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생체병기가 되었다-19화 (19/65)

〈 19화 〉 1.17

* * *

성벽 울타리 안에 동체를 기대놓고 저번처럼 조를 나눠 몬스터의 부산물을 옮긴다.

적재 공간의 추가와 압도적인 전투로 고블린 귀의 양이 훨씬 늘었기 때문에 한 번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선 상대적으로 양이 적은 생필품을 메고 사수와 집락촌민 여성이 출발.

베테랑과 소피는 옮길 수 있는 양만 빼낸 채로 동체 콕피트를 닫아놓고 길드 사무소로 출발한 뒤 베테랑이 사무소에 남아 정산을 시작했다.

동체로 돌아가면 생필품 조가 기다리고 있다가 다 같이 고블린 귀를 옮길 모양인듯 했다.

다시 나간 성벽 앞에서 기다리는 건 이전에 보았던 난쟁이 몇몇과 인간들이었다.

미리 사람을 대기시켜놨다가 내 동체가 복귀했다는 연락을 듣고 모인 걸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 잠깐 사이에 이 정도 인원이 나타났다는 것은, 잠깐 짬을 내서 온 것이 아니라 어디 가까운 곳에서 죽치고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무언가 작정을 단단히 한 모양인데.

어디 한 판 해보자는 건가?

거품을 물고 기절했던 난쟁이는 팔짱을 낀 채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오고 있다.

순간 아직 혼이 덜 난 건가 싶었지만, 마음대로 내 동체에 손을 대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데다 대화책으로 인간들 몇 명을 앞에 세워둔 걸 보면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게 됐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 같았다.

저런 태도를 취하는 건 난쟁이 나름의 자존심이겠지.

배짱은 인정해주겠다.

"─────. ─────────."

"─────."

먼저 다가온 인간 남자는 조곤조곤한 어조로 소피에게 인사한다.

나이가 젊은 편이고 인상이 부드럽다.

딱 봐도 어리게 생긴 소피에 맞춰 미남계를 쓰려는 건지, 그냥 긴장을 풀고 대화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저 사람을 내세운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저 집단에서 영업 역할을 맡은 게 그냥 저 사람인 건지.

여러가지 생각이 들지만 사정을 모르는 채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봐야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단지 최대한 많은 가능성만을 열어두도록 한다.

"───."

"─────. ───……."

소피도 저들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채고 매몰차게 끊어대지만 인간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끈기있게 말을 이어나간다.

정확히 오가는 말을 알 수 없어도 표정과 어조는 알 수 있다.

평소엔 마냥 활기차고 밝은 소피지만, 인간 여자에겐 상대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 의지가 꺾이게 만드는 말투가 유전자 속에 내장되어있다.

인간 남자 역시 표정이 점점 굳지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조금씩 굽히면서 간절하게 대화를 이어나간다.

녀석, 강하군.

어쩌면 저 난쟁이들과 함께 다니면서 이런 식으로 이미 저질러진 일의 뒷처리를 하거나 누군가를 회유를 하는 데엔 이골이 나있을지도 모른다.

"소피. ─────?"

"─────."

얼마 지나지 않아 집락촌민 여성과 사수가 돌아온다.

무슨 일인지 묻지만 소피는 굳이 설명하고싶지 않은 듯 했다.

인간 남성이 눈치를 보다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나간다.

"──? ───! ─────!"

설명을 들은 집락촌민 여성이 웃음을 보이며 과장된 제스쳐를 취한다.

상대를 조롱하는 어조.

하지만 그걸 들은 인간 남성에겐 오히려 미약한 기쁨의 감정이 흘러나온다.

남성의 뒤에 서있던 인간들에게서 주머니가 전달된다.

'성의'로군.

"──."

"─? ──……. ─, ──? ────?"

반사적으로 나오는 조롱.

이어지는 의문.

그리고 확인.

자그마한 주머니.

사수가 주머니를 받아들고 내용물을 집어낸다.

금빛 주화가 사수의 손가락에 딸려 올라온다.

그래도 주머니엔 아직 내용물이 남아있다.

"────아니군."

인간 남자가 이 자리에서 위조 화폐를 내밀고, 사수가 그것을 단박에 구별해낼 가능성은 적었다.

그렇다면 지금 꺼낸 말은 '확실히 적은 돈은 아니군.' 정도겠지.

피아가 정해지지 않은 존재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 동물의 특성상, 사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진짜 적은 수준은 벗어난 돈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건 큰 돈이다.

