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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41화 (41/45)

〈 41화 〉 9장. 얽히고 섥힌다(2)

* * *

그를 처음으로 만났던 건 십 년 전의 일이었어. 당시의 나는 마을의 터전을 닦느라 바빴었지. 당시엔 움집 짓고 사는 촌락 수준이었거든.

이제와서야 돌이켜보건데,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사람들은 모두 인색했어. 또 이기적이었지. 타인의 말을 쉬이 믿지 않고 언제나 의심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지. 용병인 당신이라면 이해하겠지? 나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하기야 그럴 만도 했지. 내몰리고 쫓기는 데 지쳐 차라리 없어지길 바랐다. 이런 산골에서 만나 서로 들어맞지 않는 조각들 같은 사람들을 이어주는 건 그런 절망 같은 소망 하나뿐이었으니까.

이야기가 좀 했군. 아무튼,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사람들 앞에 나타났어.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촌부로 보이던 그는 신앙에 따라 흘러가는 보잘것없는 상인이라고, 이름은 폴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 근방에 도시가 생긴 지금도 발걸음하기 힘든 곳인데 당시에는 어땠겠나. 덕분에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었지.

……왜냐고?

우연이든 필연이든 외부인이 여길 발견했으니까. 그가 우릴 연합에 고발하면 끝장이었어. 연합이 내린 총동원령을 피해서 숨은 백여명의 사람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본보기로 처벌하기 딱 좋은 수였지. 우린 그를 붙잡아 마을 중앙에 임시로 만들어둔 감옥에 가둬놓게 되었어.

연합을 그렇게 두려워 할 필요는 없었을 거라고? 당신, 동료가 있었지? 그의 이름이 뭔가. …발장? 특이한 이름이군. 어쨌든 그가 정말 고생이 많았겠어. 용병이 순진한 면이 있다는 건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실물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마왕. 두려워하고 저주받아 마땅할 모든 요사스러운 마의 왕. 직접 본 적도 없지만 필경 그 악명에 걸맞은 존재일테지. 그런데 우리같은 자들에게 마왕은 바로 연합이었어. 총동원령이라니. 이 한 목숨과 가족, 재산. 모든 것들을 가져가겠다는 게 그들이 그리도 외쳐대는 대적과 무엇이 다른가.

그래서 도망쳤네. 여긴 그런 사람들이 만든 마을이고. 식량이고 옷가지고 모든 것들이 부족했지만, 무언가에게 목을 물어 뜯기거나 창자를 쏟아낼 위험이 없는 그런 생활을 고작 외부인 한 명 때문에 깰 순 없었어.

우린 그를 죽이려고 했어.

하지만 그는 우리가 자신을 죽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지.

갑작스럽지만 자네 혹시 아내가 있나?

음, 표정이 복잡한 걸 보니 대충 여자 관계를 알 법하군.

나는 평생토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난리 속에서도 어떻게든 사랑을 찾고 사랑을 하더군.

우리 마을에도 그런 부부들이 있었지. 그들 중에는 태중에 아이를 가진 한 쌍의 부부가 있었어. 둘의 사이는 매우 좋았지. 잉꼬부부였어. 이렇게 말하긴 조금 쑥쓰럽고 부끄럽지만 그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마음 속에 자그마한 희망의 불씨를 품고 있었네.

그런데 날이 좋지 않았던가. 아내가 아팠지. 우리가 기댈 건 나이에서 오는 경험 밖에 없었어. 가장 늙은이가 말했지. 때가 되지 않았다고 이대로라면 산모와 태아 모두 위험할 거라고. 귀중한 약이 필요하다고 말이야.

……그가 약을 갖고 있다고 알려왔지.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어. 우린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어떻게 죽일지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가 한 부부를 구하고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구한 거야. 정신이 들고보니 외부인에게 겁먹고 싸늘해졌던 스스로가 보였지.

결국 우린 그를 풀어줄 수 밖에 없었어. 그러지 않는다면 무언가 결정적인 선을 넘어버리는 기분이 들었거든. 모두 그 선을 넘고 싶어 하진 않았지. 그래서 그는 살게 된 거야.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그가 우릴 원망하지 않았던 거야. 역으로 앞으로도 이런 일이 벌이지지 않을 보장이 있느냐고 말하며 주기적으로 거래를 하자고 했지.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게 있나?

가지고 있는 건 몸뚱이 뿐이었지. 그는 뭐라도 주면 팔겠다고 말했고,

그의 말을 듣고 곤혹스러워 하던 사람들은 내게 답을 구했어. 내가 말했지. 약초라도 캐주자고 말이야. 이 근방에는 특이한 동식물들이 많았으니까. 그만큼 위험하긴 했지만 그런 것까지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동굴도 그러다가 발견한 거네.

처음에 발견했을 때는 야생동물이 살고 있는 줄 알아서 마을 내에서 힘 좀 쓴다는 장정들을 불러 모았지.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끝없는 동굴만이 펼쳐지더군. 데리고 온 사람들은 모두 실망한 듯, 투덜거렸지만, 내 생각은 달랐어.

