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생체병기가 되었다-15화 (15/65)

〈 15화 〉 1.13

* * *

술을 마신 사람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지금 당장 괴로워하는 타입.

다음날 눈을 뜨고 괴로워하는 타입.

전생의 나는 전자였고, 현생은 후자다.

인간이었을 시절엔 술을 마셔도 취하는 줄을 몰랐다.

술을 말로 들이부어도 버티는 강철같은 인간이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젊었을 적엔 곧잘 새벽까지 지인들과 술자리를 이어가곤 했지만, 얼굴과 안구도 금세 빨개지고 목소리도 금방 쉬었다.

해가 뜰 때 쯤 피로가 쌓이면 술을 마시다 꾸벅꾸벅 졸거나 그대로 잠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술을 너무 마셔서 걸음걸이가 비틀거리고 토악질을 할 지언정 정신만은 말똥말똥했다.

사람이 취하면 개가 된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다.

아무 말이나 짖어대고, 아무데서나 드러누워 자거나 용변을 보고, 주먹다짐도 하고 엉엉 울기도 하고…….

술을 꽤나 잘 마시고 비교적 멀쩡해 보였던 사람도 자신이 했던 말이나 행동을 기억하지 못 하는 때가 왕왕 있었다.

난생 처음 그런 사람들을 봤을 땐 당황스러울 뿐이었는데, 그것이 차차 흥미로워지다가 이내 지긋지긋해졌다.

그들은 하고싶은대로 할 거 다 하곤 했지만, 그 뒷처리는 정신이 말짱하고 기억도 잃어본 적이 없는 내 차지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미안하다고 연락이 오긴 했지만 대체로 그 때 뿐이었고, 내게는 그 연락마저 술자리 후 뒷처리의 일환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새 체력이 떨어졌음을 체감했을 때 쯤엔 나는 이미 술을 즐기지 않았다.

어쩌면 나만 빼고 술에 취하는 그들에 대해 질투를 했었는지도 모른다.

추정 천년 이상 술을 입에 대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몸이 바뀐 만큼 체질도 달라진 것이 이유일까.

나는 이제서야 필름이 끊긴 사람의 죄책감과 불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소위 '똥줄이 탄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심지어 지금 내게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사람 조차 없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하다.

그저 몇 번 봤다고 익숙해진 여관의 천장을 보고, 그래도 내가 사람을 패고 감옥에 들어가진 않았나보다 하며 안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필사적으로 어제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소피가 술을 두 잔 마신 것까진 기억이 난다.

아니, 세 잔.

세 잔 째를 입에 대는 장면까지가 기억이 나고, 그 외의 기억은 옛날 옛적의 기억과 전생의 기억까지 뒤섞여 아귀가 맞지 않는 조각퍼즐을 맞추는 것 처럼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

내가, 슬라임의 본능에 따라 신나게 꾸물댄 것 같기는 한데…….

지성을 획득하고 나서는 단 한 번도 경험할 일이 없었던 '눈을 뜬다' 라든가, '정신을 차린다' 는 일이 최근 두 번이나 일어나는 게 좋은 신호는 아닌 것 같다.

슬라임이든 개량 슬라임이든 잠깐 꾸물거리며 휴식을 취할 순 있어도, 딱히 정신을 잃거나 잠드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도태된다지만 나는 지금의 숙면을 필요로 하지 않는 몸이 마음에 든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경계해야한다.

그래도 좋은 점은 있었다.

현생에서 단 두 번 일어난, 눈을 뜨는 경험을 모두 소피와 함께 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려서 소피가 나를 떼버렸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녀는 정말 다행히도 나를 이불처럼 몸에 두르고 배꼽을 드러낸 채 자고 있었다.

내 보온 기능이 술에 취하면서 조금 온도가 높아진 걸까.

몸에서 분비되는 노폐물에 알콜 냄새가 남아있는 걸 보면 그녀도 어제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게 틀림 없다.

다 큰 처녀가 아무리 침실이라도 칠칠맞게 이불을 걷어 차고 배를 훤히 드러낸 상태로 자고 있는 건 보기에 좋지 않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이불을 끌어올려주는 동안 뭔가, 어라? 하는 느낌과 함께 퍼즐조각 하나가 스스로 아귀를 찾아 들어갔다.

어제 있었던, 갑자기 나타난 슬라임 두 마리와의 난투.

그것은 슬라임이 아니라 소피의 말랑말랑한.

'죽고싶군.'

물론 천년 이상의 시간동안 가만히 있어도 아사하지 않은 내가 죽는 방법은 고대의 천사나 악마를 찾아가서 죽여달라고 점액질을 내미는 수밖에 없으니 실현 불가능한 희망이다.

하지만 어제 내 추태를 보고 소피와 인간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를 상상하다보니 내 안에서 자기파괴의 욕구가 들끓어 오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기껏 다시 덮어둔 이불을 내가 걷어차고싶다.

"음. 응……. 응? 아……."

자신의 몸 위에서 부들부들 떠는 내 움직임을 느낀 소피가 모래 긁는 소리를 내며 눈을 뜬다.

머리가 아픈지 인상을 찌푸린 그녀는 자신의 숨에서 나는 술냄새에 인상을 더욱 구긴다.

"베르제스……. 무슨………?"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꽉 감았던 소피가 갑자기 몸을 튕기며 일어나 방 안을 둘러보고, 창 밖에 눈을 돌렸다 다시 주위를 둘러본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있고, 함께 방을 쓰던 집락촌민 여성은 이미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응? 어? 나……. ────……. 어어?"

조급한 발걸음으로 방을 한 바퀴 돌았다가, 자신의 옷차림과 침대를 한 번 살펴보고, 머리를 한 번 쥐어뜯었다가 다시 방을 한 바퀴 도는 소피.

