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생체병기가 되었다-8화 (8/65)

〈 8화 〉 1.6

* * *

성벽의 안쪽엔 도시가 있었다.

이미 많은 실망을 하고 기대치를 조정했기 때문인지, 도시의 모습은 생각보다 봐줄만 했다.

길거리에 분뇨가 흐르지도 않았고, 석재로 지은 건축물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각양각색의 인종이었다.

아니, 이미 인간을 넘어선 무언가.

난쟁이, 요정, 수인.

개체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전쟁 중엔 단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존재들, 전생의 판타지 소설에서만 등장했던 이들이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세계가 본래 판타지스러운 세계라는 것은 이미 인식하고 있었어도, 예전엔 분명히 인간만의 세계였다.

이런 광경은 생전 본 적이 없다.

내가 의식을 잃은 기간을 어렴풋이 수 백년 단위로 잡고 있었는데 생각을 고쳐야 할 것 같다.

수 천년. 어쩌면 만년 이상.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사실상 화석이 움직이는 수준이 아닌가.

본래 슬라임의 기대 수명이 어느정도지?

나를 개량한 마법사들은 대체 무슨 괴물을 만들어낸 것인가?

내가 파일럿 슈트 행세를 하며 파일럿의 호흡계를 책임질 수 있었을 때 깨달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봉인된 고대 병기이자 로스트 테크놀로지의 집합체이며,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에이션트 슬라임이다.

나쁘지 않다.

좋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

내 기쁨의 사념파를 느낀 집락촌민이 싱글싱글 웃으며 파일럿의 등을 두드린다.

파일럿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별 반응이 없다.

거리를 걷고 있는 일행에겐, 정확히 파일럿에겐 무수히 많은 놀라움과 경계심이 쏟아지고 있었다.

저기 저 여자 좀 봐.

어머나, 슬라임을 입고 다니잖아?

새로 유행하는 패션인가?

어떻게 길들인 거지?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고만고만하기 마련이니, 모르긴 몰라도 그런 식으로 수군거리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점액질을 걸치고 다니는 패션이 유행할지도 모르지만, 아쉽게도 개량 슬라임은 생산이 옛날옛적에 중지된 앤티크다.

사인, 곤란.

목재로 지어진 식당에 들어간 일행은 금속 조각을 내고 2층으로 올라갔다.

좁은 복도와 늘어선 방문을 보면 여관인 듯 하다.

방금전에 낸 것은 역시 돈이었고.

일행은 남자 방과 여자 방을 따로 잡았다.

집락촌민 중 여자는 파일럿과는 혈연관계가 아니어보였지만, 연상인듯 했다.

칭얼대는 파일럿을 위로하며, 그녀 모르게 킥킥대며 웃고 있다.

방에 들어온 파일럿은 나를 벗으려는 듯, 내 본체를 붙잡고 떼내려고 한다.

물컹물컹한 내 점액질 본체는 아무런 마법적 처리가 가해지지 않은 일반인의 맨손으로 붙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기분이 내켜 형태를 유지하며 붙잡혀주지 않는 이상은.

하지만, 어딜.

부정의 사념파를 발한다.

"놔줘."

여러번 들어본 말이 나온다.

역시 놔줘였나보다.

하지만 나는 다시 부정의 사념파를 발한다.

개량 슬라임은 드래곤이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지 않는 이상 끈어지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특수한 몸체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파일럿에게 가해지는 충격을 흘리다보니, 어지간한 공격은 티도 안 날 정도로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에이션트 슬라임의 파일럿 슈트는 완벽한 방탄, 방검, 충격 흡수 능력을 자랑한다.

귀한 몸인 파일럿이 이렇게 좋은 걸 놔두고 위험요소가 산재한 우범지역을 돌아다니게 할 순 없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

온 세상이 우범지역이다.

나와 기싸움을 벌이던 파일럿은 집락촌민 여성이 무언가 길게 설명하고 설득하자, 결국 단념한듯 나를 떼내려던 행동을 포기했다.

뭐라고 했는진 모르지만 좋은 지원사격이었다.

그녀에 대한 평가를 조금 높인다.

어느새 기쁨의 사념파가 흘러나갔는지, 그녀가 깔깔대며 웃고 파일럿이 짜증을 냈다.

남자 방에 잠깐 얼굴을 비추고 파일럿과 집락촌민 여성이 향한 곳은 공중 목욕탕이었다.

현대처럼 개인 공간까지 모두 커버하진 못하더라도, 이곳은 도시 단위의 상하수도 시설이 설치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또한 목욕탕의 가격은 서민처럼 보이는 이들도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하고, 그것을 기꺼이 이용할 정도로 이세계인들은 꽤나 위생관념이 있는 편인 듯 하다.

탈의실같은 곳에 들어서자, 옷을 갈아입던 사람들이 숨을 들이 삼키거나 놀라움을 표했다.

파일럿은 애써 무시하고 개인용 바구니 앞에서 다시 한 번 말한다.

"놔줘."

긍정의 사념파를 발한다.

파일럿에게서 기쁨의 감정이 느껴진다.

당연히 놔주진 않는다.

옷을 입고 있을 때도 불안한데, 알몸이 된 상태의 파일럿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긍정.