유사시에 쓸 수 있는 훌륭한 피난처로 보였지.

마음을 먹은 나는 곧장 몇몇 사람들을 모아다가 내부 지도를 만들었어. 하지만 동굴 내부는 너무나도 깊었지. 그래서 위치를 구별할 수 있게 모종의 표시가 필요했지. 그래. 당신이 가리키고 있는 그 표시가 맞아. 눈이 꽤나 좋나 보군. 내가 만든 거냐고? 아니야. 만들 수는 있지만…. 일전에 우연찮게 봤던 용병 여왕이 이끄는 용병단이 그런 방법으로 표시를 하던 걸 그대로 가져온 거야. 설마 당신, 용병 여왕의 용병대 소속인가? …연은 있다니. 그 자신감이 이해가 되는군. 조금 믿음이 더해졌어.

음, 뭐라고? ……과연. 당신의 생각이 맞을 거야. 그는 이곳에 동굴이 있던 걸 알고 있던 게 틀림없어. 어떻게 알았을까. 짐작가는 게 너무 많아서 감도 잡히지 않는군. 교류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그는 외부인이었지만 우리 마을 사람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방금 멀리서 무슨 큰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무언가 어마어마한 번개가 치는 것 같은데. 어린 시절에도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자네가 말한 것처럼 어쩌다가 마을이 이 지경이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일테니까 말이야.

……오년전의 어느날, 일이 벌어졌지.

당시 마을의 사람들은 조를 짜, 근방에 지어지고 있는 도시에 몰래 들어가 품을 팔고 있었네.

주기적으로 찾아온다곤 하나 그 하나에게 생활용품을 모두 책임지게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네. 산골에 살면서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는 도가 터서 한참을 일하고 있는데 아주 놀라운 소식이 들려온 건 그때였네.

전쟁이 끝났다고.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았던 전쟁이 끝났다고.

적들의 수괴인 마왕이 용사님의 검에 의해 찢겨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

곧바로 한창 건설 중이던 도시에 축제가 벌어졌어. 무덤가에는 꽃비가 내렸고, 경비병과 불량배가 얼싸안았으며, 부자와 거지가 팔짱을 끼고 춤을 췄을 뿐더러, 이 기쁜 소식을 널리 알리기 위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길거리를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우는 소리와 추모의 한탄이 가득하던 술집에서는 흥겨운 가락이 흘러나왔지.

그 중에서도 가장 기뻤던 건 우리였네. 도망자의 처지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게 된거야. 물론 연합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지만, 쉬이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였으니까.

그 소식을 등에 업고 우린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지.

이 기쁨을 우리만 누릴 수 없다는 생각에 걸음을 서둘렀어.

……무언가 잘못된 걸 눈치챈 건 마을에 돌아왔을 때였어.

분명 도시에 갈 때는 다섯 명이 갔는데, 돌아온 건 넷 뿐이었다.

이상하지 않나? 그런데 더욱 이상한 건 다른 이들에게 물어도 원래 넷이 갔다는 대답만 들었다는 거야.

샘.

덩치가 제일 큰 주제에 가장 순박하던 청년.

나를 빼고 그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고.

점점 사라지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네. 하지만 그걸 눈치채는 건 아무래도 나 뿐인듯 싶더군. …그런 눈으로 봐봤자 어째서인진 나도 몰라. 처음에는 내가 미친 줄 알았으니까. 존재할 리 없는 허상을 만들고 진짜로 있다고 믿고 있다고 자괴감에 빠져들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런데 어느날 불쑥, 이상해진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

그 순간 세상이 달라져 보이더군.

그리고 난 후회했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차라리 그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 눈을 가린채로 있다가 사라져버리면 그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주변의 성당에 도움을 요청했어야 한다고?

그들이 우릴 내버려 두겠나?

그들이 제창한 대륙인의 의무고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짐을 버리고 숨어든 우릴?

……그래. 이제 내 실수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겠어. 그들이라면 구했겠지. 아마 구했을 거야. 그러지 않는다면 용사님께서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테니까. 단지 변명을 하자면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아무튼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야. 슬슬 당신이 말한 조건에 부합되는 곳에 도착해. 모퉁이를 왼쪽으로 돌면 가장 큰 공동이 바로 그곳이지. 그런데 이제와서 말하긴 뭣하지만 정말 싸울 셈인가?

……그런가. 그럼 내 일은 여기까지로군. 이제부터 ……뭐지, 방금 이 진동은? 서, 설마 지진?!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피해야…… 윽!

*

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촌장을 내려다봤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돌에 맞을 것처럼 머리를 가리고 뛰려 하더니만 뒤로 넘어져서 머리를 부딪친 충격으로 그만 기절해버린 것이다.

원흉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종유석이 가득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뇌까렸다.

“위에서 뭔 개지랄을 떨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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