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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44화 (44/45)

〈 44화 〉 9장. 얽히고 섥힌다(5)

* * *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적지 않은 실수를 한다.

그게 인생이었다.

그 중에서도 실수의 종류를 분류하자면 수습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요지는 간단하다.

제대로 수습을 하기 위해 대화를 나눈다.

요컨대 실수한 당사자가 상대에게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이해시키면 되는 것이다.

혹시나.

만약에 상대방이 납득하지 못할 경우, 누구처럼 둘러쌓여서 칼침을 맞게되니 주의할 것.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용사는 과거의 아군에게 공격받는 제 처지를 한탄했다.

사아아악!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고 견실한 찌르기가 좌우에서 동시에 목을 향해 쇄도해왔다. 순간 무릎에서 힘을 빼 자세를 무너트리자 마치 매트릭스처럼 위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코앞에서 십자로 교차하는 두 개의 창날. 그 상태로 땅을 짚고 있던 양손을 뻗어 창대를 붙잡는다. 마땅한 무기가 없을 땐 남의 것 빼앗아 쓰는 게 제 맛이라고 대도에게서 배웠다.

두 창대를 잡고 당기자 성기사들은 뺏기지 않으려는 듯이 힘을 줬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용사의 예상대로였다.

이러다가 잠깐 잡아당기는 걸 놔버리면 성기사들은 순간 균형을 잃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럼 무기도 성공적으로 강… 루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낙관론은 포기하라고 뒤이어 들려온 기합성이 일러주었다.

“후으으으으음!”

묵직한 것이 대기를 찢는 소리가 났다. 한발 물러선 채로 지켜보고 있던 노회한 성기사. 그가 부하들이 위기에 처하자 메이스로 후려치려 든 것이다. 이에 무기에 대한 욕심을 빠르게 버린 용사는 그대로 뒤로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발끝을 스쳐지나가는 메이스. 졸지에 철구를 얻어맞은 바닥의 파편이 이리튀고 저리 튀었다.

날 듯이 뒤로 뛰어 공격을 피하자, 양옆에서 성기사 둘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뛰쳐들었다. 단두대와 같이 목과 허리를 칼날들이 노려왔다. 창을 뺏으려는 시도를 눈치채자마자 곧바로 아군을 커버하려 온 것이었다. 참으로 기막힌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혀 위협적이진 않았으면서도.

무심코 코웃음을 치려던 용사는 손으로 땅을 짚었다.

휘릭. 타악.

땅을 짚은 순간 몸을 회전시킨다.

제동이 걸린 상체는 아래로, 관성이 남은 하체는 위로.

마치 한 팔로 물구나무를 서는 것처럼.

“이런….”

“곡예사냐!”

막 칼을 내리찍던 성기사들은 눈을 부릅떴다.

그들이 목표로 노렸던 목과 허리가 마치 순식간에 사라진 것만 같이 보였다.

탕!

돌바닥을 두들기는 허망한 쇳소리가 울리고.

용사는 나머지 손으로 땅을 짚고 그대로 다시 한번 뛰어 오른다.

허공에서 몸을 몇번이고 뒤집은 용사가 떨어진 곳은 단단한 벽이 있는 곳.

탁.

날렵한 움직임으로 합격에서 빠져나간 용사의 모습에 경험이 적은 신참 성기사들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베테랑들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세를 정비하는 듯했으나 속으론 상대의 평가를 두세 단계를 올리고 있었다.

‘어디보자….’

벽을 등지고 선 용사는 사방을 살폈다.

‘시야에 잡히는 것만 해도 얼추 30여명.’

이는 1개 성기사단의 정원에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숫자다.

‘분명 어딘가 더 있다. 두 발이 자유롭지도 않은데 둘러싸이면 골치 아파. 제압하는 데만 한세월이 걸릴게 분명해.’

물론 봐주는 것 없이 하면 5분 내로 순살할 수 있지만.

‘내가 미친 놈도 아니고.’

오해에서 시작된 일로 사람을 죽이네 마네 하는 일은 이제 지쳤다.

서서히 다가오는 성기사들을 제지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잠시만. 우리 말로 해보자고. 잠시 오해가 있는 것 같은….”

“제법하는구나, 사악한 존재의 뒤를 닦아주는 종놈아!”

사정을 설명하려던 그 순간, 노회한 성기사가 거친 말투로 일갈했다.

