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1.14
* * *
저녁시간이 되자 일행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
"……."
그들은 나와 소피를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더 무안한 기분이 들게 했다.
일행은 저녁을 마시며 어제와 다른 술(아마 평소에 마시는 술일 것이다)을 기울였고, 소피에게도 권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다음날에도 휴일이었는지 소피는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녀는 무기점에서 장검, 창, 양손 도끼, 석궁, 거검 등 흉흉한 병장기들을 실컷 구경하고 휘둘러본 뒤 작은 단검을 하나 샀고, 방어구점에서는 번쩍번쩍한 갑옷을 쳐다보곤 직원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선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내가 전쟁중에 쓰던 동체와 비교하기엔 무안할 정도로 미약했지만, 갑옷에는 무언가 주변 마나의 흐름을 제어하는 기능이 있는 듯 했다.
아마 마법이 각인된 갑옷일 것이다.
지금 시대의 인간들도 마법이 걸린 장비를 사용하지만, 가격이 굉장히 비싼 것 같다.
전생에서도 장사 수법 중에 비매품에 가까운 고급진 물건을 전시용으로 걸어놓고 손님을 끌어오는 방식이 있었는데, 그 갑옷도 그런 쪽으로 보였다.
소피가 갑옷의 가격이 감이 안 오는지 손가락을 꼽아보며 셈을 하다가, 다음 손으로 넘어가는 도중 막히더니 다시 모든 손가락을 펴고 처음으로 돌아가길 몇 번 쯤 반복했다.
그리고는 포기.
'어쨌든 막대한 금액'이란 결론을 내렸는지 다시 입을 벌리고 멍하니 갑옷을 쳐다본다.
대체 얼마이길래.
다음에 들른 곳은 마도구점이었다.
'나 마녀요' 하고 주장하는 듯한 고깔모자를 쓴 중년의 여성이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마녀는 소피가 들어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가락을 흔들며 경계심을 담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을 했는데, 소피가 얼떨떨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옆에 놓인 짧은 원통을 건드리자 불꽃이 화악 피어올랐다.
"────!!"
"─, ─."
어머어머가 아닌, 다른 추임새.
으이구, 아니면 쯧쯧쯧 정도일까.
소피가 놀라서 원통이 쓰러지기에, 내가 본체를 뻗어 급하게 잡아 챘다.
카운터에서 나온 마녀가 속사포처럼 따다다다 떠들고 소피는 죄송한 표정을 지으며 주눅든 목소리로 얌전히 혼났다.
하지만 원통이 쓰러지며 사방팔방으로 불꽃을 뿌린 것 치고는 소피도, 주변 물건들도 너무 멀쩡했다.
주변 공기도 그 정도 불꽃이 피어났다기엔 온도가 낮았다.
기껏해야 약간 따뜻함을 느낄 정도.
다친 데 없냐는 듯 소피의 몸과 가게를 살피는 마녀에게서도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능구렁이같은 중년 마녀의 연극인 것이다.
가설 1.
지금 것은 마법에 문외한 고객을 대상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장치이다.
가설 2.
소피처럼 몸 밖으로 마나를 흘리는 체질은 마도구를 멋대로 발동시키고, 그런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피해가 없지만 요란한 마도구를 손이 닿는 곳에 배치했다.
어느쪽이 맞는진 모르지만 적어도 중년의 마녀의 경력과 연륜이 느껴지긴 했다.
바짝 굳은 소피는 옷가게에서처럼,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필요한 것을 말한 후 우두커니 서서 가게를 눈으로만 둘러봤다.
비틀어진 나무나, 식물이 아닌 무언가를 바싹 말린 장식품.
유리병(유리가 있었다)에 담긴 형형색색의 액체.
짐승의 뼈, 약초, 광물이 박힌 암석.
가서 만져보고싶은지 소피의 몸이 움찔움찔하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아까 전에 크게 혼났기에 주저하는 듯 했다.
나 역시 다르지 않은 기분이다.
이해한다.
무언가 냄새가 나는지 숨을 들이쉬는 양도 늘어났다.
개량 슬라임은 후각이 없었기에 어떤 냄새가 나는지 궁금해도 맡을 수도 없고, 소피에게 물어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마녀가 가져온 것은 보라색 보자기에 싸인 부싯돌이었다.
집락촌민들이 불을 피울 때 쓰는 걸 본 적이 있다.
현대에서 부싯돌이라곤 구경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그들이 돌을 정말 대충 튕겨도 불이 붙길래 원래 저런 건가, 했는데 그것도 간단한 마법이 걸린 마도구였나보다.
소피가 지불하는 돈도 거의 단검 한 자루에 맞먹었다.
"──, ──────?"
"────. 베르제스───. ──────."
마녀가 나를 가리키며 무언가를 묻자 소피가 나를 소개했다.
나는 손을 흔들듯 본체의 일부분을 돌출시켜 흔들었다.
소피가 기분 좋게 웃었다.
"────?"
"……. ─────."
마녀가 내게 손을 뻗었고, 소피는 내 눈치를 본 후 적대감의 사념파가 느껴지지 않자 허락했다.
