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1.12
* * *
"─. 베르제스─."
소피가 콕피트에서 내려와 옷을 팔랑거리듯 내 본체를 팔랑거리며 말했다.
"──?"
"──. ──베르제스───."
"──────."
소피의 설명을 들은 집락촌민들이 나를 보며 베르제스, 베르제스 한다.
나는 그 날부터 베르제스가 되었다.
늦은 오후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고블린의 귀를 쓸어모은 일행은 복귀 준비에 한창이었다.
준비라고 해봤자 내 콕피트 안에 고블린을 꾹꾹 눌러담는 것이었지만.
비교적 밀폐된 콕피트 안에 방부처리도 하지 않은 몬스터의 신체 일부를 대량으로 넣는 데다, 그 바로 옆에 이제부터 복귀하면서 먹을 건조 식량들이 담긴 주머니를 놓는 것을 보며 머리가 아파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블린의 귀만은 특별해서 복귀하는 동안 썩는 냄새가 안 날 리는 없다.
그 냄새가 콕피트 안에 배는 것은 물론이요, 건조 식량에까지 냄새가 배거나 세균이 번식하면 전투력에 크나큰 지장이 올 것이다.
설마 내가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믿는 건가?
내 콕피트 안으로 들어온 집락촌민 남성 둘 다 과장된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이 휘둥그래졌던 것을 보면 도깨비 방망이처럼 뭐든지 가능한 마법의 공간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처음 베테랑 집락촌민이 들어왔을 땐 소피가 신난 목소리로 손가락을 꼽아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했는데, 그 탓도 있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여우굴같던 콕피트가 하루아침에 새 것처럼 변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나를 몸에 두르고 있으면 빨래할 필요도 없고 씻을 필요도 사라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오해가 생겨도 어쩔 수 없으리라.
급한대로 어깨 상부에 공간을 마련해, 뚜껑을 열면 어깨 안쪽 공간에 짐을 수납할 수 있는 적재함을 만들었다.
콕피트의 구조를 바꿔서 좀 더 접근성이 좋은 곳에 만들고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콕피트에 있는 짐을 일단 모두 내리고 하룻밤 정도를 보내야 했기에 지금은 단념했다.
"소피~. 베르제스~."
집락촌민 여성이 콧소리를 내며 소피에게 뭐라뭐라 말을 걸었다.
고개를 끄덕인 소피는 그녀와 내 콕피트를 번갈아 가리키며 '태워줘'라는 단어가 섞인 부탁을 했다.
"우와~!!"
이미 설명을 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눈으로 직접 보는 건 다른지, 온몸과 얼굴, 감정까지 동원해 진심으로 놀라움을 표한 집락촌민 여성은 한동안 콕피트를 이곳저곳 뜯어보다가 소피와 수다를 약간 떨고 적당히 빈 공간에 쳐박혀 잠에 빠졌다.
처음부터 드러누워 자기 위해 콕피트에 태워달라 부탁을 한 듯 했다.
전술이 바뀐 이후로 급격히 피로가 쌓인 탓이리라.
괜히 다른 집락촌민처럼 내 어깨 위에 앉아서 가면서 꾸벅꾸벅 졸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봐주기로 했다.
참고로 집락촌민 남성들은 그들의 몸을 밧줄로 감아 내 어깨 위에 묶어놓은 상태다.
내가 순식간에 뚜껑의 손잡이를 만들었다가, 짐가방을 모두 수납한 후 뚜껑의 손잡이와 이음매까지 없애는 것을 보고, 어깨에 고리를 많이 만들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집락촌에서 도시로 내려올 때부터 조마조마 했겠지.
이렇게 부탁을 하나 둘 들어주다보면 전투 장비보다 편의 장비가 많이 달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뭐든지 적당히 해줘야겠지만, 그래도 안전이 제일이기에 이번만은 순순히 허락했다.
부락촌민 여성이 몸이 많이 결렸는지, 전보다 더 끈질기게 마사지를 요구해왔다.
물론 단호하게 거절했다.
부락촌민 여성은 조금 토라진 체를 했지만 콕피트에 타지 못 하면 손해보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금방 떠올리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그 외엔 도시에서 숲으로 이동했을 때처럼, 도시로 복귀하는 동안은 별달리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넋을 잃고 멍하니 쳐다보는 병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성벽 가까이 동체를 기댄다.
잘라낸 고블린의 귀가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베테랑 부락촌민이 나를 언급하며 소피에게 다른 가방보다 1.5배 이상 커다란 가방을 들게 시켰다.
소피는 겉보기보다 힘이 많이 센 편이고, 내가 소피의 마나를 이용해 동작을 보조하면 저 정도 가방은 들기 어렵지 않지만, 그래도 감성적으로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다.
물론 전생의 감성이다.
이 세계는 다를지도 모른다.
아니면, 베테랑 부락촌민은 모험가 경력에 의해 이용할 것은 이용한다는 성격이 됐을 가능성도 있다.
