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40화 (40/45)

〈 40화 〉 9장. 얽히고 섥힌다.

* * *

“우린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이건 촌장이 외친 말이었다 그가 내지르는 절망적인 비명은 안타까웠었다. 불과 십분전까지는 그랬다. 벌써 32번째였다. 식스센스급 극적인 반전이라도 32번이나 돌려보면 지겹기 마련 아니던가. 32번이나 죽을거라고 외칠 동안 살아있다면 슬슬 저 레퍼토리도 포기할 때도 됐다.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적절하게 때를 맞춰 허리를 숙였다. 후우우우우웅, 큼지막한 반투명 손들이 지나가며 내는 파공음이 귓가에 초인종마냥 울려퍼졌다. 그렇게 날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반투명 손들은 동굴 벽을 때려부쉈다. 파편들이 이리튀고 저리 튀었다. 「백의 혼령」이 뿜어대는 막대한 프레셔가 실체없는 혼령임에도 실질적인 힘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었다.

상대하기 까다롭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사령을 상대해본 경험은 당연히 넘쳐서 가지고 있는 대처법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무수한 경험 중에서 이런 경우는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혼을 뽑아다가 사령계 고위 몬스터를 만들어내다니. 마왕과는 궤가 다른 이질이었다.

“흐어어억!”

촌장은 기절할 듯 기절하지 않는 묘하게 질긴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저런 놈들에게 초토화되고 살아남은 깜냥이라도 되나. 때문에 발버둥 치는 촌장의 뒷덜미를 잡고 옮기느라 힘이 두 배로 들었다. 안 그래도 양발에 묶여 있는 족쇄 때문에 거동도 편치 않은 마당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 업보가 돌아온 거라 불평할 거리는 못되지. 예전에는 각이 보인다 싶으면 무작정 들이밀고 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반 정도로 충분… 아니. 반의 반 정도면 충분했을 것 같은데.’

촌장의 비명소리를 뒤로하며 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다른 세상에서 온 구세주가 왠 종교 집단에 의해 구금되어 이용되고 있다고 소식을 들은 그들은, 무력으로 그 종교 집단을 쓸어버리고나서 발견한 정말 별 볼일 없어보이는 고등학생을 보고선 황당해했다. 신들이 자신들을 버린 것이 아니냐는 수근거림도 들었다. 한번 배신을 당하고 난 뒤에 그런 기조는 더욱 세력을 부풀렸다. 멋대로 자질을 입증하길 바라는 무책임한 시선들 앞에서 난 생각했었다.

일단 내 편을 만들어야겠구나.

무릇 인간이란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생물이라고 한다. 인간 관계. 사회란 그런 인관 관계의 연장선에서 이어지는 일종의 극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다스리는 방법을 두 글자로 뭐라고 하던가.

바로 정치다.

호구를 당하지 않으려면 개인보다는 집단이 단언코 유리하다. 속된 말로 정치질은 한국인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안부 인사와 함께 배우는 전 국민의 기본 덕목 중 하나 아니던가. 비록 세상이 달라도 사람 사는 곳이란 다 똑같다는 생각이 그 당시의 내게는 있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그들과 나 사이에 공통분모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었다.

그건 굉장히 심각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감정적인 이해관계에서 완전한 타인이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였다. 한고조 유방 아래의 한신마냥 굴러먹다가 팽당하지 않으려면 난 그 공통분모를 적극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단 말이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바로 ‘사랑’이었다.

연애 플래그 꽂기였다. 유력자의 친인척이라던가, 능력있는 이성들을 적극적으로 꼬셔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몸집을 ㅋ

‘막상 연애 플래그라고 꽂아놨더니 죄다 사망 플래그로 변한 건 기분 탓이겠지? 그래도 하나쯤은 남아있지 않을까? 죄다 아이르처럼 얀데레가 되어 있는 건 아닐 거 아냐. 아니겠지?’

그렇게 미래에 관해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투명한 손들의 공격을 피하던 그 순간, 나는 보았다. 한쪽에 뻥하니 뚫려 있는 동굴길을 말이다. 아무래도 지금까지는 보일만한 시야각이 나오지 않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훗차!”

나는 틈을 봐서 몸을 빼냈다.

물론 촌장도 잊지 않고 챙겼다.

­어디가어디가어디가

­가지마가지마놀자놀자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탁탁탁, 빠르게 달음질쳐 들어선 길목에서 나는 질주하기 시작했다. 「백의 혼령」은 언제까지고 추력해올 듯 하다가 어느 순간 선에 걸린 것처럼 멈춰섰다. 아무래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거리가 어느정도 멀어지고나서 멈춰선 나는 말했다.

“이봐요, 촌장님.”