괜찮다.

파일럿이 옷을 갈아입는 절차는 몇 번 봐두었다.

조끼의 끈을 풀고 어깨 구멍에 맞춰 천천히 벗긴다.

치마는 꽉 조여둔 끈을 풀면 쑥 내려가게 돼있다.

"──?? ───???"

내가 긍정을 표현해놓고 파일럿의 몸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멋대로 옷을 벗기자 파일럿이 당황하며 흘러내리는 옷을 붙잡는다.

괜찮다.

셔츠까지 끌러내자 파일럿은 금방 속옷차림이 된다.

옆에서 구경하던 아낙들의 입에서 탄성이 나온다.

"──."

"──. ──."

어머, 어머머.

딱히 필요는 느껴지지 않지만 기억해둔다.

파일럿이 급하게 속옷을 붙잡지만 소용없다.

마침내 내가 속옷까지 벗겨내자 박수 소리까지 들린다.

전염되듯 조금씩 퍼지는 박수 소리.

파일럿은 나의 성능에 어찌나 감격했는지, 입을 열지 못 하고 벗겨진 옷을 빠르게 바구니에 담은 채 사우나로 뛰어들어갔다.

빠르게 둘러본 결과, 대중 목욕탕은 사우나와 몸을 씻는 우물, 따뜻한 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구의 중세 목욕탕은 어땠는진 모르지만, 사람의 생각은 역시 비슷비슷한 듯 했다.

파일럿의 노폐물은 그때그때 내가 제거하고 있어도 몸 안으로 파고들어 체내의 노폐물을 쥐어짜내진 않기 때문에 사우나를 하며 땀을 빼는 것은 나쁘지 않다.

또한 사우나는 파일럿의 정신건강에 좋은 영향을 준다.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파일럿의 옷바구니 안에 들어갔다.

옷바구니가 많이 작았기 때문에 최대한 몸을 둥글게 말아야 하다보니, 마치 전생의 콘 아이스크림같은 모양이 됐다.

조금 나중에 들어온 집락촌민의 여성이 배꼽을 잡으며 파일럿을 때렸고, 파일럿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우나에서 땀을 뺀 후, 향기는 나지 않는 비누와 유사한 무언가로 몸을 씻고 찬 물을 몇 번 끼얹은 파일럿은 온탕으로 들어간다.

그러고보니 들고 온 옷이 습기에 눅눅해질텐데, 이 옷은 다시 입고 가서 바로 세탁하는 건가?

모두가 바구니에 옷을 담아 들고다니는 걸 보면 이 세계 목욕탕에 개인 락커는 없다.

지금까진 내가 바구니 안의 옷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옷을 신경쓰지 않았기에 바구니에서 슬그머니 내려와 탕에 들어간다.

온탕에는 어느정도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량 슬라임인 나는 태어나서 목욕이란 걸 해본 적이 없다.

전쟁 중에 용암을 몇 번 뒤집어 써봤을 뿐이다.

하지만 대중 목욕탕에서 모두가 탕에 몸을 지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전생의 감성이 살아나서 나도 온탕에 들어가보고싶다는 욕심이 문득 들게 되었다.

내 몸은 예상했던 대로 물에 가라앉지 않고 약간 부유했다.

상대의 참격을 막는 요령으로 몸에 힘을 빡 주면 수면 아래로 내려갈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물에 뜬다.

나는 전생에 배영을 하지 못 했다.

기껏해야 몇 미터 헤엄치는 게 고작이었다.

때문에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 한 부유감이 신선했고, 뜨끈한 탕의 온도도 마음에 들었다.

은은한 기쁨의 사념파를 발하고 있었더니 사우나에서부터 지켜보던 여자가 파일럿에게 말을 걸었다.

내 파일럿에게 무슨 볼일이지?

너는 나의 적인가?

여자의 목적은 파일럿이 아닌 나였다.

파일럿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내게 조심조심 손을 뻗었다.

그런데, 다가오는 손이 한 두개가 아니다.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선 바동바동 몸부림치는 딸을 붙잡으며 혼내는 여성들이 보였고, 그녀들 역시 나에게 흥미를 담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다섯 개 쯤 되는 손이 내 본체를 주무른다.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싶더니, 점점 힘이 가해지며 꽉 쥐어보기도 하고 꼬집어보기도 한다.

야, 잡아당기지 마!

아니, 어, 잠깐, 대체 몇 명이야?

대체 왜 깨물려고 달려드냐고!

예상치 못한 습격에 본체를 버둥댄다.

하지만 여성들은 물장구를 맞으며 좋다고 깔깔댄다.

모조리 쓸어버려야 하는가?

아예, 입도 뻥긋 못하게 도륙(??)을 내버리고 싶어진다.

소동이 점점 커지자 파일럿에게서 미약한 분노의 감정이 느껴진다.

"──! ───!!"

파일럿이 크게 소리치며 나를 품에 끌어안는다.

사나운 분위기에 여성들이 아쉬운 티를 내며 물러난다.

무서웠다.

역시 밖은 위험하다.

마치 대형견을 안듯이 나를 안은 파일럿의 품을 느끼며 뭔가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탕이 따뜻했고 파일럿의 품은 부드러웠으니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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