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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43화 (43/45)

〈 43화 〉 9장. 얽히고 섥힌다(4)

* * *

새벽빛 햇살이 미처 미치지 못한 어두컴컴한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습한 기류가 흐르는 내부는 달이 뜨지 않은 밤과도 같게 느껴졌다.

그때 이엘은 아차 싶었다.

부하들을 이끌고 동굴로 진입한 뒤에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것이다.

머리카락 한올 빠져나가지 않게 눌러쓴 단단한 투구.

이엘의 살갗하나 내보이지 않는 막중한 중갑은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한다.

든든하다 못해 과하다 싶을 정도의 무장은 전투라면 모를까, 이런 때는 썩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으아~ 썩 기분이 좋진 않은데.”

“조용히 해. 놈들이 어디서 듣고 있을 줄 알고.”

반면에 부하들은 가뿐히 움직였다.

무거운 갑주나 랜스같은 것들을 전부 동굴 입구에 두고 온 탓이었다.

경장 차림에 허릿춤에 꽂아둔 단창과 검이 무기의 전부였지만 골짜기같이 상대적으로 폭이 좁은 이런 지형에선 적절한 차림새였다.

부득불 장비를 모두 챙겨온 이엘만 우습게 되었다.

물론 이럴 줄 알면서도 부하들이 이엘에게 말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으으으… 바보. 난 바보야. 다른 분들이 괜히 벗어두고 가라고 한 게 아닌데. 그런 줄도 모르고….’

지금의 사태는 ‘만약’, ‘혹은’, ‘어쩌면’. 이런 가정들이 꼬리를 물고 물더니.

‘에잇. 그냥 다 챙겨가면 해결되는 일 아니야?’

라는 어처구니 없는 발상으로 이어진 참사였던 것이다.

사실 그녀는 실전 경험이 일천한 편이었다. 대전이 종식된 후에 성기사가 된 케이스였던 것이다.

이는 시대의 흐름상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한 지역의 전사가 아니라 한 지역의 행정가로서 지휘관이 필요했고 그 방면의 특기가 특출난 이엘이 짧은 시간만에 부단장이라는 직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성기사라는 것이 본질은 무력부대이기에 최소한의 무술과 전술 소양은 갖추고 있긴 했다만 역시나 이론과 실전은 다른 법이다.

‘어떡하지? 이제와서 투구라도 벗어? 너무 속이 뻔히 보이잖아. 무슨 핑계를 대어야 사람들이 속으로 비웃지 않을까.’

그리고 그녀의 상급자들은 이런 이엘의 약점을 잘 헤아려주었다.

그때 한 성기사가 나서서 딱 좋은 핑곗거리를 던져주었다.

“부단장. 어디서 적들이 비열한 암습을 가해올지 모르니 만일에 대비하여 뒤로 물러나주십시오. 대신 제가 앞장 서도록 하지요.”

연륜 있는 모습의 그는 같은 성기사들 중에서도 최고참으로 손꼽히는 베테랑이었다.

비올레트 사제와 동기이자 친우이기도 한 그는 은퇴를 앞둔 상태에서 친우의 부탁을 받고, 훗날 교단을 지탱할 반석이 될 인재이나 경험이 부족한 이엘을 보좌하기 위해서 부관역으로 참여한 최선임 성기사였다.

이런 제스처를 알아채지 못할 이엘이 아니었으나 잠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 뒤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는 않으나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물러나는 상식적인 지휘자의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차세대의 성기사단장은 이러한 인물상이 어울리는가, 전장을 내달리던 늙은 성기사는 세월의 무상함을 깨달았다.

터벅. 터벅.

그 뒤로 늙은 성기사의 뒤를 따라 일행은 움직였다.

암순응이 끝나 사물 분간에 익숙해졌으나 동굴 내부는 적막감만이 가득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고 자그마한 생물이라곤 간간히 날아다니는 박쥐밖에 보이질 않았다.

드문드문 얼굴 높이로 날아오는 박쥐에 놀라는 성기사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모두 이엘과 같은 신참이었다.

