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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용사는 히로인들에게서 도망친다-45화 (45/45)

〈 45화 〉 9장. 얽히고 섥힌다(6)

* * *

지표면으로부터 수백미터 아래에 위치한 지하 동굴에는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오스스 일어나는 피부를 쓸어내리며 현자는 생각했다. 태양이라는 무지막지한 광원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는 특수한 환경이기에 느껴지는 한기라고. 그 외에도 머릿 속에선 수많은 지식들에서 비롯된 가설이 치솟았다. 그러나 세상에는 꼭 이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예를 들자면 사랑에 빠진 여인이 장시간 짝사랑하는 대상을 보지 못해 내뿜는 한기라던가.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네. 용사 그 새끼가 싸지른 똥을 치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불과 10보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성녀. 현자는 성녀를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의 미소는 현자의 기억속의 그녀의 미소와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얇은 입꼬리는 살풋이 올라가고 보조개는 살짝 패였다. 비록 마음이 풍요롭지는 못해도 내면의 풍요로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외견도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두 분,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요량이신가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성녀가 입을 열자 곧바로 와닿는 건 빙산과도 같은 차디찬 한기뿐이었다.

동굴 벽이나 바닥에 깔린 보랏빛 발광 이끼에서 나오는 빛.

기묘한 빛으로 채색된 성녀는, 굉장히 멀게 보였다.

성녀는 누구보고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제 어깨를 두 팔로 감싸안았다. 여기에 없는 누군가를 꽈아악 안아주고 싶은 것처럼.

“물론 두 분의 도움이 없으셔도 전 알 수 있답니다. 당연히 알 수 있고 말고요. 사모하는 그분께서 이곳에 계시다는 것을. 제가 모른다면 누가 알 수 있겠어요. 누가 감히 알려고 하겠어요. 오직 저. 저 뿐이랍니다.”

껴안고 싶다. 보듬어주고 싶다. 한없이 사랑을, 사랑을 알려주고 싶다. 자신이 품은 무저갱같은 사랑을 그가 알아주었으면 한다. 조금 전만해도 성기사들을 고무시키며 독려하던 성녀는 온데간데 없이 사랑에 미친 여인만이 남아 있었다.

현자와 대도는 시선을 교환했다.

‘이건 중증이로군.’

‘저 아이가 저런 얼굴을 할 줄도 알았나. 새로운 면을 봐버렸어. 이딴 건 보기 싫었는데.’

마치 순한 개가 알고 보니 사나운 늑대였다는 것같은 진실을 마주한 기분이다.

‘이거 어떡할 건가. 지금 그가 어딨는지 말해준다고 해도 지금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꼴밖에 되지 않을 성 싶네만.’

‘…일단 내 말에 맞춰봐라.’

순간 현자의 낯이 근엄한 얼굴로 변했다.

꿍꿍이 속이 가득한 듯 겉으론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속으론 웃었다.

“네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이 늙은이는 알 수가 없구나.”

“시치미를 떼시….”

“허허. 현자인 내가 네게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단 말이냐. 씁쓸하구나. 그리고 섭섭하기도 하다. 이리 얼굴을 맞대어 본 게 어언 5년 전이 마지막인데, 변변찮은 인사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내가 너를 험하게 대했더냐.”

“그건 동감이네. 정인을 생각하는 그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나, 인사 한번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성녀… 아니. 그라시아야. 내, 대접받으려고 그리 고생했던 건 아니었지만 왠지 눈물이 나는구나.”

젊었을 적에는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명성이 자자하여 한 시대를 풍미하리라 일컬어지던 젊은 지식인. 하지만 유례없는 대전쟁을 겪으며 늘어난 것은 주름살이오, 한숨뿐.

과거의 동료들 중에서 역사적인 선인들에 버금가는 혁신적인 이론의 개척도, 학문의 지평선조차 넓히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현자의 넋두리를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그 중에서도 성녀는 조금 더 특별한 축에 속했다. 어찌보면 그녀는 현자의 제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애벌레들은 왜 풀잎을 먹고 사나요? 나무 열매도 먹고 그러면 좋을텐데.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쓰나.

­네?

­…열매를 먹는 종이 따로 있고 이파리를 먹는 종이 따로 있다.

­?

그녀가 현자로부터 배운 건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식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예를 들자면 저지대에 서식하는 식물과 고지대에 서식하는 식물은 종이 판이하게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그 잎을 먹고 사는 애벌레도 종이 다를 수 밖에 없지.

­저기… 현자님. 성서에선 선천신들이 그리 되라하여 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순리라고….

­수업 시간에는 내가 신이다.

­엣.

