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8. 사교(5)
* * *
수상쩍은 보랏빛이 번뜩인 뒤, 한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아스라이 동이 터오는 하늘 아래서 둘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주위에는 여전히 흙먼지가 가득 휘날리고 있었다. 계속 시야를 가리는 흙먼지가 거슬리는지 현자는 손을 휘휘 내저었으나, 흙먼지는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깝죽거리듯 현자의 주변을 더더욱 맴돌았다.
이에 굴하지 않겠다는 듯이 맹렬히 팔을 휘두르는 현자를 제지한 대도가 입을 열었다.
“일단 진정 좀 하게.”
“흥.”
현자는 짜증을 내며 손을 멈췄다.
그는 돌연 주위를 살펴보더니 무언가 불만인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용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저나 이 자식은 어디로 갔어.”
흙먼지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용사는 사라졌다.
예리하게 가다듬은 감각이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알려왔다.
“그 사이에 홀라당 내뺐을 리가 없을텐데…?”
“자네! 여기 와서 이것 좀 보게나!”
대도가 현자를 부른 건 그때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대도의 목소리가 멀리서 부르는 느낌이었다. 마치 텅빈 동굴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뭐, 뭐야. 네놈은 또 어디로 갔어?”
“여길세! 여기!”
퍼지는 듯한 목소리는 먼지구름 저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곁에 있던 대도는 어느새 그 안으로 홀라당 들어가버리고 만 것이었다.
현자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겹겹이 걸친 옷자락.
그 사이사이에 모래 먼지가 가득 낀 광경을 상상하자 몸서리가 쳐졌다.
“빨리 와보라니까!”
“…알겠어! 알겠다고!”
현자는 질색하며 발을 움직였다.
원래부터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던 자욱했던 안개와, 뿌옇게 올라온 흙먼지가 합쳐진 먼지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형용할 수 없는 감촉이 전신을 내달렸다.
현자는 그와중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가 혀에서 까끌까끌한 느낌이 들자 에퉤퉤 침을 뱉어댔다.
“이런 젠장. 이딴 식으로 먼지맛을 다시 느끼고 싶진 않았… 켁!”
그때 별안간 뒤에서 뻗어나온 손이 목깃을 잡아챘다.
숨이 턱하고 막힌 가운데 한심하다는 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까지 가나?”
“켁! 켁!”
“이런. 이런. 몸부림치지 말게나. 늙어서 그런지 힘이 예전같지가 않아! 그러다가 확 떨어지는 수가 있네.”
말과 다르게 쉬이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손아귀를 쥐고 흔드는 대도.
현자는 그걸 우악스럽게 잡아 뜯고선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그게 다행이었다. 순간적으로 앞발을 내디뎠는데 쑥하고 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뭐야, 이거. 구멍이 뚫려 있다고?”
시야를 가리던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자 땅에 나있는 거대한 구덩이가 보였다.
마치 땅에 칼을 대고 잘라낸듯이 휑하니 뚫려있었다. 밑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에 앞머리가 흩날렸다.
“지하동굴이로군.”
무섭지도 않은지 대도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서 냅둬봤드니만 이런 걸 꽁꽁 숨겨두고 있으니 그 태연자약한 태도도 이해가 되는군. 그의 정체를 들키지 않았으니 필요 이상으로 경계할 필요도 없었을테고.”
대도의 곁에 서서 같이 밑을 내려다보던 현자는, 돌연 땅에서 돌멩이를 집어 들더니 저 아래로 던져버렸다.
그러더니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딱.
“6초 정도.”
“약 170m인가. 상당히 깊군. 규모도 어지간한 동굴과는 차원이 다른 듯하다.”
“제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다면 마을 바로 밑에 이따만한 굴을 팔리는 없겠지. 천연인가.”
“자연이 제공해준 탈출로라.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군. 왕년엔 이런 통로를 자주 애용하곤 했었는데.”
