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생체병기가 되었다-5화 (5/65)

〈 5화 〉 1.3

* * *

파일럿은 진화 활동부터 시작했다.

그래봤자 엄청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우물도 없는 조그마한 집락촌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봤자 불타고 있는 움막을 걷어내어 한 데 모아서 내 팔로 툭툭 내려쳐보고, 밟아도 보고, 모래를 뿌리는 시늉이라도 해보는 데 지나지 않았다.

사실상 파일럿이 불을 꺼서 꺼진 게 아니라, 탈 게 다 타서 꺼진 상황에 가까웠다.

그렇게 진화 활동을 하는 동안 파일럿의 감정이 간헐적으로 북받쳐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진정됐다 하면 어김없이 눈물이 흘러나왔고, 딸꾹질이 이어졌다.

파일럿이 내뿜는 미약한 마나가 담긴 눈물은 모두 내가 '처리' 했다.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이런 귀한 것은 한 방울도 낭비할 생각은 없다.

진이 빠진 파일럿은 불꽃이 잦아들어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잿더미 옆에서 기절하듯 잠들었다.

파일럿이 수면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주변을 한 번 슥 훑어보고, 동체 개조부터 시작했다.

처음부터 대충 만들어놓은 콕피트는 방독, 방연, 방진 등의 기능이 하나도 없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고블린과의 전투가 끝난 직후부터 부랴부랴 동체에 섞여있는 나무뿌리나 돌멩이, 풀떼기 등을 이용해 필터 비슷한 거라도 만들었지만 이미 콕피트 내부엔 연기가 약간 스며들어오고 말았다.

오랫동안 폐로 호흡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그런 게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었다.

명백한 내 실책이다.

지금은 잿더미 옆에 있어도 연기가 들어오고 있진 않지만, 파일럿이 탄내 정도는 느낄지도 모른다.

하필 파일럿이 잿더미 옆에서 곧바로 잠들었기 때문에 콕피트를 열어 환기를 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조심스레 동체를 바닥에 눕히고, 하체부터 동체를 재구성한다.

처음부터 짧았던 하체 부분의 흙더미를 상체로 돌리면서 콕피트를 서서히 위로 전진시킨다.

파일럿이 일어날 때까지 사용하지 않을 팔도 찰흙처럼 상체에 흡수시켜 재료로 사용한다.

파일럿이 깨지 않도록 천천히.

마치 바닥을 기는 달팽이처럼, 콕피트를 제외한 모든 파츠를 하체부터 제거해서 상체쪽으로 옮기는 방법으로 잿더미에서 멀어진다.

잿더미로부터 충분히 멀어져 콕피트를 개방하고 환기를 시작했을 땐 이미 새벽의 절반이 지나간 후였다.

기본적으로 시간을 신경쓰지 않았기에 내가 슬라임으로서 태어난지 몇 년이나 지났고, 생체병기로서 활동한지 몇 십년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개량 슬라임들에게 마석가루를 보급하던 '사육사'위치의 인간이 점점 늙어가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전쟁을 진행하며 몇 번씩 교체되었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갈 수록 지성이 점점 또렷해지고, 내가 개량 슬라임으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의 범위가 늘어나는 것은 체감이 됐다.

그리고 정신력을 깎아먹게 생긴 천사에게 당한 뒤 내 동체가 주변 지형에 파묻힐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본체를 꼬물꼬물 움직여 잠이 든 파일럿의 하관을 덮는다.

반 쯤 벌려진 입을 타고 들어가 더욱 안으로 파고 든다.

파일럿의 몸에 흐르는 마나가 달콤하다.

하려던 것을 잊고 잠시 그녀의 마나를 만끽한다.

떠오르는 것은 별천지.

전생의 지구과학이나 인터넷 사진으로만 접했던, 영롱한 빛을 내뿜는 성운과 숨막히는 존재감을 내뿜는 은하의 바다.

그녀의 육체에서 우주를 느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작업을 재개한다.

파일럿은 오늘 수분을 많이 잃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수증기와 동체 등판에 닫고 있는 식물들에게서 수분을 긁어모아 파일럿에게 물방울을 공급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좋다.

화재가 일어난 주변의 공기는 호흡하기에 적절한 환경이 아니다.

내 본체를 마스크 삼아 지금까지 내가 느낀 공기와 지금의 공기를 비교하며 파일럿에게 신선한 공기만 공급하고, 그녀의 날숨을 빼낼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좋다.

진이 빠져 잠에 든 상태로 밤바람을 그대로 맞게 되면 파일럿의 컨디션을 해칠 가능성이 크다.

대기 중의 마나와 파일럿이 내뿜는 마나를 이용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내 본체가 약간의 열을 띠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할 수 있다.

좋다.

