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7화 과거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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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과거의 회상
2024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대한민국의 경제위기 제2의 IMF를 연상케 할 정도로 많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줄줄이 폐업이 이어졌고, 국내 코스피와 코스닥의 수치는 곤두박질쳤고 몇몇 대기업들의 주식은 상장폐지가되었다, 거기다 수많은 투자자들이 대한민국에 자금을 빼면서 나라의 신용은 붙잡을 수 없이 떨어졌다.
원화의 가치는 똥값이 됨에따라 물가는 겉잡을수없이 치솟았다.
부유층들은 사전에 달러를 사뒀거나 금을 사뒀겠지만 나같은 우리같은 서민들은 그런걸 대비할만한 여력과 자금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내 나이 서른,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교 4년제를 졸업해
이제 막 취직전선에 뛰어들 찰나에 나라가 망해버렸다.
통장잔고엔 간간히 알바를 해서 모안둔 꼴랑 50만원 뿐.
먹고살기위해 잠시 알바라도 할려고 천국알바를 뒤져봐도 그 흔하디, 흔한 편의점 알바자리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공대라도 나올 걸 후회하고 있다.
이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몇 개 남지 않았다.
지금 지내고있는 월세방에 월세조차 낼 돈도 없고, 이젠 일자리도 없다.
형에게 연락이라도 해야하나?
폰의 전원을 켰다, 아... 생각해보니 형은 유럽으로 이민간지 벌써 2년째였다.
웹디자이너로 크게 성공한 형은 탈조선을 결심한 후 빠르게 한국을 떠났었다.
그러면 내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어머니 뿐이었다.
형과 어머니 나 이렇게 3명이서 살고있었다 대략 18평 정도 남짓 월세 아파트에서 말이다.
그런 형은 자신의 꿈을 펼치기위해 집을 떠낫다.
처음엔 경력을 쌓기 위해라며 집에서 출퇴근하다 자신만의 전셋집을 구하고 집을 나갔다.
적어도 이사가는집을 알려주면될탠데 어째서인지 집을 나간뒤부터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3년뒤에 카톡엔 이민을 간다는 메시지만 남겨둔채 영원히 연락이 끊겼다.
그런 어머니는 많이 속상해하셨지만 뭐,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게 나쁜건 아니니깐.
나는 어머니랑 같이 지내면서 생활비 월 30만원과 집안일을 같이 겸용하다 1년뒤 나도 독립을 나섰다, 그 이유는 새벽까지 밤새 공부를 해야할수도있는데 18평 남짓 작은방이라 들락날락 할수도있어 방해가되었기에 집을 나올 수 밖에없었다.
그렇게 현재에 와서 독립을 청산하고 어머니집에 돌아기로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루 뽁
“어, 아들아.”
“어, 엄마 나 이제 집에 돌아갈려고.”
“그래, 와라.”
“어, 이번 주 중으로 짐챙기고 갈게.”
“알았다.”
끝
집으로 돌아갔을 때 어머니가 맛있게 차려주신 돼지불고기 상추에 쌈장 맛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어머니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매달 생활비 100만원 낼것 집안일 할 것 그게 조건이었다.
역시, 쉽지않을거라 생각했었지만.....
어머니께 나는 내 통장 잔고를 보여드렸다.
어머니는 지금까지 뭐했냐고 물어보시길래 대학교 다니면서 장학금 받고 간간히 알바하면서 생활비 모으면서 지냈다.
대충 어머니는 수긍하시는 모습이긴 했지만, 정말로 돈을 모으는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취직 준비한다고 세월 보낸 것도 있었기 때문에 그걸 고려한다면 당연한게 아닐까.
거기다 나라가 망했으니, 방법이 없었다.
“엄마, 나라 망했는데 일자리 구할 수 있을까?”
“너 공짜로 지낼 생각하지마라.”
“막노동이라도 하러갈게.”
“에휴... 그래 좋은 생각인데, 엄마가 너 공장 큰데 계약직으로 자리 알아봐났다.”
“어?”
“뭔 어야, 내일 면접보고 바로 일 시작할수있으면 내일부터라도 하고와.”
“어, 알았어.”
“지금같은 시기에 자리 구하기 어려운거 알지?”
“어.”
“어렵게 구한거니깐 거절할 생각은 하지말어.”
“알았어, 엄마.”
그렇게 찾아간 자동차 부품 공장에가 면접을 보고 다음날 바로 출근하게 되었다.
일은 흔하디 흔한 단순 반복작업이었고 단점이라면 어깨와 목 허리 다리가 아프다는 것 빼고는 뭐 괜찮았다.
이렇게 말하면 사실상 다 아픈것일려나....
서서 작업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루 8시간정도 일에 쉬운게 어디있을까.
암튼, 그렇게 시작된 나의 공장생활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래도 이 시기에 월300 벌곳이 어디있겠는가 이렇게 벌어도 생활비내고 차가없으니 대중교통비 개인 여가비 통신비 쓰고나면 남는게 없다.