성녀는 아주 어릴적 용사의 옛 동료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교단의 시설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성서의 교리나 옛 성인들의 일화는 자면서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달달 외우고야 있었지만 기초적인 상식면에서는 부족함을 보였다. 그녀의 결여를 용사와 동료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자, 오늘의 수업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나 한번 테스트 해볼까.

­요, 요요요요 용사님?! 어째서 이런 누추한 곳에?!

­농땡이인게 당연하잖아.

­그딴 걸 애 앞에서 당당히 말하지마라 썅놈아!

본디 도제나 제자를 들여 지식, 비전의 전수를 이어나간다는 구세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제까지만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쟁터를 전전하며 ‘지식만 온전히 전해질 수 있다면 누구든 상관없다’는 신세대적인 마인드를 새로 장착한 현자였기에 그다지 문제가 되진 않았다.

­배움이 확실히 빨라. 하나를 가르키면 스물을 안다니까. ...에잉, 종교쟁이 놈들의 손길만 안 닿았어도 직전 제자로 삼는 건데. …그냥 확 저질러버려?

­성검에 배때기가 뚫리면 얼마나 아픈지 알고 싶은가보네.

­농담이니까 그거 치워!

‘에잉… 그때 그냥 저질러보는건데.’

눈 앞에 떡을 보고도 차지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정말로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그걸 연기에 심취했다고 착각한 건지, 대도가 말했다.

“이런. 내꺼라도 괜찮다면 손수건을 빌려주지.”

“페에에에에엥!”

“코를 풀라곤….”

둘은 캐치볼을 하듯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회화를 빠르게 주고 받았다.

그러자 제법 당황한 듯 성녀는 한발 물러섰다. 생각대로다. 노림수가 정확히 통한 현자는 속으로 낄낄 거렸다.

‘암. 언제나 설교하는 입장이었지 받아본 적은 드무니까. 예전에 우연한 상황에서도 저렇게 아무 말도 못했었지.’

나름대로 인간미 있고 딱히 고쳐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해서 따로 말해준 적도 없었다.

그걸 약점으로 찌르다니. 참으로 더러운 어른이었다.

“더구나, 산지도 죽은지도 모르는 그 녀석을 왜 하필 이런 곳에서 찾고 있느냐.”

“그야 냄새가….”

“으엉? 냄새?”

성녀는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고백하자면 현자는 성녀가 미처 말하지 못한 말들을 알고 있었다. 순결한 처녀가 남들 앞에서 말하기도 힘든 그런 표현들. 그런 걸 할아버지 뻘의 지인 앞에서 제정신으로 말한다니. 정상적인 수치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럴 수야 없을 것이 분명했다.

현자는 빠르게 이야기를 마쳤다. 감정의 동요가 가라앉고 이성이 떠오를 때면 늦다. 그 전에 재빠르게 몸을 빼야한다. 그리고 용사를 찾아서 사교고 뭐고 몸을 내빼고 보는 거다.

“아무튼. 우린 이만 바빠서 가봐야겠다.”

“잠시만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최근에 다소 경황이 없던 터라 미처 예의를 갖추지 못하여 두 분께 실례를 저질렀….”

“아니다. 네가 마음 쓸 것 없다. 오늘 일은 나중에 차분히 만나 얘기해보자꾸나.”

“아뇨.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을려던 찰나 현자의 얼굴이 굳었다. 덩달아 대도는 숫재 얼음 조각상이 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성녀가 느닷없이 뒷춤에서 살벌한 무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역시 저희는 말보다는 이게 빠르잖아요?”

어느새 성녀는 미소짓지 않고 있었다.

“어르신, 저는 더 이상 가르침을 받기만 하던 어린애가 아니랍니다.”

“그, 그라시아야.”

“용사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네요. 이 동굴 어딘가에 계시다는 건 알 수 있어요. 그럼 왜 두 분이 용사님과 함께 계세요? 왜? 제가 아니라. 왜?”

성녀의 빛을 잃은 동공과, 손에 들고 있는 은빛으로 빛나는 사슬에 연결된 핏빛으로 번뜩이는 철구.

아무래도 말이 통할 분위기가 아니다. 대도가 속삭였다.

‘저건 [성 리바안도의 은혜]잖아. 악질 이단과 무고한 민초들의 골통을 평등하게 빠개고 다녔던 그 미치광이 성인이 썼던 철퇴라고. 적혈의 기사를 성녀가 한줌의 핏물로 만들어버렸던 성물!’

‘나도 아니까 귀에 대고 말하지 마!’

