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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생체병기가 되었다-2화 (2/65)

〈 2화 〉 0.2

* * *

질색한 인간들이 다시 돌아온 후, 나에게 어떠한 '조치'를 가했다.

정신이 멍해지고 시야가 멀어진다.

주변의 마나 농도가 낮아지고 있다.

드래곤들이 사용하던 마법의 일종인가?

비슷한 마법에 다른 생체 병기들이 당하던 것을 몇 번 보았다.

동체를 움직여 마법의 범위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실패한다.

인간의 마법은 드래곤이 사용하던 것보다 조금 더 날카롭고 효율적이었다.

자신들이 만들었으니 어떠한 대비책 역시 준비되어있었나보다.

낮아진 지능 때문인지, 개량 슬라임의 특성인지 죽음에 대한 공포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아득해질 뿐.

겁쟁이 녀석들.

콕피트에 타는 게 그렇게 무섭더냐.

하나가 되면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데.

정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진 모르겠다.

내 앞엔 어느새 울적한 표정의 인간이 서있었고, 멀리 떨어진 곳에 지금까지 내 실험을 진행한 연구원 위치의 인간들이 보였다.

울적한 인간의 복장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투박하고 허름한 복장이었다.

재질 역시 영 좋아보이진 않는다.

마치 세상 끝난 것 같은 표정.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 못 한 듯 꾀죄죄한 몰골.

비루한 영양 상태.

사형수인가.

인간들의 생각은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보인 적 없는 패턴을 보인데다, 그 목적이 명확하니 사람이 탑승하면 어떻게 되는지 꼭 알고싶었겠지.

사실 내 콕피트엔 별다른 기능이랄 것까진 없다.

내가 좀 더 전투에 의욕을 낼 뿐.

조금 희망적인 관측을 해보자면, 지금의 나는 슬라임이고 인간이었던 전생에도 운동신경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으니, 이 세계의 훈련 받은 전투원이 탑승해서 내 동체를 조종하고 내가 그 동작을 따라하면 전투력이 상승할 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

미디어 매체에서 '재능'이라든가, '타고난 전투 센스' 라는 것에 기대볼 수라도 있다는 점?

솔직히 말해서, 나를 제외한 개량형 슬라임은 가끔씩은 멍청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싸움을 못 한다.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악에 받쳐서 주먹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초등학생 보다도 못 하다.

우리에겐 그런 '악'이라거나, '깡다구'랄 게 없으니까.

그저 질량과 전투 지속력으로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나 역시도 그런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계 첫 인형 병기에 사형수를 태운다는 사고방식은 용납할 수 없다.

내 로망을 철저히 짓밟는 행위다.

로봇의 탑승자는 고된 훈련을 통과한 엘리트 파일럿이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로봇에 탑승하게 된 청소년이어야 한다는 '상식'을 모르는 건가?

최소한 로봇 개발자와 혈연 관계를 지닌 낙하산 정도의 '개연성'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물론 이세계인이 그런 사실을 알리가 없지.

상관없다.

모르면 알려줄 뿐.

부정.

내 사념파를 감지한 연구원이 접시에 담긴 마석 가루를 내민다.

꾸짖을 갈(?)!

감히 나를 마석 가루로 사려고 드는가!

부정. 부정.

연구원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더니, 잠시 후 누군가가 주먹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돌을 가져왔다.

아니, 그냥 돌이 아니다.

마석.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가루가 아닌 진짜 마석이다.

저 마석을 통째로 삼키면 어떤 쾌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한 줌의 가루로도 반나절은 짜릿짜릿한 상승감에 몸을 떨 수 있었는데, 저만한 마석을 녹여먹으면 얼마나 오랫동안 행복해질 수 있는 거지?

영롱한 마석의 빛이 태양에 일렁이며 나를 유혹한다.

보고있자니 정신이 쏙 빠진다.

마석 안엔 우주가 들어있었다.

덜걱. 덜걱.

'……?'

덜걱이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다가온 사형수가 내 콕피트를 힘으로 열려고 하고 있었다.

분명히 꼭 닫아놨는데 어느새 헤벌레 하게 벌려진 거지?

사형수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본다.

여전히 끔찍하게 음울한 표정.

의지라곤 없는 팔짓.

지시에 따라 콕피트를 열면서도, 마음속으론 제발 열리지 말라고 기도하는 게 뻔히 보인다.

거대한 크기의 마석.

저 마석은 매력적이지만, 이런 사형수를 태웠다간 전투에 대한 의지는 커녕 나까지 무기력해질 것 같다.

조심스레 사형수를 밀어낸다.

사형수는 내가 움직이자 바짝 쫄아 가만히 굳어있다.

3개뿐인 손가락으로 사형수의 몸을 쥐어 멀리 떨어트린다.

부정.

그렇게 파일럿을 얻을 기회는 사라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연구원들은 거절하기엔 너무 큰 마석을 추가로 가져오진 않았다.

전투는 계속 되었다.