나라가 망하면서 물가도 덩달아 올려버렸기 때문에 토요일까지 근무를 함에도 불구하고 10만원이 남는다, 처참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불과 4년전만해도 월 300을 벌었다면 아마 월 150은 저축을 할 수 있었지 않을까.....
그렇게 꾸준하게 다니고 6개월이 지났다.
대략 6월쯤에 입사했었으니 2024년의 마지막달인 12월쯤이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찾아온 위기가 우리 가족에 찾아왔다.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병원에서 폐암말기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안받고 뭐했냐는 말을 들었다.
꾸준하게 받아오신걸로 알고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라가망하면서 건강검진도 안받으신 것 같다.
그 비용도 아까워서 그런게 아니었을까싶다.
2년전만해도 국가에서 검진비를 지원했었지만 나라가 망하면서 그런 복지혜택이 싹 다 사라져버렸다, 그 결과 어머니가 돈을 아끼실려고 받지않으신게 큰 화가된것같다.
“김준영씨 마음이 준비를 하셔야할 것 같네요.”
“예?, 방법이 없는겁니까?”
“죄송합니다, 말기라 손쓸 방법이없습니다, 길어야 일주일입니다.”
세상은 늘 요지경이었다.
이제 좀 자리 잡았다 싶으면 낭떨어지에서 떨구고, 이제 좀 해볼까 싶으면 아예 기회마저 없애버리고 살만하네 싶으면 죽여버리는 더러운 세상이었다.
변하지않는 세계다.
어머니는 깨어나시지 않으셨다.
그렇게 4일 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갑작스럽게 찾아 온 어머니의 죽음에 나는 망연자실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은 간소화게 치뤄줬다.
어머니의 아는 지인분들과 몇몇 이모분들이 찾아오셨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했다, 재산과 이 집의 월세를 내는 통장을 내 이름으로 바꾸고 하나둘 씩 정리했다, 생명보험같은건 나라가 망하면서 전부 해지하셨던것같다.
나까지 집에 얹혀 살러온다고하니 지출을 가능한한 지우신게 아닐까 싶다.
어머니께서 남겨주신건 이 국민임대아파트의 보증금뿐이었다.
대략 3천만원 뿐이다.
어머니의 옷가지와 쓰시던 화장품은 전부 버렸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미 장례식장에서 충분히 흘렸기 때문이다.
지금은 현실을 직시 했다.
형은 찾아오지 않았다.
메일과 문자메시지 전화로는 대충 남겼지만, 어떤식으로든 접했을거다.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어머니의 장례식과 처리문제로 5일정도 휴가를 냈었던 직장에 다시 돌아갔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6개월밖에 안됐지만, 이 자동차 부품 자동화 공장에 적응은 대부분 완료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선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시던 어머니의 지인이셨던분이자 지금 현 공장장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불렀다.
“네, 공장장님 부르셨다고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 준영군 어머니 일은 유감이네.”
“네, 감사합니다.”
“그래, 돌려서 말안하겠네, 지금 일이 손에 잡히나?”
“.......”
“내가 여기 공장밥 먹은지 30년이네, 말안해도 무슨 말인지는 알겠나?”
“알고있습니다, 제대로 집중하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니,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런일 겪고 쉽지않을걸세.”
“............”
“단독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실업급여 받을 수 있게 해줄테니 잠시 쉬다오게.”
“공장장님.....”
“아버지같은 맘으로 해주는거야, 받아들이게.”
“......감사합니다.”
“그래, 필요한거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나가보게나.”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6개월만에 다니던 직장에서 짤렸다.
나라가 망했지만, 실업급여 시스템은 어떻게든 돌아가고있었다.
오히려 고용보험에서 지급하는 실업급여의 액수는 지금 일하는것과 비슷하게 받을 수 있었고 그 기간도 상당히 길게 받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나라가 망하면서 적어도 실업자들이 버틸수있게하기위해 제도를 그렇게 바꾼 게 아닐까 싶었다, 다만, 3년에 딱 1번만 받을 수 있게 바뀐게 단점이었다.
하지만 한번 받으면 1년동안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나는 매일 같이 출근을 반복하던 날들이 바뀌면서 매일 집에서 백수처럼 가만히 지내고 있었다, 오히려 이런 날들이 나를 더 병들게 하는 것 같았다.
항상 쉬는날이나 연휴때면 옆에 있던 어머니가 없다는 현실이 나를 더 슬프게했다.
현실이구나....그런 생각을하며 말이다.
그렇게 한달 두달 세달이 흘러 흘러 때는 7월 장마가 시작됐다.
집 앞 편의점에 간식거리를 사기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 갑자기 나타난 화물트럭 한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끼이이이익 쾅! 퍽! 철푸덕!
내 눈앞에 온통 검은색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치 전원이 나간 모니터를 보는것 처럼 온통 검은색밖에 보이지 않는다.
귀에선 삐이이이익 거리는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는다.
어떻게된 상황일까?
아.... 나 차에 치여서 사망, 죽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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