정적. 촌장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까와 똑같다. 그는 홀로 뜻 모를 소리만을 중얼거리는 것만이 사명이기라도 한 듯, 간혹 죽을거라든가,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는 듯한 말들을 뇌까리고 있었다. 단지 달리는 도중에 목이 압박되서일까, 입가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흠흠.”

노인이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그래서 깨우는 방법들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책임감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사람들 때깔이 모두 좋던데. 잘먹고 살았는지 특별히 마른 사람도, 살찐 사람도 없었고. 하기야 근심이라고 해봤자 산골이라 물자 수급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 빼고는 외부보단 나았을테니 그럴만도 하겠네.”

“…….”

내 대단하다는 듯, 말투에 촌장은 멍하니 날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그가 완전히 돌아버리지는 않았다는 증거였다. 신체에 무의식적인 반응도 나타났으나 극미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대화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나는 조금 더 말해보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똘똘해보이는 아이가 있었지. 고목같은 머리카락과 녹음의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는데.”

“……로이안.”

조금 전의 촌장은 반투명한 인간의 모습이 수십이 겹쳐진 기괴한 것을 보고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무심코 시선은 한곳으로 쏠려 있었다. 그 시선 끝에 있는 건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던 아이였다.

“자식인가?”

“친… 피가 이어진… 건 아닌….”

“아이가 들으면 섭섭해하겠네. 자식이지?”

사람은 끔찍한 현실을 맞닥뜨리면 그 후에 무엇을 들이밀건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고자 한다. 인지부조화. 정신을 보호하려는 방어기제, 촌장의 정신을 깨운다는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그것을 튀어나올 틈도 주지말고 몰아붙여야만 한다.

“……그래.”

내 연이은 추궁에 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히 또렷해지는 초점은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증거일 터였다.

“로이안은 착한 아이야…. 히죽 웃을 때마다 보이는 덧니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무슨 느낌인 줄 알거 같네. 아이의 웃음을 볼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 띄면서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겠지.”

“그래, 맞아 그랬어…. 그리고 또… 아침에 허리가 아프면 귀신같이 눈치채고선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찾아와 주물러주기도 하고….”

“아이가 촌장님을 많이 좋아하나보네.”

촌장은 과거를 떠올리듯, 어딘가 먼 곳을 보는 것처럼 시선을 멀거니 두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회상만으로도 행복해보였다. 그러나 그건 이미 지나간 과거일 뿐, 촌장은 파멸을 향해 성큼 다가가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뭐하고 있는 거지? 당신 자식이 아파하고 있는 거 봤잖아. 별 같잖은 나무 따위를 붙잡고 수호목이라고 할 시간에 뭐라도 해야하는 거, 아니야?”

“로이안은 웃고 있었어….”

“당신에게는 그게 웃고 있는 걸로 보였나보군.”

촌장은 내 힐책에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곧 고개를 푸욱, 숙였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나, 난 알고 있어. 나같은 건 놈이 할 수 있는 건 제한되어 있다고. 저런 걸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날 이렇게 괴롭게 만드는 거냐고.”

“물론 당신도 할 수 있는 건 있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동굴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바짝마른 나뭇가지였다. 이건 자연적으로 동굴 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누가 갖다 놓지 않는 한 말이다. 너무 말라 부스러지는 나뭇가지를 들고서 척, 하고 촌장의 눈앞에 내밀었다.

“동굴 내부 지형 정도는 꿰고 있을테니 길 안내 좀 해보지그래.”

“…당신이 용병치곤 뛰어나다는 걸 나도 알아. 하지만 그들은 고작 용병 따위가 대적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자들이 아니야. 영세한 길거리 전도사 따위들과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정말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딴 건 말 안해도 알아. 어중이떠중이와는 격이 다르다는 것쯤은 눈치챘어.”

이반 폴나레프라고 소개한 그 남자. 그가 입에 물고 있던 유사 ‘파편’을 봤다. 파편은 굉장히 위험한 물질이었다. 그 조그만 조각이 만들어낼 수 있는 참상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 파장을 염려한 제국의 황태녀조차 남들에게 알리지 않고 파편의 조사를 개인적으로 부탁했다.

그리고 사교. 현자와 대도의 반응으로 보아, 내가 모를 뿐이지 어지간한 놈들은 아닌 것 같았다. 추측하건데 이전의 마왕군 포지션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단 하나 뿐이었다. 정말로 간단한 것이었다.

“그냥 나도 평범한 용병은 아니라는 거.”

힘. 지금까지 쏟아온 피와 눈물, 땀. 나는 그것들을 믿는다. 예전의 나는 동료들을 의지하고 의지받고 이끌어주고 이끔 받았지만. 마왕과의 마지막 싸움에서도, 언제나 그랬듯이. 최후의 최후에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실력이었다.

“그거 하나만 믿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