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37화 (37/45)

〈 37화 〉 8. 사교(3)

* * *

하늘에 달빛 한 점 걸려있지 않은 밤이었다. 시리고도 눅눅한 공기가 폐부에 깊숙히 스며들어오는 시간이었다. 인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산중마을에는 적막함만이 가득 흘렀다. 찌르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정적을 조용히 일깨우는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끼…….

문이 열리면서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에 잠시 놀란 듯, 문을 열던 누군가는 멈춰섰다. 더는 소음이 나지 않도록 신중해진 누군가는 이전보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는, 문 너머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들키면 곤란했다. 적어도 아직은.

…바그락. 바그락.

누군가의 행동은 은밀했다.

자갈로 포장된 길만 아니었더라면 알아차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누군가는 자욱한 안갯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아침 댓바람부터 마을 전체를 품에 끌어 앉고 있던 안개는 밤이 되어도 물러갈 생각이 요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누군가는 익숙하게 발을 옮겼다. 마치 눈을 감고 있어도 지장없다는 듯이.

마침내 누군가는 목적한 곳에 다다랐다.

마을 뒤편. 숲이 시작되는 그곳에는 또다른 이가 있었다.

산중마을의 촌장이었다.

레반을 찾아온 누군가는 나무 표피에 침을 줄줄 흘리고 있는 그를 보며 애석해했다.

왕년에는 제법 똑똑한 남자라고 들었다.

권력욕과 출세욕 또한 누군가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강했다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저 치매걸린 노인이다.

잠들어 있는 모습에선 예전의 명석한 모습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재밌는 건 저 ‘수호목’의 정체다.

저치가 저리도 소중하게 여기는 수호목의 정체는 그저그런 사과나무다.

그것도 나무의 품종이 썩 좋지 못해 가축에게나 먹이는 용도로나 쓸 법한 것이었다.

과수원에선 과실로도 취급하지 않는 하품 중의 최하품이라는 거다.

그러한 저급한 것을 용사가 준 것이라며.

성인 남자의 허리둘레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어린 나무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제 자식마냥 애지중지하는데, 웃음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던지.

잠들어 있는 레반의 앞에서 멈춰서 허리를 숙였다.

짙은 그림자에 가려진 얼굴은 뿌듯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안타까운 모습도 더는 없다.

앞으로 그는 달라질 것이니까.

독수(?手)를 뻗으며 누군가는 생각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분명히 그렇게 여겼다.

“혹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어?”

“……?!”

등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훌륭한 말이라고 생각해. 뭔가 외골수적이면서도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적인 느낌이 들잖아.”

미행이 있었다.

……대체 누구지?!

나도 알아채지 못하게 몰래 뒤따라왔다고?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누군가는 조각상처럼 굳어버렸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나는 내 갈길을 가겠다! 뭐 이런 느낌? 한낱 머저리처럼 미숙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인용하기 딱 좋을 정도야.”

저벅. 저벅.

등 뒤에서부터 들려온 인기척은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발소리에 맞춰 온몸을 긴장시켰다.

저벅.

발소리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멈춰섰다.

누군가는 분명히 그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깨달았다.

“모든 걸 잃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그래서 그 씨앗을 줬던 거야.”

“그러하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사려 깊은 자로구려. 그 이방인은.”

“…이방인?”

“호오. 듣기 불편한가 보구려. …방금 전의 말도 그렇고. 아무래도 내 짐작이 맞다면. 장, 당신은 용사를 만나본 적이 있나보오.”

누군가의 물음에.

울프팡을 해치울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며 눈치도 빠른 편으로 보였던 용병 장, 본 정체는 용사인 그가 대답했다.

“모르는 사이는 아니라고 하면 답이 되겠어?”

“…제법 놀랐소. 설마 했는데 진짜라니. 그렇다면 당신은 실력이 제법 뛰어난 용병이 아니라, 아주 뛰어난 용병이겠소.”

“그 말에 따르면 자긴 사람을 가려서 사귀지 않는다던데.”

“사려가 깊은 것도 놀라운데 친교를 나눔에도 거부감 따위는 없다라고 이해했소. 으음, 이거 괜히 물어본 것 같소. 듣고 있자니 꼭 한번은 만나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은데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게 너무나도 아쉽소.”

실로 아쉽다는 듯, 누군가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졸지에 죽은 사람이 되어버린 용사는 순간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그가 죽었다고 누가 그래? 그는 그냥….”

“사라졌을 뿐이라고?”

누군가는 혀를 끌끌 찼다.

그러더니 말꼬리가 늘어지며 누가 들어도 비웃는 투로 말했다.

“장, 장. 장. 이제보니 용병치고는 꽤나 순진하시오. ‘신들의 대리자인 용사는 제 소임을 마치고 이만 초야로 물러나기로 했다’는 주장을 그대로 믿고 있을 줄은.”

“그게 사실일 수도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누군가는 용사의 말을 단번에 일축했다.

“본인은 비록 용사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의 행보는 주목하고 있었다오. 본인이 판단한 그는 대단한 탐욕스러운 ‘인간’이었소. 제 품은 한정되어 있는데 마치 한정이 없는 듯이 끌어앉으려고 하는 그런 행동들에서 그의 본질을 읽어낼 수 있었다오.”

“…….”

“단번에 부정하지 못 하는군. 이거 본인의 생각보다 당신은 용사와 가까운 자인가 보구려.”

“말 돌리지마. 지금 중요한 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상대는 화법이 능숙한 상대였다.

저도 모르게 듣고 있으면 끌려들어갈 정도로 혀를 갈고 닭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로는 용사를 홀릴 순 없었다.

용사가 말했다.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전부 어디로 갔지? 보부상 폴.”

문득 불어온 차가운 밤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등을 돌린 채로 대화를 나누던 누군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베품의 여신의 신도.

그 신앙에 따라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필품 수급이 어려운 오지의 마을을 골라 찾아다닌다던 마음씨 좋고 순진한 상인.

“진부하지만 일단 묻도록 하겠소. 어찌 알았소?”

“상인이라면 팔 물건 정도는 들고 다니는 게 좋을 거야.”

“…이런 실수했군. 평소답지 않았어. 그나저나 일행에게 끌려다니는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

“흠. 모르는 척 해주길 바란 건 너무 무리한 기대였나보오.”

마침내 마주한 그는 이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본인은 바빌론의 대탕녀를 신봉하는 여섯 필두 중 하나. 이반 폴나레프라고 하오.”

그건 마치 무언가의 신념에 심취한 광신자의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말투는 너무나 이성적이라 오히려 이질감이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갑작스럽지만 제안을 하나 하겠소. 장, 당신── 참된 진리를 따를 마음은 없으시오?”

“지금 그런 제안을 할 분위기였던가?”

“누구에게나 이런 제안을 하지 않소. 너무 성급히 일을 처리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

“그럼에도 이러는 이유는 그만큼 당신이 뛰어나기 때문이오. 장, 당신은 뛰어난 인재요. 정말로.”.

보부상 폴, 아니.

바빌론의 대탕녀를 모시는 여섯 필두 중 하나, 주교 이반 폴나레프는 뱀처럼 속삭여댔다.

“우리를 따르시오.

거짓신들을 내세우고 아랫사람들을 등쳐먹기에 열을 올리는 무리과 그와 결탁한 지배자들을 싸그리 몰아내는 일에 한손을 보태시오.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보는 역꾼으로써 제 2의 인생을 살아보지 않겠소?”

용사는 대답했다.

“좆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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