수분 쪽은 물 한 컵은 어림도 없고, 아슬아슬하게 목을 축일 수 있는 분량의 수분이라도 공급할 수 있다면 감지덕지다.

하지만 호흡과 보온 쪽은 생각보다 잘 돼가는 게 느껴진다.

시야가 방해되면 안되기에 콕피트의 환기용 틈새에 필터는 유지해야겠지만, 그 이상의 공조 시스템은 당분간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보인다.

최후의 파일럿 슈트라는 건 나 자신이 슈트가 되는 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아예 머리까지 모두 감싸, 기동중 파일럿의 머리와 시청각계까지 보호하고 싶지만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선 단념해야 할 것 같다.

호흡계를 담당하려고 하는 것 부터 큰 모험이다.

파일럿의 생명 유지는 문제가 없어보였기에 동체로 관심을 돌린다.

아직까지 고릴라 형태를 버릴 계획은 없다.

내 생각보다 뛰어나지만, 파일럿은 이제 겨우 내 동체를 다루는 데 익숙해진 상황이고 울퉁불퉁한 산지에서 짧은 하체와 긴 팔의 사족보행 방식은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은 전체적인 구조보단 디테일을 손보기로 한다.

예를 들어 관절이나 손가락같은 부분.

이런 부분은 시간을 들이면 들일 수록 성과가 나온다.

방금 전엔 잠에서 깨다 말은 듯한 정신상태로 파일럿에 정신이 팔려 부랴부랴 팔다리를 만들었다지만 지금은 다르다.

전쟁 중의 갑옷 동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파일럿의 몸에 찰싹 달라붙은 본체로 그녀의 근육과 신경, 혈맥, 마나가 흐르는 길을 관찰하며 모방할 수 있는 부분을 모방한다.

완전히 똑같이 만들 필요는 없다.

인간의 몸은 전투에 최적화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파일럿이 오늘 특히 불만을 표한 손가락에 대해선 인식을 수정한다.

싸우기 위해선 저렇게까지 섬세한 선을 그리는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필요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 내가 한 행동을 되새겨보자면 전투 시간보다 작업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파일럿의 혈육을 묻고, 움막에 붙은 불을 끄고.

인형 병기의 장점은 다양한 상황에서의 범용성과 직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고민할 필요 없이 인간이 자신의 몸을 움직이듯 움직일 수 있어야 하고, 예상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손가락 대신 갈퀴를 달고 있는 상황에선 범용성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손에 달린 갈퀴 대신 네모난 손가락을 다섯 개 만들어낸다.

관절은 두 개.

엄지손가락이 다섯 개 달린 꼴이지만 이성과 감성을 타협시키려면 어쩔 수 없다.

이런 투박한 인형 병기에 디테일하고 길다란 손가락이 달려있는 것은 멋이 없다.

순서가 반대가 된 것 같지만, 콕피트와 사지의 전체적인 형상도 손본다.

콕피트는 파일럿을 감싸는 거꾸로 된 달걀 형태로.

인간의 도구를 사용하거나 마차를 끌거나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손목으로 갈 수록 지금보다 가늘게.

하지만 몬스터와 야생동물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도록 어깨는 두껍게.

하체도 오늘 파일럿이 달려나갔을 때 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과 내 하체에 걸리는 부하를 떠올리며 길이를 적당히 조절한다.

지금까지 없었던 머리는 굳이 만들어둔다.

파일럿은 내게 탑승한 후 지금까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겠지만, 나는 머리가 없었다.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머리가 달려있지 않은 거대 흙덩이도 나름 괜찮겠다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전투로 생각을 고쳤다.

나 혼자 동체를 조종하며 싸울 땐 드래곤은 물론이요, 악마까지 수 없이 토벌해왔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 안에 사람이 들어있다.

동체로 전해지는 충격은 내가 흘려내주기 때문에 육탄전 좀 한다고 파일럿에게 뇌진탕이 발생할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동체를 뚫고 콕피트에 직격으로 꽂히는 공격을 받게 되면 나는 파일럿을 잃게 된다.

모든 전투는 압도적으로.

또한, 가용한 안전 장치는 모두 활용하는 방향으로.

내 동체에 머리를 만드는 것은 그러한 안전 장치 중 하나다.

사람 꼴을 한 무언가와 싸우게 된다면 일단 머리와 가슴을 노리기 마련이다.

머리를 만들어 일부러 노출시키고, 공격 받을 때마다 적당히 아파하는 표정을 만들어주면 꽤나 쏠쏠한 미끼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슴 부분은 고릴라 형태의 구조 상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두 팔로 비교적 신속하게 방어할 수 있는데다, 애초에 콕피트가 심장에 해당하는 곳보다 아래의, 명치와 아랫배 부근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무엇보다 머리를 만들지 않으면 메인 카메라를 당할 수 없다.

메인 카메라가 당하는 것은 중대 문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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