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1.7
* * *
"─!"
짧은 기합과 함께 집락촌민 남자가 내게 검을 휘두른다.
깡!
"오."
금속성의 소음을 내며 튕겨나오는 검.
내 본체를 길게 늘여 대주고 있던 파일럿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다.
성인 남성이 힘껏 내려치는 검격에도 앞으로 쭉 뻗은 팔이 아래로 쳐지지 않는 것은 물론 내가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지만, 그 원동력은 파일럿의 몸에 흐르는 마나에서 나온다.
파일럿은 몸에 힘을 주거나 집중할 때 해당 신체에 마나를 흘리는 버릇이 있다.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 아마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버릇은 마나를 양분으로 삼는 나와 상성이 아주 좋아서, 내가 낼 수 있는 출력을 급격히 상승시킨다.
마석 가루는 의욕을 내기 위한 별미였을 뿐, 개량 슬라임은 기본적으로 대기중의 마나만 흡수해도 동체를 구성하고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마나 에너지가 열, 위치, 운동 에너지 등으로 전환될 때의 공식이 어떻게 되는진 모르지만, 내 효율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니면 마나 에너지가 무한에 가까운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 효율을 살릴 수 있는 존재가 개량 슬라임밖에 없거나.
어쨌든, 대기에 퍼진 미약한 마나만으로도 무거운 바위나 거대한 강철 갑옷을 전투적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나에게 파일럿이 다이렉트로 정순한 마나를 흘려보내는 상황이다.
비유하자면 개울가에서 돌아가던 수차(??)를 거대한 폭포 아래에 옮겨 설치한 셈.
물론 정말로 그런 짓을 했다간 견고하지 못 한 목재 수차가 떨어지는 물이 주는 부하에 버티지 못하고 축이 나가버리거나 물이 닿는 부분이 부서져 제 기능을 하지 못 하겠지만, 고대 생체 병기인 나는 다르다.
파일럿이 주는 마나에 짓눌리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는다.
파일럿에게서 기쁨의 감정이 느껴진다.
내 성능이 마음에 드는 모양.
몸에 걸친 내 본체를 잡아당겨도 보고, 흔들어도 보다가 전생의 마술사가 과장된 제스쳐로 망토를 나부끼는 모양으로 까불거린다.
역시 사람들의 생각은 다 고만고만하다.
집락촌민은 파일럿을 신발가게로 데려가, 아주 두껍고 견고해보이는 가죽 부츠를 샀다.
정교한 굽이 달려있었다면 워커화로 분류됐을 만한 부츠였다.
신발을 고르는 그들에겐 그들 나름의 확고한 기준이 있었는데, 이제 보니 집락촌민이 입고 있는 복장도 두껍고 신체의 노출이 적었다.
험지에서 이동하기에 적합한 복장으로 보인다.
파일럿에게 비슷한 의복을 입히지 않는 것은 나를 믿는 것인가.
제대로 복장을 갖춰입은 집락촌민 사이에 평상복 차림을 고수하고 있는 파일럿을 보니 내가 파일럿 슈트 행세를 하는 게 실착이었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사라진다.
이들은 파일럿의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내 본체의 충격 흡수 능력과 신축성을 믿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평상복 차림으로 콕피트에 오르는 건 좋지 않다.
언젠가 제대로 된 파일럿 슈트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째서 이 세계엔 라텍스 재질이 없는 거야.
다음에 들른 곳은 어떠한 사무실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전생에서 느꼈던, 평범한 기업의 사무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도서관에 들어가면 피부에 와닿는 공간감과 적막감에 몸이 긴장하는 것 처럼,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과 땀 냄새가 느껴지는 듯하다.
불온한 공간이다.
목욕탕에 다녀온 이후로 발할 수 있게 된 적대감의 사념파를 흘린다.
"──."
집락촌민 남자가 씨익 웃는다.
파일럿이 긴장해 몸이 약간 뻣뻣해지는 게 느껴진다.
내 사념파에 반응했는지 몇몇 험상궂은 남자들이 이쪽을 쳐다본다.
하지만 잔뜩 긴장해있는 소피와, 실실 웃고 있는 일행들을 보고 금세 흥미를 잃는다.
사람이 슬라임을 입고 있는 데도 별 반응이 없다니.
역시 이곳은 수상하다.
일행은 창구로 다가가 접수원에게 파일럿과 나를 가리키며 어떠한 설명을 길게 했다.
몇 가지 문답이 오가고, 신분증 용도로 보였던 나무패에서 무언가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 후 사무실의 직원 몇 명과 함께 다시 이동.
도착한 곳은 성문 바깥이었다.
병사들이 몇 명씩 달라붙어 기다란 나무를 지렛대 삼아 내 동체를 끙끙 옮기는 것이 보인다.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그냥 들어오고 말았지만, 내 거대한 동체를 분리시켜서 성문 앞에 아무렇게나 방치해놓은 것은 분명한 민폐였다.
일행의 얼굴을 알아본 병사가 얼굴을 붉히며 따지듯 소리를 지른다.
