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9장. 얽히고 섥힌다(3)
* * *
수십분 전.
세간의 인식보다 말은 오래전부터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그만큼 역사 속에서 말이 차지하는 역할도 많았다.
상인들의 짐마차를 이끄는 노새나 짐말부터 시작해, 멋들어진 갑옷을 걸치고 전장을 누비는 기사들의 전투마까지.
그 중에서도 후자의 경우를 말로 듣고 직접 본 젊은이들은 말에, 말에 올라탄 기수에 열망을 품게 된다.
그러나 생각보다 말은 겁쟁이다.
길을 가다가 마주친 작은 장애물을 마주친다.
그럼 멈춰선다. 자신의 체고보다 낮더라도 뛰어넘긴커녕 아예 피해 가려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기 일쑤다.
이러한 말에 대한 실상을 알고서 실망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말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생물이기 때문이다.
하여 여러가지 방법을 연구해 왔다.
그 산물 중 하나가 지금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바로 습격 전 미리 도망쳤다는 사교의 무리를 쫓아 성녀가 이끌고 온 성기사단이었다.
쿠쿠쿠쿠쿠!
수백의 성기사단이 말을 전속력으로 몰며 질주했다.
험한 산세에 영향을 받지 않는 모양새였다.
“가자! 페르난데스!”
“푸르르르르!”
힘찬 발굽질로 울퉁불퉁한 지면을 박차가며 나아가는 속도가 마치 평지에서 달리는 것 같았다.
근육질의 노인이 제 애마를 부르자, 말이 화답하듯이 울었다.
비올레트 사제가 호탕하게 웃으며
한몸처럼 움직이며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장애물을 피하는 모습은 비단 그 둘만의 재주는 아니라, 같이 달리고 있는 성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비밀은 바로 신성력에 있었다.
사제들이 다루는 신성력의 기반은 바로 믿음, 즉 신뢰다.
믿음과 동조의 힘, 신성력은 오랜 세월 쌓아야하는 기수와 기마간의 거리를 단번에 좁혔다.
“성녀님! 사기가 흐르는 동굴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 주인은 대형의 좌측에서 달리던 성기사였다. 성녀가 재빨리 외쳤다.
“전부 멈추세요!”
성녀가 호령하기도 전에 말들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성자에 비해 손색이 있다곤 하나 신의 자녀, 성녀의 행동보다 의지가 먼저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말들과 동조하고 있던 성기사들도 능숙하게 박자를 맞췄다.
일행의 지도자 격인 세 사람이 동굴 앞으로 모였다.
성녀, 비올레트 사제, 그리고 부단장인 이엘경이었다.
이엘 경이 선두로 나와 전체적으로 동굴 입구를 살펴봤다.
중갑주로 살갗 하나 들어나지 않은 모양이었으나,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여성의 것임이 분명했다.
“보십시오.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놈들이 이곳으로 도주한 게 틀림없습니다.”
“이엘 경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아, 비올레트 사제께선.”
“이 늙은이의 눈에도 같은 게 보입니다. 확실한 것 같군요.”
비올레트 사제가 동의를 표하고 이엘 경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성녀는 확신을 얻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정됐군요. 이엘 경.”
“예, 성녀님.”
“이제부터 나뉘어 움직이겠습니다. 부단장이신 이엘 경께서 절반의 단원들을 인솔하여 동굴로 진입해주십시오. 저와 비올레트 사제는…….”
쿠그그그그….
그때였다.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느꼈다. 지상을 휩쓰는 강대한 마력파를, 새벽빛 하늘 저편에서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무단점거하는 광경을 보았다. 이윽고 자욱히 낀 먹구름에서 기둥처럼 굵은 번개가 멀지 않은 산에 내리꽂혔다. 그러자 산 하나가 사라졌다.
“맙소사….”
이엘 경은 아연해하는 목소리였다.
그건 여파로 일어난 지진의 진동 때문일까. 아니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직감 때문이었을까. 그조차 아니라면 지난 5년간의 평화가 깨지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
이엘 경은 잠시 혼란을 겪느라.
비올레트 사제는 번개소리에 놀란 제 페르난데스를 진정시키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이건 ‘천공의 징벌’. 그렇다면… 현자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건…. ───아하.”
바로 감은 듯 감지 않는 듯한 성녀의 눈동자에 순간 위험한 눈빛이 스쳐지나갔음을.
그것은 순애보다는 질척한 애열에 가까웠다는 것을. 성녀가 희열어린 기색을 숨기며 말했다.
“비올레트 사제님. 이엘 경.”
“부르셨습니까. 성녀님.”
“…잠시 추태를 보였군요. 하문하시길.”
부끄러운 듯 이엘 경은 넙죽 고개를 숙였다.
“둘이 아니라 셋으로 나누겠습니다. 이엘 경께선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동굴로의 진입을. 비올레트 사제께선 남은 이들로 근방을 샅샅이 뒤져주세요.”
“이 일대를 전부… 말씀입니까?”
“예. 겸사겸사 포위망도 펼쳐주시길 바래요. 쥐 한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꽈악.”
비올레트 사제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갑자기 이런 지시를 내리는 합당한 이유가 마땅히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그의 얼굴이 무언가 떠올
“설마! 그렇다면 성녀님께선?!”
“전.”
성녀는 돌아서며 말했다.
그 방향은 조금 전 기둥같은 번개가 떨어져 산이 사라진 곳이었다.
