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1.15
* * *
시장에선 다양한 먹거리를 팔고 있었다.
소피는 꽤나 거대한 꼬치구이와 과일 주스로 배를 채웠다.
의복이나 장구류와 비교했을 때 군것질거리의 가격은 놀라울 정도로 싼 편이었다.
이 세계의 물류 산업이 내 예상보다 훨씬 탄탄한 걸까.
마법 주머니같은 게 상인들 사이에 퍼져있는 상황이라면 약간은 이해가 갔다.
수상할 정도로 값이 싼 고기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굳이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소피가 포만감을 느끼는 것을 확인한 나는 오후엔 그녀의 등을 떠밀어 성문 밖으로 나갔다.
다음 일정을 위해 몸통에 적재함을 만들어야 했다.
목적지 주변에 마을이 있다면 마차와 마부를 고용해 이동한 후 도착한 곳에서 동체를 새로 만들어도 무방했지만 인간들과 구체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선 내 계획을 설명할 수도, 목적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없었다.
내 동체를 타고 이동하는 데 익숙해진 일행이 자금을 아끼기 위해 마차를 이용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적재함의 형태는 생각해놓은 바가 있었다.
4m 정도 되는, 뒤집어진 계란 형태의 몸통은 하부의 콕피트를 제외하곤 그냥 흙으로 가득 차있다.
처음엔 장갑차를 떠올려 콕피트 뒤켠에 적재함을 만들려고 했지만 그 공간을 마련하려면 콕피트의 위치를 흉부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하지만 그래서야 지금 내 동체와 비슷한 체급, 혹은 덩치가 더 큰 적과 싸울 때 콕피트가 직격을 받을 수 있었다.
때문에 다소 불편할지라도 콕피트 위쪽에 사다리로 오갈 수 있는 2층 구조를 만들어, 그곳에 수납 선반을 다수 배치하기로 했다.
흔들리는 짐을 고정할 수 있도록 수납 선반에 구멍을 뚫어놓으면 인간들이 알아서 로프로 묶어놓을 것이다.
콕피트가 몸통의 아래에 배치되면 나보다 체급이 낮은 상대에게 노출되는 셈이었지만, 그런 상대 중에 바위에 가까운 내 동체 장갑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오러를 다루는 기사의 기마 랜스 차징, 혹은 메이스 공격.
물론 분당 300발의 연사속도를 자랑하는 내 15인치 핸드 발칸 앞에서 랜스 차징을 시도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다.
개활지에서 전방위로 일제히 돌격해오는 게 아니라면, 일개 소대 규모의 기사와 적대해도 순식간이 갈아버릴 자신이 있다.
적의를 숨기고 다가와 급작스럽게 메이스와 같은 둔기를 휘두른다면 확실히 취약할 수 있겠지만……, 그 부분은 소피를 믿어보자.
콕피트 대신 다리 파츠를 주는 데 성공한다면 다음 순간 상대를 쥐포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성문 앞으로 도착하니, 일련의 무리들이 모여있는 것이 확인됐다.
도시의 성문에 통과 심사를 위한 행렬이 늘어서는 게 특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2차례 성문을 통과할 때까지 대기열이 없었던 것이 이상한 거겠지.
성문에 다가가는 동안 내 동체를 거대 몬스터로 착각한 인간들이 멀리서부터 거리를 벌리고 눈치를 봤다는 게 합리적인 추측이다.
하지만 대기열이 이상하게 길었다.
길었고, 사람들이 제대로 줄을 서지 않고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뭉쳐있는 느낌이 강했다.
이세계 시민의식 평균이라고 생각했지만 소피가 인파를 헤치고 동체를 기대놓은 성벽에 다가갈수록 설마가 사실로 다가왔다.
"───!"
"──."
"─────────!!"
내 동체를 둘러싸며 세워져있는 마차 3대.
그곳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사람들.
각자 다양한 도구를 들고 마차와 동체를 오가는 사람들.
내 동체 위로 올라가 허리춤에 찬 도구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마차 쪽으로 소래를 지르는 사람.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는 구경꾼들.
동체 주변으로 고대유적지 발굴현장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 ─────?"
"──. ────."
당황한 소피가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물어봤지만, 성깔있어보이는 난쟁이는 바쁜 티를 팍팍 내며 몇 마디 툭 던지고 다시 자기 볼 일을 보러 갔다.
동체를 성벽에 기대놓은지 며칠이 되었으니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야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많은 관심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타인의 장비를 통보도 없이 마음대로 뜯어보고 있다니.
현대였다면 일단 경찰을 불러 작업을 중지시킨 후 변호사와 상담해 무슨무슨 법으로 민형사상 책임을 물게 할 일이고, 무림이었다면 그대로 생사결에 들어갈 수 있는 중대 문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 적용되는 이 세계의 법칙은 나도, 소피도 알지 못 했다.
상식이 부족하기에 상식 없는 짓을 막을 수 없는 상황.
상관 없다.
미안하지만 몬스터로 분류되는 나는 인간들의 상식과 절차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 ───!!"
적대감과 분노의 사념파를 총동원한 상태로 소피의 등을 툭툭 치자, 그녀도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정리했는지 같은 감정을 보이며 크게 소리 질렀다.
"─!! ──────!!"