부락촌민 여성과 사수는 옷과 생필품이 든 가방을 들고 여관으로, 베테랑과 소피는 고블린의 귀를 가지고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모험가 길드 뒤편엔 야외 도축장같은 넓은 공간이 있었다.
이렇게 무언가의 사체가 많고 핏물이 배있는 공간이 건물 바로 뒤편에 있는데 아무런 냄새도 안 나고 파리도 꼬이지 않는 걸 보면 무언가 대단한 마법적 처리를 한 것으로 보였다.
내가 정상적으로 마법을 배울 수만 있었으면 제일 먼저 배웠을 법한 마법이다.
베테랑은 모험가 길드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을 불러 짐가방을 끌르고 바닥에 고블린의 귀를 배열했다.
열 개 단위로 배열하는 것을 보면 이 세계도 십진수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숫자도 시간이 나면 배우는 게 좋다.
소피에게 표시할 수 있는 정보의 폭이 달라진다.
고블린의 귀를 배열하고 숫자를 몇 번씩 검토하는 게 지루해 정신을 팔고 있었더니 어느새 정산이 끝났는지 일행은 길드의 직원에게서 은빛 주화와 동빛 주화를 몇 개 받았다.
그들의 표정이 만족스러운 것을 보면 보수가 썩 괜찮은 듯 했다.
주화의 생김새를 보고 전생에 읽은 판타지 소설의 '4인 가족이~' 부터 시작하는 화폐 설정이 주르륵 떠올랐지만, 그대로라곤 장담할 순 없다.
거리를 걷는 소피는 여전히 갖은 시선을 받았다.
도시는 꽤나 넓은 편이지만, 보름 쯤 되면 성문 주변의 거대 흙인형과 슬라임을 걸치고 다니는 여자에 대한 소문이 어느정도 퍼졌다고 보는 게 당연했다.
일행이 이곳에 정착해서 모험가 활동을 이어나갈지, 아니면 다른 도시로 옮겨다니며 의뢰를 찾아다닐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가능한 한 곳에 정착하면 좋을 것 같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지금 소피에게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일상 속에 슬라임을 걸치고 다니는 여자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었다.
처음엔 창피해했던 소피가 지금은 완전히 나를 받아들여 고개를 꼿꼿히 세우고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숙소로 돌아온 소피는 부락촌민 여성과 공중 목욕탕으로 향했다.
적대감의 사념파에 문제가 없는지 테스트 할 수 있었다.
몸의 묵은 때를 벗겨낸 일행은 정신의 묵은 때를 벗겨내려는 것인지, 여관 식당에서 푸짐한 음식을 시켜 그들만의 작은 축하연을 열였다.
보름 정도 되는 여정이었고, 목숨을 건 싸움이었으며, 소피의 첫 의뢰였고 보수는 성공적이었다.
축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일행에게 몇 번이나 질문을 던져 동의를 받아낸 소피는 여관의 식자재 창고를 거덜낼 기세로 끝도 없이 먹었다.
모두에게 술이 돌아갔는데, 소피는 조금 떨떠름한 반응으로 받아먹었다.
술은 처음인걸까.
성년이 되어서 주는 건지, 한 사람 몫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기에 주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소피는 잔에 담긴 술을 벌컥벌컥 한 번에 들이켰다.
일행들이 치켜세워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무언가 말을 했다.
"괜찮아."
소피의 동의를 얻고 나서야 술을 한 잔 더 시킨다.
강한 술이라서 그런 것 같다.
어찌나 강한지 그녀의 마나까지 변질되어 알콜향이 나는 것 같았다.
아니, 이건 실제로 알콜을 모두 해독하지 못 한 소피의 몸이 술냄새를 풍기는 건가?
소피는 음식을 와구와구 집어먹다 생각이 났는지, 잔을 다시 한번 쭈우욱 들이킨다.
사수가 만류하는데도 밝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마도 '괜찮은데?' 정도의 의미.
오히려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시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밀착해있으면서 정상적인 그녀의 몸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고있는 나는 느낄 수 있다.
소피는 술에 약하다.
이미 술에 절여진 수준이다.
아까부터 솔솔 풍기던 마나의 알콜향이 점점 더 강해져서 나까지 취하는 느낌이 든다.
이 세계는 이런 독한 술밖에 없는 건가?
일행은 아직 한 잔도 다 비우지 않은 걸로 봐선 이건 정말 독한 술이 맞다.
술을 처음 마시는 사람의 주량과 주사를 알아볼 겸, 조금 골탕도 먹여볼 겸 독한 술을 먹여서 아주 떡이 되게 만드는 놀이는 문화권을 불문하고 존재한다.
그리고 소피는 거기에 당하고 있는 중이다.
얼굴도 멀정하고, 혀가 고이거나 눈빗이 풀리지도 안앗지만 나는 알 수 이따.
사람이 그런 개 가능한가 시프면서도, 소피눈 애초부터 남들과 다른 트기 체질인 것이다.
소피가 새 잔을 집얻든다.
부정의 사념파를 바란다.
그런대 잘 안댄다.
부정을 부정하는 건가?
그럼 안대는대.
안대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