선임 성기사들은 묵묵히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도 도무지 뵈는 게 없었다.

지금까지 마주친 건 깜짝 상자같은 박쥐들 뿐이었다.

정말로 이곳으로 사교 무리가 도망친 것이 맞는가. 혹여나 놈들의 수작에 속아넘어간 것이 아닌가. 그런 의심마저 들 즈음, 갑자기 대열을 이탈하는 성기사가 있었다.

“부단장님….”

그는 이엘에게 다가갔다.

신참에 속하는 그는 밤눈이 밝기로 동료들 사이에서 유명한 자였다.

“부단장님, 저기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

곁에 다가온 성기사는 누가 들을세라 속삭이자 이엘은 수신호로 일행을 멈춰세웠다. 입구부터 꽤 깊이 들어왔으니 슬슬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부하의 말을 주의깊게 듣더니 고개를 까닥여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과연 맞네. 스무 명 쯤 되려나. 그런데 정신을 잃고 있는 것 같아. 이전의 보고 중에 적들이 도망친 방향에 마을이 있었다고 했지? 아무래도 예의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납치해온 모양인데.”

부하의 말대로였다.

사람들이 있긴 했다.

단지 장소가 많이 특이했다.

벽틈 사이로 엿볼 수 있는 너머, 넓은 공간에 사람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것이었다.

벽면에 달라붙어 자라는 발광 이끼가 내뿜는 불빛에 형체만 보이던 것을 부하가 용케도 캐치해 낸 것이었다.

발광 이끼의 색은 보랏빛이었다.

“안 되겠는걸. 너무 좁아.”

틈새의 폭은 사람 하나가 비비적대도 들어가지 못할 만큼 좁았다.

손어름으로 폭을 재던 이엘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지. 여기를 부수고 들어가기엔 사람들이 너무 가까워서 다칠 것 같아.”

“구조를 우선시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때 가만히 서있던 늙은 성기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조근조근한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듯한 말투였다.

“저들을 이대로 두고가자는 말인가요.”

이엘은 지휘관이라는 입장 상 부하들이 자신보다 경험이 적든 많든 하대를 해왔으나, 이 최선임 성기사의 말은 함부로 넘길 수 없었기에 공손한 말투로 대꾸했다.

늙은 성기사가 말했다.

“구출한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하려면 지금 병력의 절반은 뚝 떼어 저희가 들어온 입구로 되돌려보내야 할 겁니다. 그마저도 호위는 따로 보내지 않는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그 정도라도 충분히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요. 아마 한번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그럼 다음에는 어쩌실 요량이십니까. 그 다음에는요.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전력을 깎아낼 것입니까. 냉정해주십시오, 지휘관.”

그 말을 들으며 이엘은 선택해야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적의 추격이냐 인명 구조냐.

어느 쪽이든 성기사의 본분에 맞는다고 할 수 있었다.

단지 지금은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답은 나와 있었다.

이엘은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가 옛날 수습이던 시절.

수습 성기사들이 배우는 교양서에는 사교의 종자들에 관하여 나와있다.

그들의 주술, 그들의 계급 체계, 그들이 숭배하는 부정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은 금서로 지정된 삿된 지식이었으나 호랑이를 잡으려면 굴에 들어가야 하는 법.

아이러니하게도 대륙에서 경외시 받는 사교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건 그들을 잡는 성기사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칼날은 무인의 그것과는 궤가 다릅니다. 부디 사특한 무리들을 가벼이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래된 역사에 걸맞게 사교는 그들만의 폭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로잡힌 자, 욕망의 하수인, 부덕의 파발꾼 같은 것들은 대륙인들에게도 악명이 매우 높았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마왕의 발호 이후에 사교의 악명을 마왕이 전부 가져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사교를 소탕한 경력이 있는 늙은 성기사의 조언에 이엘은 뜻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둘의 의견 대립을 코앞에서 듣고 있던 부하가 딱딱히 굳은 얼굴로 물러났다.