젊을 적을 회상하는 노인과 같은 표정이 된 대도.
실제로 옛 전성기 때에 비해선 늙긴 늙었으니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누가 도둑놈 아니랄까봐 꼭 지같은, 쯧.”
그걸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현자는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 자식도 밑으로 떨어졌나?”
보이지 않는 용사의 행방을 묻는 말에 대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타의로 떨어진 건지 자의로 내려간 것인지.”
“그 녀석이라면 후자다.”
무릇 용사의 동료라는 호칭을 한번이라도 받아본 이라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뻔한 일이다.
이전에도 그러했듯, 따지기라도 한다면 내 나름대로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라느니 어쩌니하는 패턴으로 나오겠지.
마치 곰을 보러 서커스단에 놀러간 어린아이였을 용사의 심리를 훤히 읽혀 짜증났다.
짜증으로 일그러지는 하는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대도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자, 그럼 이제 어쩌면 좋겠나. 아래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무작정 내려가기에도 꺼려지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용사처럼 무지성으로 뛰어들기엔 우린 젊지 않아.”
“네놈이면 몰라도 난 젊을 적에도 그렇게 무모했던 기억은 없어! …아무튼. 우린 늘 하던대로 하면 되겠지.”
“좋아. 편하고 익숙해서 좋…… 자네 지금 뭐하나?”
막힘없이 흐르던 대기가 달라진 건 그때였다.
현자의 머리칼과 옷자락이 치솟았다. 동시에 막 동이 터오던 새벽빛 하늘의 저편에서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상공에서 머물기 시작했다. 검은 먹구름 사이로 번갯불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심상찮은 상공을 올려다본 대도가 설마하는 얼굴이 되었다.
“늘 하던대로. 그래. 늘 하던대로만 다 때려부수면 되잖아. 응?”
“이런 미친! 자네 돌았나?! 섬멸전 교리를 여따 갖다 붙이겠다고? 명색이 현자라면 이성적으로 좀 생각하려고 노력해보게! 그러다가 혹시라도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자식이 고작 이걸로 잘못 된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집어치워! 게다가 그 사교 놈이 기어들어갔으니 저 아래에 같은 놈들이 얼마나 깔려 있을지 모르는데 그걸 일일이 언제 처리하고 앉았냐?! 만일에 무슨 일이 생겨도 피하지 못한 놈이 잘못이다! ”
정신이 반쯤 나간 듯, 현자는 희열섞인 광소를 내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대도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그에게 외쳤다.
“충격과 공포와 깽판의 시간이다! 흐하하하하하!”
“사라진 주민들도 아래쪽에 있을텐데 이럼 어쩔려고 그러나!”
“……앗차.”
그 말을 듣고 뒤늦게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던 현자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섬광이 번뜩였다.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두사람의 간절한 바람을 무시하고 번갯불이 내리꽂혔다.
뒤이어 발치가 울렁거렸다.
막대한 충격에 대지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점차 진동의 세기가 커져갔다.
아래에선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반쯤은 계획적으로. 반쯤은 마음이 답답하다는 감정적으로 무작정 내질러버린 현자는 망연한 얼굴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망했다……!”
“망했다는 개뿔이! 빨리 움직여! 완전히 동굴이 무너지기 전에 아래쪽 상황을 확인해야 할 거 아니야?!”
자고로 예의바른 도둑이 좋은 도둑이다.
그런 신념을 가진 대도가 반존대를 집어치운 건, 반 오십년 만의 일이었다.
오죽 분통이 터졌는지 거칠게 현자의 뒤통수를 후려치기까지 하며 재촉했다.
그 재촉에 현자는 반강제로 구덩이로 향했고. 둘은 곧바로 칠흑같은 구덩이 아래로 몸을 던졌다.
*
이 동굴로 떨어진지 대략 삼십 분 정도 지났을 때.
나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우선 첫째.
“흐허허어어엉….”
레반이라는 이름의 촌장이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것이다.
