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25화 대한민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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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대한민국을 떠났다
내겐 어린 동생이 있다.
나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 IMF때 태어났다.
그때 당시만 해도 IMF가 찾아 올 거라고는 경제 위기가 올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정부는 계속해서 괜찮다, 컨트롤되고 있다, 안전하다라는 말을 강조해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정부는 하룻밤 만에 말을 바꿨다.
우리 집은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직원도 30명 정도 넘게 있었다.
그러나 하루만에 공장에 있던 모든 기계가 은행에 빼앗겼고, 공장은 문을 닫았다.
공장을 가동할 수 없자 적자는 쌓여만갔고 결국 빚이 되어 아버지는 공장을 접었다.
빚만 해도 그때 당시에 1억원 그때 당시 1억 원의 가치를 현재로 환산한다면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때 당시 한 가정이 1억원의 빚을 지고 길바닥에 내몰렸다고 생각을해봐라..... 상상조차 하기가 싫을 거다, 하지만 난 그런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자랐다, 집안이 어떻게 무너져가기 시작했는지를 어렸을때부터 보고 자랐다는 뜻이다.
그런 시기에 나의 남동생이 태어났다, 그 귀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이 태어났음에도 세상은 무너지다 못해 몰락했다, 나로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가정의 불화는 지속되었고 그 결과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아버지란 작자는 도박과 술에 미쳐 살았고, 어느 날 강원도로 가서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중학생때 일이었다.
나는 그때 또 한번 결심했다.
어머니는 우리 둘을 먹여 살리기위해 하루하루를 고생하며 몸을 깍아내리고 피땀흘리며 살았다, 하지만 이 냉혹하고 냉정한 사회에 여성한명이 일을해서 두 자식을 먹여살린다는건 쉽지가 않았다, 겨우 입에 풀칠정도나 할 수 있는 정도였고 외식이나 고기를 먹어본다는건 학교급식을 제외하고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나로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 또 한번 결심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될 때 어머니의 몸은 너무나도 망가져있었다.
당뇨는 걸리다 못해 그것이 녹내장으로 이어졌고, 예전에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무리하게 일을했던 어머니의 몸은 매일 근육통과 진통제를 먹어야만 버틸 수가 있었다.
매일 당뇨약을 먹어야했고, 매일 녹내장의 악화를 막기 위해 특수안약을 매일 넣고 자야만했다, 돈을 벌어도 약값으로 나가기 바빴다.
평생 고칠 수 없는 지병이 이미 몸에 남아버린 것이다.
나는 그때 또 한번 결심했다.
동생은 한참 어렸다, 생각도 많이 어렸고 남들보다 이해력도 부족했다.
덩치가 큰 것도 아니였고, 공부머리나 일머리가 잘 돌아가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에 반면에 나는 한번 본 것은 오랫동안 머릿속과 기억 속에 남아있었고 나는 그것을 손쉽게 끄집어낼 수 있었다, 남들과는 다른 능력이 있었고, 단순한 주입식 교육이었던 대한민국의 교육의 수준은 너무나도 쉬웠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뛰어날 수 있었지만 그 교육방식은 나에겐 맞지 않았다, 너무나도 교육수준이 낮다는 뜻이다.
그때 내가 관심을 둔 것이 IT분야의 공부였다.
나는 컴공과 진학을 희망했고 전교1등 수석을 차지했던 나는 대학교의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나는 군대를 일찍 다녀온 후 컴공과를 졸업한 뒤 국내 IT대기업에 입사를 했다, 하지만 그 기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를 마친 뒤 나는 사직서를 회사에 제출했다.
대기업 회사를 다니며 인맥을 쌓았던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미국에 본사를 두고 캐나다에 자사를 둔 IT회사에서 나를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회사는 내가 면접 보러 올 수 있도록 왕복 항공티켓을 보내주었다.
나는 바로 티켓을 받아들고 캐나다에 도착해 현지 면접을 마치고 바로 채용되었다.
면접 질문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당신 XX 대기업의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를 주도해 기획했다는데 맞나?”
“그렇다.”
어떤식으로 개발을 하게되었는지, 계기는 무엇이었고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었는지 기타 등 다양하게 물어봤다.
마지막으로 면접을 마칠 때쯤 면접관이 했던 말이 기억에 제일 남는다.
사실 소프트웨어 개발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것보다 당신이 우리와 언어 소통이 가능한지가 이번 면접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었다라는 것이다.
면접관은 대화를 나눠보니 우리와 소통 하는것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며 연봉협상을 바로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거기서 한국과 선진국의 차이점을 바로 이해 할 수 있었다.
나는 면접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 나는 캐나다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뜯어 말리셨다.
한국 사람은 한국에 살아야한다며 내가 캐나다를 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셨다.
내가 IT 대기업을 관둘 때도 어머니는 나를 뜯어 말리셨다.
어머니는 내가 컴공과를 지원 할 때도 나를 뜯어 말리셨다.
나 자신 스스로 대학등록금까지 전부 장학금으로 받아서 가는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머니께 많은 것을 바란 적은 없다.
한국에서 여성 혼자서 두 아이를 기르는 것은 쉽지가 않다.
