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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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었던 전생에 시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꽃이 되었다는 시는 기억하고 있다.
이름이라는 건 중요하다.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나의 파일럿을 파일럿이 아닌, 소피로 부르기로 했다.
내가 육성으로 대화하거나 사념파로 그녀를 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내가 속으로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을 뿐이지만, 저번 사건으로 소피를 한 명의 인격체로 인식하며 그녀에 대해 다른 방향의 케어를 시도해야할 필요를 느꼈다.
하지만 인간이었던 전생에 보고 느꼈던 감각들이 이제는 사전화된 지식으로 변질돼버렸을 정도로 오랫동안 개량 슬라임으로 살아온 나이기 때문에 당장 적절한 멘탈 케어나 카운셀링, 그녀의 몸에 가해지는 부하 등에 대한 조치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게 사실이다.
애초에 그런 스포츠 심리학이나 의학 등의 지식은 가지고 있지도 않다.
조금 있어보이게 말하자면 Trial and error.
대놓고 말하자면 떠오르는 방법을 닥치는대로 시도한 후 경과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소피를 소피로 부르기로 마음 먹은 것은 그 방법의 일환이다.
소피는 뒤로 굵게 땋은 갈색머리에, 콧잔등에 주근깨가 점점이 찍힌 시골 소녀다.
속눈썹이 길고, 이목구비는 조형적으로 균형잡혀있다.
이 세계에 사는 인간들의 미적 기준은 알지 못 하고, 나 역시 인간이 아니게 된지 오래되었기에 예쁘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그녀의 얼굴이 예쁜 편이라고 생각한다.
자고 있을 때 그녀는 천상 여자로 보이지만, 소피의 성격은 활동적이고 쾌활하다.
약간 괄괄한 수준에 근접할지도 모른다.
사람과 자연이 컨텐츠고, 방 안에선 할 것이 거의 없어 히키코모리라는 성격이 존재하기 힘든 세상이기에 내가 살던 현대와는 기준이 다를 수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녀가 아주 외향적이라고 느낀다.
예전부터 모험가 신분이던, 연상인 집락촌민의 여성과 비교해봐도 몸에 근육이 뒤쳐지지 않는다.
산 속에서 살았던 이력이 있다지만 여관에서 일하는 부인, 그리고 그녀의 딸과 비교해봐도 근육의 형태가 조금 다르다.
육체 노동으로 만들어진 근육이 아닌, 스스로 쉴새없이 움직이며 쌓은 근육이다.
어릴적부터 산과 들을 쏘다녔을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꼭 자고 일어나면 머리를 땋고, 자기 전엔 풀어헤친 머리를 곱게 빗은 후 잠이 드는 그녀의 습관은 부모의 영향으로 보인다.
소피는 먹성이 좋다.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먹어둔다.
집락촌터에 있을 때에도 느꼈지만 정말 가리지 않고 먹는다.
이 세계는 팍팍한 세상이고, 산 속의 움막촌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그녀에게 있어 음식의 소중함은 현대에서 살아왔던 나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거기다 여기에 고열량 식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만일 있다 하더라도 소피가 손쉽게 손에 넣긴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활동적인 그녀가 에너지원을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은 양의 식사 뿐이다.
애초에 유희거리가 적고 쾌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은 세상이다.
식사 후의 포만감은 몇 없는 인생의 낙일 가능성이 크다……만은.
소피는 먹성이 좋다.
정말 많이 먹는다.
그녀보다 많이 연상이지만 아직 현역으로 보이는 집락촌민 남성보다도 한참을 먹는다.
평소에 적당량의 식사를 하는 이유는 식비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보일만큼 먹는다.
산에서 내려오는 도중 야영지의 모닥불을 보고도 달려드는 해괴하게 생긴 멧돼지를 집락촌민이 능숙하게 잡아 구워먹은 적이 있는데, 그 돼지의 1/3가량이 소피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향신료도, 적당한 야채도 없는 상황에서 대단한 먹성이었다.
인간들의 대화를 모두 알아듣진 못 하지만, 그녀와 함께 집락촌부터 살아온 집락촌민들도 놀란 반응을 보이고 정신없이 식사를 하다 사라진 음식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소피의 얼굴을 보면 예전부터 알고있던 사실은 아닌 듯 하다.
내가 24시간 붙어있으며 마나를 흡수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소피도 인간 여성이기 때문에 단순한 내숭이었을 경우의 수도 배제하지 않는다.
소피의 낙이라면 하나 더 있다.
자기 전에 받는 내 마사지다.
내 본체로 소피의 등을 두드린 이후로 그녀가 생각이 났는지 내게 요청했는데, 반응이 참 좋았다.
그녀의 몸에 하루종일 붙어서 근육의 움직임을 파악하다보니, 어디에 부하가 걸리고 어느 근육이 긴장됐는지는 내 눈에 훤히 보인다.
바위든 쇳덩이든, 뭐든지 파고들어 장악하고 휘두를 수 있는 내 본체의 힘이 걱정됐지만, 놀랍게도 소피는 내가 전력을 내서 주무르고 나서야 OK 사인을 냈다.
그러고보니 예전부터 개량 슬라임은 살아있는 동물에겐 힘을 발휘하지 못 했다.
