 바로, 성녀 그라시아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비올레트 사제. 여전히 호쾌한 행동력. 감탄했습니다.”

“아하하하하하! 대단치 않은 일입니다.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겁이 사라져서 이거야 저도 제 자신이 곤란할 지경입니다!”

비올레트 사제가 호쾌하게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얼마 가지 않아 그쳤다.

“그나저나….”

비올레트 사제는 전장을 돌아보았다.

결코 바라지 않았던 철과 피의 냄새가 진동을 하는 풍경에 얼굴을 굳힌다.

“참으로 빌어먹을 일입니다. 이제껏 볼장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인간 말종들을 다시 볼 날이 올 줄은 몰랐으니까요.”

잠시 숨을 고르려는 듯, 잠시 기다린 성녀가 입을 열었다.

“…이 또한 그분들의 안배이겠지요.”

“크후후후. 그렇다면 성녀님께서 저희들을 이끌고 교단에서 나오자마자 이놈들이 설치기 시작한 것도 안배로군요. …어이쿠. 말이 조금 이상했군요. 이것 참 늙으면 헛소리만 늘어서….”

“괜찮습니다. 비올레트 사제의 진실된 마음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속이 너무 뻔히 보이는 탓에 웃긴다는 듯, 성녀는 조그맣게 웃었다.

얼마 안 있다 웃음을 멈춘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쾌승이었다.

성기사단의 단원들 중에서 죽은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신앙적 용맹을 뽐낸 것도 있지만, 몰래 나온 탓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성녀가 후방에서 지원에 전념한 덕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녀는 제 성과를 뽐낼 생각따윈 요만큼도 없었다.

전사한 이들은 없었어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단원은 있었기 때문이다.

전부 다 자신의 미숙함 때문이다.

…그런 자책같은 상념은 버린지 오래였으나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리를 마친 기사단원들은 자리를 옮기지도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어. 오늘 빵은 이전의 빵보다 부드러운데?”

“그래? 그럼 잘 먹을게.”

“야, 얌마! 이리 안 내놔?!”

딱딱하게 굳은 검은빵과 약초 이파리를 생으로 씹어먹는 성기사단.

그들은 볼이 가득 차도록 복스럽게도 먹었다. 오래 전에 맛본 만찬을 기억 속에서 더듬어 즐기면서.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애써 숨기고 있는 피로감이 있었다.

하루이틀 만에 쌓인 것이 아니다. 지난 세월 고난을 겪으며 쌓인 퇴적물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유례없는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것을 잠시 잊게 하려, 성녀 그라시아가 입술을 열었다. 화창한 햇살이 순결한 여인을 찬란히 축복하고 있었다.

“그 이름은 고난입니다. 전 대륙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길을 잃고 헤매며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 고난에 하루라도 빨리 모든 이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되찾아주고 싶은 마음이 점점 간절해집니다. 저 개인으로도 손에 쥔 병장기를 이제 그만 놓고 성서를 들고 성가를 낭송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되돌아갈 순 있습니다. 허나 그것은 타협이라는 이름의 태만일 것입니다.”

성녀의 입술에서 흘리듯 나오는 말들은 조그마한 북소리처럼 들렸다.

고요히 울려퍼지는 북소리가 좌중의 이목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그라시아가 한 마디, 한 마디 외칠 때마다 피로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신적 능력을 사용하는 성자와는 궤가 다른 능력.

어쩌면 가장 성직자라는 본질에 어울리는 힘.

“그 고난에 잠시 머리를 숙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며 입을 다물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러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성녀님.”

“삿된 것들을 불사르고 바른 진리를 드러내야하기에!”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힘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지쳐가는 성기사단에게 성녀 그라시아가 부르짖었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들은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오랜 숙적이 돌아왔음을. 주어진 소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기사단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된 미래로 향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없는 무수히 많은 형제자매분들이 지금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지만, 예전의 찬란했던 시기로 돌아가는 것은 요원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특한 무리가 있기에! 신성한 의무와 힘을 가진 우리들은 결코 포기해선 안됩니다!”

성녀가 꽉 쥔 주먹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를 위해서라면 저는 언제나 그대들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수백의 기사단원들은 전투적으로 식사를 개시했다.

그 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던 성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색 단원을 보았다.

“성녀님!”

“무슨 일이죠?”

“저희가 놈들을 습격하기 전에 놈들의 일부가 빠져나간 흔적을 포착하였습니다!”

“뭐라?!”

곁에서 성녀가 하는 양을 보고 흐뭇하게 미소 있던 비올레트 사제가 경악했다.

수색 단원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근처에서 탐문한 결과, 놈들이 향한 정북쪽 산중에 한 마을이 있다고 합니다!”

“그놈들이 그곳으로 향한 건가? 이런 바보같은 실수를! 성녀님!”

“서둘러 움직여야겠습니다. 더이상 사특한 자들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그사이 돌아가는 공기를 읽은 기사단원들은 재빨리 식사를 마쳤다.

허겁지겁먹었지만 그들은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다 먹을 동안 일이 터지지 않은 것이 어디겠는가.

전쟁 와중에는 밥도 못먹고 연달아 전투를 벌인 적도 있는 베테랑들은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비올레트 사제가 말 두마리를 끌고 왔다.

하나의 고삐는 성녀에게 넘겼다.

그녀의 마차를 타고 가기엔 사안이 급박했다.

“하앗!”

단번에 뛰어올라 안장에 안착한 성녀가 양발로 채근하자, 훈련이 잘 된 말은 바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구!

가장 선두에서 나아가는 그녀의 뒤편으로 수백의 말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따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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