몸이 망가져가면서 우리를 키워준것에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대학교에 진학할 등록금까지 마련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그냥 내가가는길을 응원해주기를 바랬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나의 욕심이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와 내 동생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캐나다로 넘어가 정착하고 잘되서 기필코 내 가족을 데려 올 거라고 굳게 다짐했다.
내 동생에겐 카톡으로 이민을 간다는 말만 남기고, 제대로 된 말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조금 미안했지만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미련을 남기고 갈 생각은 없었다.
나는 대한민국을 떠났고 캐나다에 정착하며 순조롭게 잘 살게되었다.
무엇보다 국내 기업의 문화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고 매일 야근을 일삼으며 직원들을 극한까지 내몰고 벼랑끝까지 내몰아서 피를 빨아먹는 그런 집단 문화가 아니였다.
나는 정말 순조롭게 그들의 문화와 나의 삶을 적합하게 유지할 수 있었고 그들과 소통도 잘 되었으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디자인을 할 때도 팀워크가 잘 맞았고 클라이언트와 오너의 요구조건도 쉽게 충족할 수 있게 잘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사내의 영업부 쪽에 일하고 있는 백인 여성과 교제를 시작한 후 같이 집을 사고 동거를 한 후 몇 년이 지나 결혼을 했다.
나는 간간히 한국의 상황을 뉴스를 통해 접하고 있었다.
적어도, 한국의 경제나 안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도는 이해할 만큼의 정보를 업데이트하며 보고 있었다, 적어도 가족에게 한번쯤 연락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곤 있었지만, 내코가 석자였었고, 어머니와 갈등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먼저 연락을 선뜻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제는 한국으로 하루라도 빨리 가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2024년 한국의 경제가 급격하게 몰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회사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개발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할애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1년이 흘러 2025년 이제 한국으로 가서 가족을 만나봐야겠다고 할 때쯤 나의 아내가 임신을 했고,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1년이 다시 흘러 2026년 아내의 6주간의 산후조리를 마치고 나는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혼자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해 월세 아파트인 우리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그곳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집앞의 가까운 공인중개사 부동산에 찾아가 상황을 물었다.
그 결과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어머니는 일찍이 지병에 때문에 돌아갔고 그 아들은 집 앞 횡단보도에서 트럭에 치여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 소식 때문에 그 아파트방은 나가지도 않는다며 내게 그 아파트방에 살 생각이냐며 싸게 해줄테니깐 살 생각이 있냐며 묻길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나왔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아내의 전화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고 끊었다.
나는 집근처 동사무소를 방문해 동생과 어머니의 유골이라도 보관되어있는 곳이라도 찾기 위해 방문했다가 경찰서를 들리고 구청을 방문하고 시청을 방문해서야 나는 유골함이 안치되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유골함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아내의 전화, 회사의 전화가 연 달아서 오며 휴대폰 벨이 울렸다.
나는 휴대폰 전원을 끊었다.
그리고 유골함을 관리하는 안치소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이 두사람의 묘를 만들어서 따로 관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리둥절)누구신데?”
“이유는 묻지 말아주시고요.”
“사정이 있나 보구만 좋아, 1억에 묘까지 만들어서 관리까지 해주겠네.”
“카드 됩니까?”
“요즘 시대에 현금으로 거래하는곳이 있나?”
묘는 굉장히 빨리 만들어졌다.
대략 나는 3달을 한국에서 머물며 매일 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봤고 땅속에 묻어 안치는되는것까지 모두 지켜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회사의 보안요원들이 나를 찾아왔다.
“이제 그만 본국으로 돌아 오시는게 어떻습니까?”
“그럴 생각이 없다.”
보안요원들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이렇게까지는 안하려고했는데....”
“나를 힘으로라도 억지로 끌고갈 생각이라면 버리는게 좋아.”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방법을 쓰겠습니까?”
그러자 보안요원들 뒤에서 와이프와 와이프 품에안겨있는 내 아기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 자식들이 나를 협박하는거냐?”
“아직, 당신이 우리나라를 위해 해주실 일들이 많습니다, 여기서 의미없이 시간을 쓰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
“3달 정도면 충분히 시간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만?”
“............”
“당신의 가족은 더 이상 이 묘의 땅속 유골함에 안치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눈앞에 와이프와 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알겠다, 한 달 만 시간을 더 줘라.”
“그렇겐 안됩니다.”
“이 시q바 쉑히들이;;”
“안됩니다.”
“알았다, 3주 만 더 이상 나랑 딜을 하려고하지마라.”
“좋습니다.”
“여보, 먼저 엘리스 데리고 돌아가 있어, 난 마무리하고 돌아갈게.”
“싫어, 당신이랑 같이 돌아 갈 거야.”
“3주 정도만 더 있을 생각이야.”
“그럼, 그때 같이 돌아가자.”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이야?”
“난 그래도 상관없어.”
보안요원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보안요원의 눈치를 살폈다.
“예, 3주 정도만 더 시간을 줬으면 좋겠다는 요청입니다.”
“와이프분도 같이 한국에서 지내다가 같이 돌아가는 걸로 하고 싶다는 모양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고맙다.”
“이정도로 뭘요.”
“만약, 내가 계속 안가겠다고 했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알고 싶으십니까?”
“아니;;”
“대화가 통하시는 분이니 그런 유혈사태를 상정하지 않고 왔습니다.”
“개소리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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