‘아니까 더 그러는 걸세. 난 말일세, 사람이 죽을 땐 적어도 사람답게 죽어야한다는 게 내 지론일세. 마족놈들처럼 골통이 빠개져 죽긴 싫다 이 소리야. 성녀가 우릴 패 죽이려는 게 분명하네. 젠장. 사랑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더니만!’

다소 성녀가 가진 사랑의 크기를 얕봐버린 모양이다.

“여전히 말해주시지 않으시네요. 예에, 괜찮답니다. 품고 있는 애정의 깊이가 깊을수록 장애물이 더 높고 험한 법이라고 ‘세르잔의 애담’의 주인공인 세르잔도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진정한 사랑은 그런 장애물들을 전부 치우고 난 뒤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하겠죠.”

“세르잔이 대체 어디서 사는 놈팡이인진 모르겠지만, 사람을 묻어버리면서 장애물을 치운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진 않느냐.”

“네, 용사님을 위해서라면♥”

이건 글렀다.

내심 포기한 순간 현자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빠르게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도망쳐어어엇!”

“치사하게! 미리 신호는 주고 달려야할 것 아닌가!”

“나만! 산다!”

“겁먹을 거 없어요! 팔다리가 없어져도 숨을 쉴 수만 있다면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답니다!”

“으아아아아!”

있는 힘껏 달리고 있는데 뒤에서 살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자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자책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예전에 그 말을 허투루 넘기지 않는 건데 그랬어!’

*

전쟁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행위다. 사람에서 비롯되었으되 사람을 망치는 최악의 행위.

일상에선 결코 넘지 못할 선을, 전장에서는 가벼이 넘어버린다. 넘어버린 선은 되돌아가려 해도 되돌아갈 수 없는 편도행이라.

사람들은 그 사실에 절망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에는 익숙해져버리고 만다.

그 변모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몇되지 않는다.

괴물을 상대하다 괴물이 되는 아이러니함을 품고 있는 전쟁은 정말로 끔찍한 것이었다.

그런 것이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그런 형국에서 성직자들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필연이었다.

신이 실존하는 이곳에서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교회, 성당, 신전 등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신들의 전당은 마을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생활의 구석구석에는 종교가 스며들어 있어, 따로 떼어놓고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했다.

사람들의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의 기둥 중에는 종교가 있었다.

사라져가는 인간성, 무너져가는 사람들을 떠받칠 수 있는 건 우리들 밖에 없다.

성직자들의 톱 성자 딘은 단언했다.

기나긴 전쟁 속에서 신의 광휘로 대적에게 철퇴를 내리는 일보다, 한 권의 성서를 품에 안고서 신의 교리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일이 더 가치가 높은 일이다.

자칫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말이었음에도, 교황이 부재한 이상 성직자들의 톱인 딘이 그렇게 말하며 솔선수범하자 휘하의 성직자들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 그가 보기 드물게도 난처한 얼굴로 자신을 찾아온 일을 현자는 아직도 기억한다.

여름철 장마비가 억수로 내리던 날, 비가 새는 천막에서의 일이었다.

­잠시 시간 좀 내줘.

­안돼. 싫어. 꺼져. 그 눈깔에는 빌어먹을 서류들이 보이지도 않는 거냐.

촛불 하나 아래 수북히 쌓여 있는 서류들의 산을 가리켰지만, 성자는 코웃음을 쳤다.

­넉넉잡고 30분이면 끝날 것 같은데 핑계가 너무 부실한 거 아니야.

­이런 씨발?! 니가 한번 해볼래?

­하면?

­…거기 앉아라.

망할 재능몰빵 같으니라고.

성자는 성직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되지 않았다면 제국의 재상이 되었을 거라는 암암리에 떠도는 소문을 모를 현자가 아니었다.

물론 현자가 하는 수 없다는 태도로 자리를 권한 건 성자의 말이 딱히 틀리지 않았기도 했다.

30분?

20분이면 떡싸먹을 거다.

막 자리에 앉으려던 성자는 물웅덩이가 만들어져 있는 의즈를 내려다보았다.

성자는 웅덩이가 생겨 있는 의자를 보며 어이없어 했다. 책상 위의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던 현자가 대꾸했다.

­의자에 왠 물이 고여있는 거야.

­보급 천막의 질이 나날이 떨어지고 있다는 건 너도 파악하고 있을텐데. 비록 분업을 했다지만 보급 총책임자는 내가 아니라 너다.

­천막… 그러고보니 천막 관련해서도 문제가 있었지. 그거 먼저 말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어.

­쯧. 말하는 걸 보니 오늘 밤은 다 잤군.

현자가 손을 휘젓자 의자가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성자는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까닥이며 자리에 앉았다.

판은 다 깔아줬으니 무슨 이야기인지나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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