귀찮게 하는 건 질색이지만 이 세계에서 오랜 시간 살아왔어도 아직도 마법은 신기하기에 조금은 양보해줄 만했다.
나의 특성과 소피의 체질, 그리고 우리의 상호작용은 우리 둘 만으로 규명하고 분석하기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언젠가는 전문가의 조언을 받고 싶었고, 소피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면 그럴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포석은 마구잡이로 보일 만큼 최대한 많이 깔아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물론 아무리 도시라고는 하지만, 동네 가게에서 점포를 열고 기술과 지식적인 방면으로 장사를 하는 분류들은 대부분 그 수준은 업계에선 낮은 편에 속한다.
적어도 내 전생의 경험으론 그랬다.
그래도 일반인과 비교한다면 분명히 '전문가' 소리를 들을 정도의 격차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사고 체계와 방향성을 확립하고 있다는 점이나 모르면 연락해서 물어볼 나름의 창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현업'의 힘이리라.
마녀의 손이 내 본체에 닿자 그녀의 체내에 흐르는 마나가 느껴졌다.
소피보다 많은 양의 마나.
하지만 마녀는 그 마나를 몸 밖으로 거의 흘리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전혀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는 건 아니다.
마나의 순환.
나처럼 주변 환경의 마나를 끌어들임과 동시에, 체내의 마나를 그만큼 내뿜는다.
온수와 냉수를 뒤섞어서 동일한 온도의 물이 되듯이.
저렇게 체내의 마나와 주변 환경의 마나를 동화시키면 몸 밖에 있는 마나도 자신의 마나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는 건가?
하지만 전쟁중에 보았던 마법사의 마법은 사거리가 꽤나 길었다.
보통은 수백미터였고, 경우에 따라선 산 너머의 주둔지에서부터 포격 지원이 날아온 적이 있었을 정도다.
물론 내가 약간 놀라고 말았던 그 포격 마법이 마법사 수십명을 갈아넣은 대마법일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 마녀가 보여주고 있는 마나의 순환이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필수조건은 아닐 것이다.
저런 방식으로 수 백미터 바깥까지 자신의 마나와 자연의 마나를 섞으려면 마법사가 사격지원을 하기 위해 몇 시간 단위로 명상을 해야 할 것이다.
"─────."
내가 마녀를 관찰하듯, 마녀도 나를 관찰하며 이리저리 만져보고 들춰보고 했다.
무언가 흥미로운 구석을 발견했는지 콧소리를 내기도 하고, 무언가 중얼거리기도 한다.
소피는 마녀의 손길이 부담스러운 듯 했지만, 그녀 역시 나의 정체에 대해 궁금한지 꾹 참고 있었다.
그러다, 마녀가 숨을 고르고 마나를 움직인다.
주변 환경의 마나에 하는 것 처럼, 자신의 마나를 조금 나에게 넘겨주고 내 마나를 자신에게.
미안하지만 내 마나를 넘겨주진 않는다.
물론, 넘겨주는 마나는 일단 거절하지 않겠다, 만은.
'이건 무슨…….'
마녀에게서 넘어온 마나가 소피의 것처럼 마냥 맑고 청명하게 흐르지가 않는다.
언제든지 원하는 형태로 변할 수 있게 준비가 된, 비유하자면 지점토같은 마나다.
내 목구멍에 진흙더미를 들이밀다니.
분노가 일어난다.
탁!
"어머."
"꺗. 베르제스!"
물리적으로, 그리고 마나의 흐름 상으로도 마녀의 손을 쳐낸다.
적대감과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소피가 놀라서 당황하지만, 나와 마녀는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가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한 것인지 이해하고 있다.
"─────."
마녀가 웃음을 띠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능구렁이같은 년.
마녀가 내게 일부러 저런 뻑뻑하고 불온한 마나를 고르고 골라서 넘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마나를 한 번 느끼고 나니, 체내의 마나든 그녀가 섞어놓은 주변의 마나든 애초에 그런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말하자면 공간 장악.
마녀는 마도구점 안의 마나를 자신이 언제든지 주무를 수 있는 형태로 유지하고 있다.
인간의 마나를 제대로 느껴본 게 소피밖에 없어서 착각했지만, 마법사들의 마나는 대체로 저런 형태를 띠고 있겠지.
마나에 의사를 불어넣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 마법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마음대로 변형시킬 수 있는 마나를 내 본체로 들이밀은 행위가 용서되는 건 아니다.
내가 마나에 취약한 진짜 슬라임이었다면 마녀의 마나가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내 몸의 주도권이 그녀에게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불을 지르고 싶다면 불을 지르고, 얼리고 싶다면 얼리고.
조종하고 싶다면 조종하고.
확인해본 적은 없지만, 이 세계에 패밀리어 마법이 있다면 방금 전의 절차를 조금 더 다듬은 형태일 것이라는 직감이 든다.
저 마녀는 나를 지배할 수 있나 없나, 한 번 찔러본 것이었다.
"─────────."
"───."
소피가 어색한 분위기를 버티지 못 하고 다급하게 사과하고, 인사하며 가게를 나선다.
마녀는 느긋한 목소리로 다른 가게에서 많이 들어본 말을 건넸다.
또 오세요.
흥, 또 올 것 같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