“가볼 곳이 있네요.”
*
똑… 똑….
동굴 내부의 벽과 천장을 타고 흐르던 얇은 물줄기가 종유석 끝에 망울지더니 똑, 하고 떨어진다. 어디선가 불어온 서늘한 바람에 구아노 냄새가 희미하게 맡아졌다. 파득파득, 밖에서 지평선 너머에서 해가 서서히 떠오름에 따라 박쥐들이 날개짓하며 제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박쥐들이 하나둘 날아들어와 매달리는 천장 아래, 용사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촌장에게 다가갔다.
“후우우.”
어이가 없는 건 없는 거고.
일단 쓰러져 있는 촌장의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동굴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뼈가 시릴 나이다.
이대로 두고갈 순 없지.
뒤에서 끌어안듯이 지탱하고 그대로 질질 끌어 벽에 기대어 앉혔다.
따로 덮어줄만한 겉옷 같은 건 없으니 이대로 두는 수밖에.
용사가 일견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이대로 기절하고 있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겠지.”
무언가 좋지 않은 상상을 한 듯한 말투였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될 경우, 그의 마을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노력이야 해보겠지만 예상을 벗어나는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가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용사는 촌장을 남겨두고 걸었다.
가던 길을 따라가서 촌장이 말한듯한 모퉁이를 돌자 거대한 공동이 나왔다.
“이건….”
위를 올려다보자 천장은 어둠에 잠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림짐작이지만 지하철 역사를 세로로 세워놓은 것 같은 높이였다.
“크네. 그럼 내가 대체 얼마나 떨어졌다는 거지?”
공동의 면적도 상당했는데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의 높이도 이 정도라니.
떨어지면서 걸린 시간으로 보건데, 이 동굴은 지면으로부터 꽤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도 길 안내는 제대로 해줬네.”
수십명의 사람이 장기간 체류하며 지낼 수 있는 곳.
촌장에게 이런 장소가 있느냐고 묻자, 고민하다가 대답했던 바로 그곳.
그 조건에 정확히 부합하는 장소는 이곳밖에 없었다.
“이 정도라면 은신처로서도 적합한 수준인데.”
굴곡진 통로와는 다르게 공동의 지면은 전체적으로 편평하여 안정감이 있었고, 지하수가 천장 위로 흐르진 않는지 종유석은 보기 드물었다. 그 때문에 바닥의 석순 또한 없는 것이 확실히 지내기에는 좋아보였다.
“문제는 음식과 물을 어디서 구했느냐인데. 음?”
불현듯이 코끝에 웬 냄새가 스쳤다.
많이 맡아본 비릿한 냄새.
“물냄새잖아.”
그렇게 농밀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물냄새였다.
설마 지하에 강이 흐르고 있는건가.
답은 곧 나왔다.
벽면에 뻥 뚫린 구멍 아래로 지하강이 흐르고 있었다. 수심은 깊지 않았으나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만장동굴은 우스운 규모의 이 동굴을 은신처로 쓴다면 음식이야 보존식품으로 떼운다치고 물이 문제였는데, 이렇게 확실한 식수원이 존재했다니.
용사의 추측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네. 동굴은 꽤 오래전부터 이반 폴나레프가 점거하고 있었어.”
촌장은 어느날 이반 폴나레프가 폴이라는 이름으로 상인이라하며 찾아왔다곤 하지만, 그건 이상했다.
그가 이곳에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실제로 산길을 탄 그는 그게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인 줄 알았다.
몬스터들이 득시글 거리는 산세는 험악했고 사람들은 대부분 평야 지대에서 사는 터라 인적 또한 없었다.
그런 마경을 일직선으로 주파할 수 있던 건 그에게 힘이 있었기 덕분이었다.
그러니 그런 곳을 돌아다니는 홀로 상인이란 있을 수 없는 존재다.
촌장과 마을 주민들은 그 점을 간과했거나 아니면 모른 척 했겠지.
사정이 있어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사람 따위, 요즘 시대에는 흔하게 널렸으니까.
은혜를 입은 시점에서 외부인의 정체를 파헤치기란 힘들었을 터.
단지 문제라고 한다면 그 은혜는 의도된 것이라고 해야하나.
‘부부. 그렇지. 추측이지만 아이를 유산할 뻔했다는 그 부부가 아마도 내통자. 혹은 처음부터 이반과 한패였다면 말이 된다.’
마을 주민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반은 그들 중 하나의, 아니 둘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다. 그 순간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외부인에 대한 심리적인 장벽이 낮춰지다 못해 활짝 열렸고, 이반 폴나레프는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그들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소름돋는데 이렇게 전형적인 사기꾼의 수법을 보는 건 오랜만이다.
뚜벅….
용사 본인의 것이 아닌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용사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옛 버릇이 튀어나온 것이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가늠하고, 석주 뒤로 웅크리듯이 몸을 숨겼다.
뚜벅… 철컹… 뚜벅… 철컹…
누군가 오는… 아니. 들려오는 발소리는 한 명의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수명에서 수십.
중무장의 철소리를 울리며 다가오고 있는 정체불명의 그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선빵필승.’
자고로 선빵은 갈기고 봐야하는 법.
때마침 잡고 휘두르기 좋은 느낌의 석순이 손높이에 있어, 검을 잡듯이 잡고선 끊었다.
그러자 발소리가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