슬라임을 개량한 마법사들이 걸어놓은 어떠한 금제일지도 모른다.
소피는 내 마사지를 좋아한다.
전신을 감싸는 슬라임에게 온 몸의 근육을 일제히 마사지 받는 기분은 나도 겪어본 적이 없기에 알 순 없지만, 몸을 부들부들 떨며 신음을 참다가 해방된 소리를 내는 소피를 보면 많이 좋은 것 같다.
가끔씩 같이 자는 집락촌민 여성이 '얘가 미쳤어, 미쳤어.' 정도의 말과 함께 그녀를 가볍게 때리지만, 마사지 후 숙면과 상쾌한 기상에 중독된 소피는 포기하지 않는다.
중간중간 흥미를 보이는 집락촌민 여성의 반응에 소피가 그녀에게도 마사지를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해주지 않았다.
그녀에게선 달콤한 마나가 흘러나오지 않는다.
마사지 중엔 소피의 모공에서 분비되는 땀과 함께 섞여나오는 마나를 섭취하는 것이 내 즐거움인데, 그게 없다면 굳이 전신 마사지를 해줄 의욕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개량됐어도 나는 슬라임이다.
마나는 달콤하고, 귀찮은 건 싫다.
나의 파일럿, 소피.
활달하고 적극적이며 항상 밝은 모습을 보이는, 성격에 구김이 없는 소피.
그녀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자면,
그녀는 약간,
멍청할지도 모른다.
쿵! 쿵!
"──!!"
해석하자면, 도망치지마! 정도가 아닐까.
키르륵! 케르륵!
하지만 고블린들이 그 말을 들어줄리가 만무하다.
개량 슬라임만이 투입된 드래곤과의 전투 초기엔 동체를 뚫을 방법이 없는 놈들은 우리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인간들에겐 다르다.
고블린은 영악하며 교활하다.
숲과 산에 어울리는 위장색을 활용하며 자신들만의 전장을 이용할 줄 안다.
인간보다 근력이 딸리고 체급도 낮은 고블린들이 소피가 살던 집락촌을 습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모두가 유격전의 베테랑이고, 상대의 감정을 조절하며 전투의 양상을 자신들의 페이스로 끌고가는 방법을 알고있다.
드래곤과의 전투 막바지에 투입된 소수의 인간들이 개량 슬라임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고블린의 꾀임에 빠져 목숨까지 잃는 것을 가끔 봐온 입장에서 내린 판단이다.
소피가 모험가 자격을 얻은 후 수행한 첫 임무는 다름 아닌 고블린 토벌이었다.
고블린에게 혈육을 잃고, 전투 경험도 쌓은 그녀 입장에서는 더 없이 좋은 임무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 동체를 이끌고 놈들의 본거지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그녀는 알지 못 했다.
물론, 진짜 나와 그녀만이 숲과 산을 들쑤시며 고블린을 토벌한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놈들도 지능이 있고 나름의 사회체계가 있으니, 운이 좋다면 집단 주거지를 습격해 한 번에 큰 성과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험가 초행인 그녀는 집락촌민과 함께 행동하고 있고, 인간 전투원과 인형병기의 조합은 고블린과 유격전을 치르기에 적절한 편성은 아니었다.
집락촌에서 고블린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던 요인은 그곳이 나름 개방된 공터였고, 방어전이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승리였지만 몇 마리를 놓치고 말았다.
반면에 이번엔 놈들의 진영으로 공격에 들어가는 입장.
내 거대한 동체는 숲속에서 고블린과 술래잡기를 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물론, 내 동체보다 약간 낮은 나무들을 부수고 헤치며 쫓아가면 다리가 짧은 녀석들을 따라잡을 순 있다.
하지만 인간들이 문제다.
함께 행동하는 집락촌민은 체력에 한계가 있고 전장까지 이동하는 3일 동안 거듭된 야영과 행군에 이미 피로감이 쌓인 상태.
이런 편성으론 놈들의 차륜전과 유격전에 희생될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다.
적어도 오우거 정도는 잡으러 가는 줄 알았더니, 고블린이라니.
소피가 초보 모험가이기 때문에 예상을 아예 못한 건 아니지만,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을 그대로 실현할 줄은 몰랐다.
도시에서 숲까지 이동하는 데 3일.
숲을 들쑤시기 시작한지 이틀째.
5일동안의 성과는 집락촌민 남성이 쏜 눈 먼 화살에 당한, 불운한 고블린 2마리가 전부였다.
어느새 붉어진 노을빛에, 일행은 이동을 중지하고 야영을 준비한다.
집락촌민들은 이미 모험가 자격이 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 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엔 집락촌민들의 전투 방식이 모험가 자격을 딱지 치기로 딴 것 같진 않았다.
그들의 발걸음은 은밀했고, 집락촌에서 내려오며 보여준 멧돼지 사냥과 해체, 아무리 운의 요소가 작용했다지만 나무 사이로 도망가는 고블린을 맞춘 활 실력을 보면 이들은 진짜 전사다.
오히려 고블린은 그들에게 너무 쉬운 상대였고, 나같은 거구의 랜드 마크와 행동한 적이 없으니 고블린에게 이렇게까지 휘둘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 한듯 했다.
모두의 방심과 안일함의 결과였고,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었고, 그 책임 역시 서로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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