말이 뚝하니 짤렸지만 발단은 제 실수임을 인정하고 있었던 용사는 다시 말을 이어가려 했으나.

“그 알량한 재주로 대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의 피와 땀을 갈취하며 살아왔느냐!”

도저히 참고 들어주기 어려운 말에 미간을 좁힐 수 밖에 없었다.

“그건 좀 억울하네? 내가 흘린 적은 많아도 남의 걸 갈취한 적은 없었는데.”

“멋도 모르는 소릴 지껄이는구나. 네놈이 숨을 쉬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 그 하나만이 명백한 증거이거늘. 발뺌이라도 해볼 속셈이더냐.”

“……아하. 즉 난 기생충이다?”

“종놈치곤 제 주제는 잘 알고 있구나.”

턱수염을 기른 경건한 외모인 주제에 걸걸한 입담을 자랑했다.

“만일에 네놈이 일말의 양심을 간직하고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 목숨을 버리는 것이 그나마 지금껏 희생되어 온 이들에 대한 위로가 되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을 터. 어서 자결하지 않고 뭣하고 있느냐.”

“하. 참나….”

이런 걸 들어본 게 얼마 만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귀족들의 가면 무도회 같은 정치판이 아니라 흙먼지와 육두문자가 어우러지는 야지의 향기가 물씬나는 말투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그리운 느낌도 들 것 같았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이미 은퇴한 입장인 용사는 모욕을 더이상 참을 필요도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지금 용사의 모습은 현자의 환영 마법으로 인해 그냥 ‘수상한 남자 1’로 보일 테니 참을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보여야 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난 그놈의 사교가 아니고 그게 뭔지도 몰라. 그냥 어쩌다가 재수없게도 휘말려버린 용병이라고. 그런데 이렇게 말해도 안 믿겠지.”

“개소리를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겠나.”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잘만 대답하면서 그러네. 그리고 말이야, 할배. 남보고 죽으라니 마니. 그러다가 세상 하직하는 수가 있어.”

“핫.”

용병 연기에 몰입해 건들거리는 말투로 빈정거리자 바로 코웃음 친 성기사는 메이스를 고쳐쥐더니 거리를 천천히 좁혔다.

그와 더불어 다른 성기사들도 진열을 갖추며 접근해온다.

특히나 신참 성기사들의 눈은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전투의 열기에 흥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저런 눈은 상당히 많이 봐왔다. 썩 좋은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신참들은 베테랑과는 달리 의욕이 넘치는 까닭에 아무리 안될 상황에서도 발버둥을 치려드니.

오히려 그렇기에 죽을 자리에 찾아가기 쉽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눈들이었다.

제압하기에 품이 조금 더 들것 같지만. 그래도 별 문제는 없었다.

이내 열연 중인 용사는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얻어맞고 울지나 말라고.”

*

수색은 난항을 겪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동굴은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져 있기라도 한 것 같았고, 떨어진 용사와 이반 폴나레프는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현자와 대도는 그 둘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사교도의 위험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반은 바로 죽일 생각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그냥 싸그리 다 구워버림 어디서 튀어나오지 않을까.”

“위에서도 실수하더니만… 혼자 다 떠맡을 거라면 난 찬성일세.”

“망할.”

똑똑.

현자는 종유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가득한 동굴 안에서 일일히 걷는 자신의 모습이 멍청해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내내 불만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장 부지런히 뛰어다녔던 대노는 이런이런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둘을 만나기를 바랬던 그들에게 바라지 않았던 만남이 찾아왔다.

“어머나.”

“?!”

“!”

돌연히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기새끼 한마리도 잡지 못할 것 같은 가련함이 깃든 목소리.

그러나 현자와 대도는 알았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모기 새끼는커녕 트롤의 머리통도 쥐어 뜯어버리는 괴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어쩜. 요즈음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만나뵙게 되는군요. 이도 신들께서 인도하심이겠지요.”

“그, 그라시아?!”

“여기서 성녀가 등장한다고?! 이봐, 현자. 너 설마…!”

“나 아냐!”

장내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당황한 둘이 뭐라하거나 말았거나 성녀는 제 할 일을 했다.

“스으으──읍……. 하아──.”

희미하지만 대기 중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줄곧 쫓아온 정인(?人)의 향기가.

“그럼 두분, 이만 제게 용사님을 숨긴 장소를 말씀해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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