집락촌민들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병사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파일럿은 내 동체 방향으로 달려나간다.
분리된 동체는 절반이 성벽에 딱 붙여진 채로 정리돼있었고, 절반은 병사들이 한창 옮기고 있는 중이었기에 파일럿은 그 중간쯤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헤맸다.
나는 본체를 짧게 움직여 파일럿의 등을 툭툭 쳤다.
깜짝 놀란 파일럿이 뒤를 돌아보지만 등 뒤엔 아무도 없다.
내가 다시 파일럿의 등을 치자 한 바퀴 빙글 돈 파일럿은 그제서야 내가 자신의 등을 친 것을 확인한다.
다시, 툭 툭.
말귀를 알아듣지 못 하는 것 같았기에 본체를 늘여 파일럿의 다리를 감싸고 강제로 움직인다.
"─? ───?"
몇 번을 시도하고, 파일럿의 팔을 억지로 들어 콕피트를 가리키고 나서야 파일럿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답답해서 조금 강압적인 방법을 쓰고 말았다.
파일럿의 표정이 썩 좋지는 않다.
이번 일로 너무 큰 반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닫혀있는 콕피트에 도착한 파일럿은 이음매를 찾으려는 듯 계란 형태의 콕피트를 기어오르려 한다.
부정의 사념파를 강하게 발한다.
위험하다.
물러나.
파일럿이 떨어진 틈을 타 본체를 움직여 콕피트 안으로 파고든다.
병사들이 데굴데굴 굴리며 옮겨놨기 때문인지 콕피트가 열리는 방향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구조를 재구성해 방향을 반대로 바꿀 수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단숨에 콕피트를 장악한 나는 데구르, 반바퀴 굴러 콕피트를 개방했다.
"오오."
일행을 따라온 사무실 직원과 몇몇 병사들 사이에서 작은 감탄사가 나온다.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파일럿이 콕피트에 탑승한 것을 기다린 후 콕피트를 닫는다.
밀폐된 콕피트가 어둠에 휩싸인다.
산 속 집락촌에 있었을 땐 투영 마법을 해제하지 않았기에 익숙치 않은 어둠에 당황한 파일럿이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성벽에 함께 정리돼있는 동체에 본체를 뻗어 장악한다.
이미 내가 한 번 장악하고 손봤던 동체라지만, 콕피트든 사지든 장악하는 속도가 예전보다 빨라진 느낌이다.
오른팔과 오른다리라는 것을 확인한 후, 본체를 수축시켜 몸통과 '커넥트'시킨다.
쿵! 쿵!
굉음과 함께 콕피트에 진동이 느껴진다.
급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니 사지를 끌어오는 건 비교적 은밀하고 부드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요란하게 진행한다.
인형 병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력도, 범용성도, 직관성도 아니라 임팩트다.
오른팔과 오른다리가 완전히 안정된 것을 확인한 후 오른쪽 시야만을 콕피트에 투영한다.
파일럿은 눈에 보이는 풍경을 확인하며 손과 다리를 움직인다.
문제 없다.
병사들이 옮기다 말은 왼팔과 왼다리는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파일럿이 몸을 뒤집는 시늉을 한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짓을 하면 사람이 깔릴 수도 있는데.
잠깐 걱정이 들었지만 파일럿의 조종에 따라 동체를 뒤집는다.
급하게 움직이지 않았으니 도망가려면 도망갈 수 있으리라.
동체를 뒤집은 상태에서 왼팔과 왼다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손을 뻗어 왼팔이 달려야 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자리에 가져다댄다.
파일럿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직관성의 승리인가.
아니면 사지가 연결된 순간 신경이 살아나는 감각이 느껴지기라도 하는 걸까.
내가 파일럿의 마나를 받아들이며 영향을 받고 동체를 움직이듯이, 파일럿 역시 내 본체와 동체에서 무언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쿵! 쿵!
파일럿이 미리 위치에 대놓은 왼팔과 왼다리를 '커넥트'하면서 굉음을 내는 건 마나가 약간 더 들어갔다.
하지만 필요한 절차였다.
그 편이 멋있고, 가슴이 뜨거워지기 때문이다.
타이밍에 맞춰 왼편의 시야와 중앙의 시야를 차례대로 투영시킨다.
주변을 둘러본 파일럿은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동체를 일으켰다.
거구의 동체가 일어선다.
시야가 점점 높아지며, 인간들의 크기가 작아진다.
느껴지는 전능감.
파일럿 역시 하루를 쉬었다고 몸이 근질근질해졌는지, 동체를 움직이며 기쁨의 감정을 뿌렸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집락촌민이 박수를 치는 것이 보인다.
사무실의 직원들도, 병사들도 입을 벌린 채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다.
병사들은 내가 움직이는 것을 어제 봤을 테지만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교대 일정에 따라 어제의 광경을 보지 못 한 병사도 있었을 것이고, 지금의 '기동' 장면은 누구나 혼을 빼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임팩트가 있었다.
아쉬워하지 마라.
상대가 나니까.
자부심을 느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