점점 빈도가 높아지던 악마와의 전투는 이제 일상이 되었다.

드래곤은 멸종된 건가.

인간의 감수성과는 멀어진 나지만, 악마가 내뿜는 기운엔 뭔가 이질적인 감정을 느낀다.

마나와는 확실히 차별된 그것.

이 세계는 마기도 따로 있는 건가.

그럼 신성력도 있나?

그 의문은 얼마 되지 않아 해소되었다.

드래곤보다 강력한 악마들에 의해 생체 병기들이 속속들이 무력화당하자 인간들이 전장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내가 전생에 소설로만 읽었던 오러니, 마법이니, 신성력이니 하는 걸 사용하며 악마에게 맞섰다.

단순한 물리력이나 내구력은 당연히 생체병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마법과 신성력은 악마에게 효과적이었다.

특히 자연적으로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입은 내게 사제처럼 보이는 인간이 신성 마법을 사용하니 말끔하게 나았다.

아아, 이것은 「리커버리」라는 것이다───.

사제에게 긍정의 사념파를 보내며 콕피트를 열어보았지만 역시 질색하며 고개를 급하게 저었다.

지금까지 드래곤과의 전투에 생체병기만 투입되었던 것은 상성의 문제였던 것인지, 인간들의 참전은 전투의 양상을 꽤나 바꿔놓았다.

지금까지 몬스터와는 격이 다른 생존력을 가진 악마를 상대하려면 그야말로 다진 고기가 될 때까지 찍어 누르는 것도 모자라 확인 사살까지 해야했지만, 인간이 참전한 이후론 신성 마법 좀 쏴주니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악마들의 마법은 인간 마법사가 파훼하거나, 생체 병기의 동체에 특수한 문양을 그려넣어 방어막을 발동하게 해주는 등으로 경감시켰다.

악마와의 싸움에서 얻는 게 있었는지, 내 동체에도 이런저런 문양이 추가되었다.

오러를 사용하는 전사들은 아무래도 생체병기에 밀릴 수밖에 없었지만, 몸이 작고 날렵한 그들은 전략적 거점을 점거하고 주둔하는 것 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겠지.

나는 적어도 군대에서 그렇게 배웠다.

악마들을 조금 더 사냥하니 사념파의 성능이 올랐다.

긍정/부정에 희로애락까지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좋다.

덤으로 인간의 감정까지 희로애락의 형태로 내게 은은하게 전해져왔다.

그들이 느끼는 것은 슬픔(?).

전해는 표정과 분위기로는 절망과 체념?

그러고보니 전쟁이 길어지면서 마석의 보급 간격이 점점 길어지거나, 갑옷의 수리가 제때제때 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났다.

지금 내 동체는 처음의 삐까뻔쩍함은 사라지고, 비슷한 소재로 군데군데 땜질하거나 대충 굴러다니는 철쪼가리로 구색만 맞춰놓은 부분이 많았다.

내가 동체를 변형시키는 실력이 점점 늘어나서 다행이다.

콕피트를 없애면 좀 더 번듯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이건 이미 오기다.

제발 콕피트에 올라와.

모든 것을 손에 넣어.

거기서 더욱 시간이 흘렀을 때, 조금 힘들긴 해도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던 악마와의 전쟁 중에 인간들이 절망한 이유를 알게 됐다.

천사의 등장.

날개를 달고 하늘하늘한 복장을 입은 금발벽안의 미형 천사가 아니라, 어디 아포칼립스에서나 등장할 법한 기괴하고 감정이 없으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천사가 전장 곳곳에 등장했다.

하늘이 검붉게 물들고 마나와 신성력이 요동친다.

인간들은 환청이라도 들리는지 정신이 나가서 귀를 막고 고래고래 아우성친다.

드래곤과 악마, 천사까지 이어지는 전쟁.

대체 인간들은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적까지 튀어나오는 것인가.

어처구니가 없지만, 역시 깊게 알고 싶진 않다.

솔직히 내 알 바 아니다.

개량되었다지만 내 근본은 슬라임.

인간들은 내 전투 능력에만 관심이 있었고,

나는 인간들을 콕피트에 태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

'천사'의 음성이 들리며 땅이 뒤집어진다.

흔들림이 멈추지 않고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대지진이라도 일으키는 건가?

억지로 자세를 잡고 크게 도약해보지만 하늘에 있는 천사에겐 닿지 않는다.

아쉬운대로 손에 쥐고 있는 칼이라도 던져본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칼은 천사가 뿜는 무형의 힘에 막히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 역시 안 되네.

바닥에 추락해서 대자로 쭉 뻗는다.

내 동체에 인간과 악마 몇 개체가 찌부러진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주위에 비치는 풍경은 그야말로 종말 그 자체다.

결국 유인 인형 병기의 꿈은 이루지 못 했지만 마석 가루는 달았고, 마지막엔 희귀한 구경도 해볼 수 있었다.

전생에 비하면 스펙터클한 인생, ……병기생이었다.

천사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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