"베르제스, 나 ──………."

내 본체를 붙잡고 말을 걸다가, 한숨을 푹 내쉰다.

"아니다……."

감명 깊게 읽은 소설에선 두 번째는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존재를 암시한다고 했었다.

정신을 잃는 것은 두렵지만, 생각보다 너무 경계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갈증을 느낀 소피는 1층으로 내려가 물을 대접으로 연거푸 마시고, 내 본체를 끌어올려 자신의 안면을 덮었다.

역시 내가 자신의 노폐물을 '처리' 해준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알콜 냄새는 어떻게 해줄 수 없다.

당장 땀으로 분비되는 분량은 처리해줄 수 있지만, 그녀의 체내에 남아있는 알콜과 해독 과정에서 나오고 있는 결과물들은 내 본체가 그녀의 내장 깊숙히 침투하지 않는 이상 도와줄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소피가 입을 크게 벌려 내 몸을 한움큼 물고 혀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느낌은 신선하면서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숙취에 별 효과는 없다.

"────────."

힘 없는 목소리와 느껴지는 부정, 그리고 미약한 슬픔의 감정.

소피는 앞으로 술을 마시지 않기로 한 것 같지만, 글쎄.

그건 두고 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젊은 나이의 그녀가 하는 말이기 때문에 특히 그렇다.

뭘 넣었는지, 내 본체만큼이나 끈적한 스프와 빵으로 끼니를 때운 그녀는 어제 술을 먹기 전에 분배한 돈을 챙겨서 밖으로 나간다.

오늘은 휴식을 취하기로 미리 일행과 이야기가 되어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발걸음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의류점이었다.

"──, ──!!"

들어오는 소피의 옷에 뭐가 묻어서 유심히 쳐다보던 직원이 기겁한다.

지금까지 옷에 슬라임을 묻히고 다니는 손님은 없었나보다.

미리 들어와있던 소수의 손님이 작은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뜬다.

소피는 떨떠름한 웃음을 지으며 직원에게 설명을 하고, 직원은 자신 없는 발걸음으로 가게를 돌며 옷을 몇 벌 챙긴다.

가게 입구 쪽에서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던 소피는 점원이 가져와서 한 켠에 쌓아둔 옷을 몸에 대보지는 못 하고, 그래도 몸에서 최대한 떨어트려 대는 시늉이라도 한다.

가게 안에 있는 인간의 전투능력은 대단한 수준은 아니다.

천과 가죽류는 내가 장악할 수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겠지.

그 나이대 여성의 욕망과 내 존재가 내면에서 충돌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는 소피가 안쓰러워, 잠시 그녀에게서 내려온다.

소피는 내가 움직이자 놀라서 몸을 움츠렸지만 이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내 본체를 살살 긁었다.

소피는 몇 가지 옷들을 자신에게 대보고, 나와도 비교해보며 후보군을 몇가지 추리더니,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차례 검토했던 복장들을 한 차례 다시 훑어보더니, 넓지 않은 가게 내부를 한 바퀴 돌며 이것저것 손에 들었다 내려놓고, 다시 한 번 점원이 골라준 옷을 살펴보고.

그리고 그녀는 점원에게 인사한 뒤 가게를 나섰다.

전생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어느 정도는 예상한 흐름이었다.

소피의 발걸음은 두 번째 옷가게로 향했다.

아마도 세 곳.

휴일에 옷을 사러 나온 여성은 가게를 세 곳 돌아다니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다.

괜찮다.

지금의 나는 성격 급하기로 소문난 한국인이 아니라 가만히 꾸물거리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는 슬라임이다.

이번 생에서 나는 지루함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소피가 해가 질 때까지 가게를 돌며 머리부터 발 끝까지 한 벌씩 살 것까진 예상하지 못 했다.

그녀가 어떤 인생을 걸어왔는진 모르지만, 최근까지 산 속의 작은 집락촌에 체재하다 꽤나 큰 돈을 손에 넣어서 브레이크가 약간 풀린 거겠지.

그동안 긴장을 유지한 소피의 몸이 피로하다는 신호를 보낸다.

"─────."

허탈한 웃음을 짓는 소피.

과했다는 자각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펑퍼짐한 치마에서 다른 집락촌민처럼 험지에서 활동하기 좋은 옷으로 바뀌었고, 그 와중에 나름의 옷맵시도 챙겼고 진한 녹색인 내 본체와의 조화도 고려했다는 점에선 합격이긴 했다.

시간과 예산이 과투자되긴 했어도 결과는 낸 것이다.

그녀도 나도 기상 직후 세상 끝난 것 처럼 안절부절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행복해졌으니 됐다.

기특하게도 소피는 나에게도 무언가 선물을 주려고 했다.

설마 했는데, 계속해서 무언가를 가리키며

"베르제스, ──?"

라고 물어보면 싫어도 알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나는 슬라임이고, 음식물을 섭취하지도 않기 때문에 인간들이 시장이나 가게에서 파는 것들에 딱히 흥미가 이는 것이 없었다.

내가 부정의 사념파를 매번 내보내자 소피는 동화 세 개를 억지로 내 본체에 밀어넣었다.

당부하는 목소리.

차곡차곡 모아뒀다가 가지고 싶은 게 생기면 사라는 의미일까.

책을 한 번 사보고 싶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돌아다닌 길 주변엔 서점이 보이지 않았고, 이 세계에서 책이 얼마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전생에 읽은 소설에선 보통 꽤나 값이 나가던데.

차라리 지금은 이 돈을 모아뒀다가 소피의 식비가 떨어졌을 때 그녀의 생명을 연명하는 데 쓰는 게 나아보였다.

내게 오늘의 수확은 '이거' 라는 단어를 배운 것으로 충분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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