손짓과 삿대질을 하며 주위의 이목을 끌어모은 채 내 동체로 다가간다.
비켜. 꺼져. 그만.
어떤 단어가 사용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오, ────? ──────……."
"──."
그래도 지금 게 꺼져, 혹은 닥쳐인 것은 알겠군.
무슨 낯짝인지, 내 머리 위까지 올라간 난쟁이가 소피에게 친한 척을 하며 뭐라뭐라 말을 했지만 소피는 차갑게 일축했다.
소피의 몸에서 내려와 동체를 장악한다.
이음매가 보이지 않던 콕피트가 열리자 주변에서 흥미를 담은 탄성이 인다.
물론 이전 모험가 길드 직원들과 병사들에게 들었던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저런 무례한 놈들에겐 내 기동 장면을 보여주고싶지 않다.
소피가 콕피트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후 동체를 바로 일으킨다.
전에 생각해두었던 긴급 기동의 시퀀스.
지금까지는 소피에게 주변 시야를 보여주는 투영 마법과 동체간의 연결 확인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나갔지만, 사실 내 동체를 움직이는 데엔 그런 행동이 전혀 필요치 않다.
그저 소피에게 동체를 조종하는 감각을 좀 더 확실히 알려주고 내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분류하자면 허례허식이었을 뿐.
물론 기체의 각 파츠에 차례대로 전력이 흐르고 시스템이 부팅되며 가볍게 워밍업을 하며 전체적인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은 중요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필요하지 않더라도 앞으로도 멈출 생각은 없다.
지금같은 상황만 아니라면.
쿵.
"──, ──────!!"
제대로 일어서서 한 걸음을 내딛은 후에야 투영 마법을 일제히 작동시킨다.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와있던 난쟁이가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중심을 잃고 내 동체에서 떨어진다.
내 동체에서 단번에 피드백을 받아들인 소피는 그것을 확인하고 잽싸게 잡아챈다.
나이스 캐치.
물론 난쟁이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정도의 충격을 받았겠지만, 기능적으로 장애가 오진 않았다.
현대에선 1m 조금 더 되는 높이에서 추락한 후 머리를 부딪쳐 사망하는 사례도 있는 것을 생각했을 때, 안전모도 없이 추락한 것 치고는 운이 좋은 녀석이다.
적절한 힘조절로 난쟁이의 몸체를 손아귀에 쥔 소피는 주먹을 하늘 높이 들었다가, 그대로 바닥에 던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지진 않고 직전에 멈췄다.
구경꾼들 사이에서도 비명이 터져나오는 것을 보면 소피의 위협이 정말 살벌했나보다.
소피는 손에 쥔 드워프가 거품을 물고 기절한 것을 확인한 뒤, 대충 마차 쪽 작업부에게 던져주고 이번엔 구경꾼들과 삼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공터를 향해 왼손의 핸드 발칸을 발사했다.
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
목적 없이, 지긋이, 끊이지 않고.
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탄두가 착탄할 때마다 땅이 울리며 흙먼지가 일어난다.
인간들의 아우성은 사출 마법의 격발음과 착탄 소리에 묻혀 단순한 소음으로 변했다.
한동안 핸드 발칸을 쏟아부은 소피는 손이 얼얼하다는 듯이 탈탈 털었고, 흙먼지에 휩싸인 주변엔 마차와 마차에 묶인 놀란 말들, 흙먼지에 고통스러워하는 문지기 병사들만이 보였다.
기척이 느껴지는 걸 보면 작업 인원이나 성문을 통과하기 위해 대기하던 사람들은 아주 도망치진 않고 각자 마차에 은엄폐한 듯 했다.
현명한 선택이다.
이런 난리통에 사방팔방으로 도망가면 더욱 큰 사고로 연결될 뿐이다.
소피는 얼굴을 기억해놨다, 혹은 앞으로 조심하라는 듯이 내 동체를 중심으로 작업하던 마차들을 한 동안 가리키다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 번 외부 스피커의 필요성을 느낀다.
소피는 성벽에서 전속력으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위치에 동체를 뉘였다.
방금 전 있었던 감정 소모와 핸드 발칸의 마나 소모로 피로감을 느끼는 듯 했다.
입고 있던 조끼를 벗어 대충 얼굴에 덮어 그늘을 만든 소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고, 조심조심 작업을 마무리한 나는 해가 지기 조금 전에 그녀를 깨웠다.
해가 지기 시작한 성문 앞은 고요했다.
소피가 핸드캐논을 난사해 땅이 뒤집어지고 구덩이가 생긴 탄착군의 흔적은 어느새 조금이나마 정리가 되어있었다.
동체를 대충 성문 앞에 버려두었을 때에도 느꼈지만, 이 도시의 병사들은 부지런하다.
콕피트에서 내린 소피는 병사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얼굴을 몇 번 보았던 책임자가 성문으로 나와 소피에게 어딘가를 가리키며 무언가를 말했다.
성벽 한 켠에, 반경 5m 가량의 반원 모양으로 울타리가 쳐져있었다.
글자를 읽을 순 없지만 표지판도 붙어있다.
아마도 '사유재산' 같은 의미겠지.
소피는 내 동체를 다시 움직여 그 울타리 한 가운데 조심스럽게 넣어놓았다.
도시가 외세의 침략을 받았을 때 모험가들의 취급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소피를 설득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