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38화 (38/45)

〈 38화 〉 8. 사교(4)

* * *

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용사는 왜 폴을 의심하였고 뒤를 밞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말대로 폴, 이반 폴나레프의 짐을 뒤져서 알아낸 것인가.

그의 정체는 상인이 아니라고?

그건 아니다.

짐을 뒤져본다는 것은 용사에게 있어서 확신을 확정으로 바꾸기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왜 폴을 의심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의심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굳이 하나부터 열까지 따져본다면…

그래. 처음부터 수상했다.

이를테면 예능 프로에서 자주 보였던 암막 상자에 비유할 수 있겠다.

프로그램에 섭외된 출연자들에게 내부가 가려진 하나의 상자가 놓인다. 사회자는 그 안에 어떠한 것이 들어가 있으며, 그것은 무생물일 수도 혹은 생물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출연자들은 저들끼리 호들갑을 떨어대며 상자 안의 물건에 대해 추리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상자 안에 손을 넣어보기 전까지는 구체적인 이미지 따윈 없으며, 아무리 사실적인 추리라도 그냥 사실일지도 모르는 것이지 사실은 아니며,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결국 상자에 손을 넣어봐야 한다.

출연자들은 상자 안의 물건을 만져보려는 과정에서 인상을 찡그리거나, 헛웃음치거나, 무서워하거나.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들은 암막상자 안에 어떤 무서운 것이 도사리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겉과 달리 속내는 다르다.

상자안의 무언가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이 상자안에 굶주린 호랑이를 넣어놨겠는가, 치사성의 독사를 넣어놓았겠는가. 결국 방송되는 프로그램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호랑이? 독사? 말도 안된다.

결국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실은 안전하다는 건 ‘상식’이다.

…그래. ‘상식’.

의도한 바는 모르겠으나, 폴은 ‘상식’적이지 못한 행동을 보였다.

대륙의 치안은 역대급으로 좋지 않다. 도적 떼가 창궐하고, 토벌당한 마왕이 이끌던 군세의 잔당이 날뛰며, 근 수십 년간 줄곧 받아온 마기의 영향으로 감각에 날이 세워진 몬스터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하다.

즉, 혼자 다니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거다.

지금 세상에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 나름대로 이해하는 머리가 다르다지만, 이해하지 못하면 몸으로밖에 알려줄 방도가 없으며, 안타깝게도 그리되면 십중팔구 다 죽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런 시기에 홀로 나다니는 이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겠다.

스스로의 실력에 어지간히도 자신이 있거나.

스스로의 간을 배밖으로 빼낸 어지간히도 미친 놈이거나.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눠보며 파악한 결과, 폴은 후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전자. 전자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이어지는 사건에서 보여준 폴의 반응 또한 그 의심에 불을 붙였다.

용사는 폴을 관찰하면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다나라는 여인의 발견. 주민들의 실종. 실성한 듯한 촌장.

당황하고, 경악하고, 낙담하는 그 모든 반응들이.

너무 틀에 박혀있지 않나라는 느낌을.

결국 의심은 확신이 되었고, 확신은 사실이 되었다.

“장, 그대의 태도가 너무 매몰찬 것 같아 슬프오.”

이반 폴나레프가 말했다.

자애롭게라도 보이고 싶은 것인지 사뭇 다정한 목소리였다.

“헛소리도 작작 지껄여야지 들을 마음이라도 생기지 않겠어.”

“본인의 진심을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당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소만.”

이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장, 그대의 심정을 십분 이해토록 하겠소이다. 본인 스스로도 너무 성급했다는 걸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오.”

“그보다 대답을 아직 못 들었는데. 여기 살던 사람들 다 어디갔어.”

“음?!”

그러자 이반은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굴었다.

“본인이 그걸 왜 대답해줘야 하는지는 차치하고도… 설령 곧이곧대로 말해준다고 한들 믿을 수 있으시겠소?”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야. 다만 이런 이야기는 해줄 순 있어.”

용사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만약에 사라진 사람들이 모두 무사하고 그들의 해방을 솔직히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모른척 해줄 수 있다는 그런 내용의 이야기야.”

“눈을 감아주겠다?”

이반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끅끅거리며 웃었다. 그의 입장에선 난생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아니, 들어보긴 들어봤다. 단지 이전의 그것들은 협박투였고 지금은 무언가 다른 울림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최근에 들었던 말들 중에 가장 솔깃한 이야기로구려. 솔직한 심정으론 당장이라도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오. 특히나 타협한다는 부분이 더욱 그렇소. 헌데 말이오.”

이반은 자신감이 넘치는 듯 턱을 꽂꽂이 치켜들었다.

“제안이라 함은 강자만의 특권이오. 보다 우월한 자가 보다 못한 자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

이반은 가소롭다는 듯이 한껏 톤이 올라간 말투로 말했다.

담담한 눈길의 용사를 한없이 오연해진 시선으로 내려다본다.

“헌데 본인에게는 그대가 강자로 보이지 않는다오. 유리할 때 협상치 않는다는 건 상식이오.”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 네가 정말 유리하다고 생각해?”

“다른 자들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한참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요. 그대의 동료인 발장이야 그대처럼 숨겨진 실력자겠지만, 허우대만 멀쩡한 노인은 영 쓸만해보이지 않았거든.”

선량한 상인의 탈을 벗고 사특한 미소를 얼굴에 띄운 폴은 이빨이 드러나도록 웃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는 듯이 목을 좌우로 꺾는다.

자신감인가 오만함인가.

이대로 두고 보면 썩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듯 했다.

하지만 용사는 움직이지 않고 아무렇게나 서 있었다.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볼 뿐 바로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자신감인가. 오만함인가.

“실력이 뛰어나다곤 하나 용병은 용병.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를 이길 순 없다오.”

훤히 드러나던 이빨의 틈새가 열리고 붉디붉은 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음과는 다른 이색. 그 위에는 온전한 보석에서 떨어져나온 조각 같은 게 올려져 있었다.

거무튀튀한 검보랏빛 광채를 뽐내고 있는 것을 본 용사의 얼굴에 순간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파편?!’

“허나 기분은 좋군. 좋소. 본래 목격자를 남기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번만은 봐 드리겠소. 본인의 제안을 다음에 만나기 전까지 고민할 시간을 드리겠다는 말이오. 그땐 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군.”

이반이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시야가 순식간에 검보랏빛 광채로 잠식되었다.

쿠르르릉.

그 순간 어디선가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 벼락.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검보랏빛이 존재해선 안된다는 듯이 요동쳐댔다.

그러나 그 확장세는 멈출 세도 없이 모든 것들을 잡아 삼킨다.

괴로워하며 반발하는 세상을 이질적인 색상이 침식한다.

이때 가능한 행동은 한정되어 있었고── 뒤이어 들려온 폭음이 모든 것을 잡어 삼켰다.

*

대도가 말했다.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진 않는군.”

“사교의 것들이 다 그렇지.”

거리를 두고 뒤따르던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사와 이반 폴나레프가 대치하고 있던 장소에는 흙먼지가 자욱히 일어나고 있었다.

“이성으로 돌아버린 미친놈들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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