이반 폴나레프의 수작질로 웬 땅바닥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나야 몇 번 허공을 발로 차면 벗어날 수 있었지만, 하필이면 그때 촌장이 저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발견해버렸다.
용사 노릇은 폐업이라고 이미 결정했지만, 사람이 앞에서 죽는 건 사양이었다.
별수 없이 벽면을 박차고 가속도를 붙여 추락한 결과, 촌장이 바닥에 부딪치기 직전에 겨우 잡았다.
나이스였다. 그 뛰어난 순발력을 발휘한 스스로에게 칭찬의 몇마디를 던져주고 싶을 정도였다.
“용사니이임 어디 계시나요오오 이 늙은이를 좀 살려주세요오오!”
그러니까 제발 오줌싼 상태로 내게 엉겨붙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둘째.
사라졌던 마을 사람들을 찾아냈다.
사실 촌장의 반응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마을 주민들을 찾긴 찾았으나, 그들은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마을의 책임자인데 충격이 컸겠지.
그런데 주민들은 누가 눕혀놓은 것이 분명한 형태로 누워있었다. 꼭 전쟁에서 사망한 전사자처럼 일렬로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은 그럭저럭이었던 컨디션을 나락까지 꽂아버리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목덜미에 손을 얹어보자 희미하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살아있지만 의식이 있는 상태는 아닌 모양이다.
“흐허허허어어억!!”
촌장이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내지른 건 그때였다.
돌아서자 그가 저런 과대한 반응을 보인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게 바로 셋째.
촌장님촌장님도어서우리와하나가되어요
기분좋아기분좋아하나하나
흐르흐르흐르흐르
흐히히히히히
사령계열 몬스터, 군체, 「백의 혼령」.
막대한 사상자가 죽은 전쟁터에서 사망한 자들의 혼령이 뭉쳐 나타나는 특이 몬스터가 나타났다.
솔직히 사령 계열은 위협적인 적이 아니었다. 아무리 성검이 없더라도 그걸 너무 오래쥐고 있던 탓인건지 아니면 적합자로서의 능력이었던 것인지. 내 마나는 빛의 속성을 강하게 띄었다. 그냥 별다른 기술을 쓸 것도 없이 마나만 방사하면 그냥 퇴치되어 버리는 게 사령계열이었다. 그래서인지 마왕군 간부들 중에서도 사령군단을 이끌던 놈이 가장 최약체였고.
다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백의 혼령」을 이루고 있는 건 사령이 아니라 생령, 살아있는 사람들의 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저걸 사령 퇴치하듯이 없어배리면 어떻게 될까.
가설일뿐이었지만 그다지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문득 모습을 감춘 이반 폴나레프가 생각났다.
그가 입에 물고 있던 ‘파편’도.
“그냥 모가지를 따버릴 걸 그랬나….”
그러나 기차는 이미 역을 떠나갔고 나에겐 투명화에 공중부양이 가능한 불법개조 자동차따윈 없었다.
나는 벌벌 떨고 있는 촌장을 등 뒤로 숨기며 「백의 혼령」과 대치했다.
*
한편 이반 폴나레프는….
“흐호헤하흐훗허허히해허!(그 용병자식 죽여버리겠어!)”
동굴 내부를 질주하며 피가 철철 흐르는 입에서부터 발음이 불분명한 말들을 외치고 있었다.
바로 전에 ‘파편’이 발동되며 시야가 가려진 한순간, 불현듯이 정면에서 날아온 돌이 입을 강타했던 것이다.
그 파워가 어찌나 강했던지 이빨들은 산산히 부숴지고 그의 올발랐던 치열들은 다시 원상복구가 힘들 정도로 망가졌다.
치과계의 화타가 와도 살려내지 못할 정도라고 하면 이해가 되겠는가? 그는 잠시 제 힘도 아닌 것으로 오만했던 대가를 받게 되었다. 물론 대가가 모두 치룬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흐하아아아아아!(으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