티를 팍팍내는 신참 성기사를 보던 늙은 성기사는 추후 따로 불러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휘관끼리의 대립은 어떤 식이든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았으니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눠 입을 막아 놓는 것이다.

그 뒤로 사교의 추적은 계속되었다. 그러면서 이엘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수십에서 그치지 않았다.

적어도 수백… 어쩌면 수천에 이를지도 모르는 이들이 이 동굴 안에서 잠들어 있던 것이다.

고작 성기사단 하나로 커버할 수 있을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엘은 직감하게 되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 한다고.

그러나 내색하진 못하고 속으로 끙끙대던 찰나, 전방의 최선임 성기사가 돌연 손을 쳐들었다.

수신호였다.

그 뜻은 이랬다.

­적 발견. 개체로 추정. 하나.

수신호에 따라오던 성기사들이 즉시 멈춰섰다. 최선임 성기사가 이엘을 향해 돌아봤다.

그 시선을 받은 이엘은 재빠르게 부하들에게 손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장애물로 인해 움직임이 제한되니 각자 거리를 충분히 이격할 것.

이엘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성기사들이 재빠르게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좌우로 더 넓혀.

­양 끝은 단창을 들 것.

­일제히 덮치되 무리라 판단되면 지체없이 물러설 것.

신속하고 은밀한 움직임은 제 3자가 본다면 암살자로 착각할 정도였다.

재빠르게 지시에 따라 적을 협격할 준비를 마치자, 보좌역인 성기사는 남몰래 감탄했다.

확실히 친우 비올레트가 눈여겨볼만한 인재다.

그러나 경험이 풍부한 최선임 성기사도 알아채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들이 발견한 적은 사냥꾼에게 발견되면 무작정 뛰어가는 ‘토끼’가 아니라.

­다음 신호에 맞춰 들어간….

역으로 사냥꾼을 사냥하려 드는 ‘호랑이’라는 것을 말이다.

콰앙!

동굴

적이 숨어있다고 추정되는 돌기둥이 무너지는 동시에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굉음이 울리는 즉시 본능적으로 칼을 치켜들은 덕분에 이엘은 겨우 그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앙!

“읏…! 으극……!!!”

그러나 직후, 칼등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내달렸다.

분명히 때에 맞게 막았는데도 충격이 감쇄되는 기미가 아예 없었다.

어찌나 던지는 힘이 강했던지, 왠만한 성인 남자도 손사래를 칠 정도의 중갑을 걸친 이엘이 나뭇잎처럼 한순간에 날아가버릴 정도였다.

“이런 제길, 부단장!”

“몸으로 받아! 벽에 부딪치기라도 하면 곤죽이 된다고!”

한순간에 끔찍한 결말을 직감한 성기사들이 앞다투어 몸을 날린 탓에 이엘은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던 그때.

적의 신형을 가리고 있던 돌기둥이 무너지면서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났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평범해보이는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그러나 지금의 공격으로 미루어봤을 때, 만만치 않은 적임은 분명했다.

성기사들이 일제히 임전 태세를 갖추고, 최선임 성기사는 단창과 칼을 동시에 뽑아들고선 대치했다.

이엘이 공격받은 후부터 그들은 방심이라는 어줍잖은 마음가짐은 갖다 버린 것이었다.

“……어라.”

정작 공격한 본인은 얼이 빠져 있었지만.

“과연 사교도로군, 비열하기 짝이 없는 습격을 잘 봤다.”

“어, 어? 뭐? 사교도?”

“왜 그러나, 우리가 너무 많아서 그런가. 1대 1로도 좋다. 죽자고 덤벼드는 것들을 보다가 너희들을 보니 그리움마저 느낄 지경이다.”

“아니, 잠깐. 잠깐만이라고 내가 실수한 것 같…!”

최선임 성기사는 알지 못했다. 사실 알아도 상관없었다.

이미 그의 뇌리에선 상대를 착각해서 그만──이라는 남자의 변명따위 들을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징벌해주마. 사교도여!”

“실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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