어쩌면 은화, 동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금액.

일행의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의 금액.

소피가 손가락으로 셈을 하다 실패했던, 마법이 심어진 갑옷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를 그런 금액.

"이거……─────?"

집락촌민 여성의 목소리가 약간 떨린다.

소피가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그녀는 고블린 토벌의 성과였던, 은화와 동화를 담은 주머니를 넷이서 배분한 돈으로 휴일동안 신나게 쇼핑을 하고 군것질을 했다.

경제 관념이 얼마나 있는진 몰라도 그녀의 기준에서 최대의 사치는 은화 수준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눈 앞에 들이밀어진 금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에게서 적대감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소피는 사수와 집락촌민 여성의 눈치를 살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거겠지.

하지만 그들 역시 소피의 눈치를 보고있는 상황.

애초에 내 동체는 그녀의 소유이니 일행이 나서서 왈가왈부 할 문제는 아닌 게 분명하다.

인간 남성 역시 조금은 자신있게 주머니를 내밀었지만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자 입꼬리가 미세하게 내려간다.

여기 있는 모두는 소피에게 선택권을 넘겨줬다.

하지만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최종결정권자가 소피가 아니라는 것이다.

"베르제스. ─────?"

고개를 숙여 내게 묻는 소피.

그에 따라 소피의 얼굴에서 상체 쪽으로 내려가는 일행의 시선.

의아한 표정의 인간 남성.

'이 여자가 슬라임을 입고다닌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젠 말까지 걸고 있네. 정신이 나간 거 아닌가? 이런 상대와 거래를 시도하는 게 적절한 행동일까?' 라는 듯한 표정이다.

실례구만.

어쨌든 생각을 해보자.

내가 있으면 저 금화는 도저히 벌 수 없는 돈까진 아니다.

언젠가는 벌 수 있다.

이번에 고블린을 토벌한 보상금도 저번의 배는 될 가능성이 크다.

조금 더 강한 몬스터를 잡으면서 포상금을 점점 늘리면 길드 사무소에서 금화를 받는 날이 절대 멀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화폐가 통용되는 인간 사회에서 돈은 곧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은화가 몇 개 모여야 금화가 되는 걸까?

소피가 고블린 토벌에서 벗어날 때까지 필요한 실적과 경험은?

그녀의 노화가 시작되어 신체 능력이 떨어질 때까지 이룰 수 있는 업적은 어디까지지?

수명을 잴 수 없는 나야 상관없지만, 인생이 한정돼있고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간이 인생의 절반조차 되지 않는 인간 파일럿에게 시간과 돈의 환산비는 얼마나 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거친 후 대답을 내놓는다.

부정.

"왜~?!"

비명을 지르듯 묻는 집락촌민 여성.

갑자기 느껴지는 사념파에 당황하다 집락촌민 여성의 목소리에 움찔 하는 인간 남성.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하늘로 향하는 사수.

내심 아쉬운지 주먹을 꼭 쥔 소피.

"───. 베르제스, 응? ────────."

이젠 집락촌민 여성이 나서서 나를 설득한다.

보상에 비해 인간 남성의 요구 조건이 꽤나 쉬운 편이었나보지.

내가 부정의 사념파를 내보낸 이유 중의 하나는, 난쟁이 집단이 바라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반응으로 봐선 내 동체를 좀 더 자세히 뜯어보고 싶다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다기엔 내밀어진 금액을 본 일행들의 반응이 너무 격렬했다.

혹시라도 똑같은 동체를 하나 더 만들어달라거나 하는 의뢰였으면 거절하는 게 맞았다.

사람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저들이 바라는 '똑같은 동체'라는 건 기동이 가능한 동체를 말하는 걸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일행이 내 능력을 '동체 생성 및 장악'이 아니라 '동체 생성'인 줄로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덥썩 계약을 맺어버리면 그대로 사기를 치는 셈이 되고 만다.

의사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라는 건 무섭고, 그런 상태로 진행하는 계약은 더욱 무섭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하고,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 베, 베르제스 ──?"

인간 남성이 떠듬떠듬 내게 말을 건넨다.

지금 자기가 무슨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회의감을 느끼고 있겠지.

그럼에도 한다.

그것이 영업맨.

내가 부정의 사념파를 낸 두 번째 이유.

"──────?"

비지니스 마인드가 탑재된 듯한, 인간 남성에 대한 신뢰.

"뭐, 라고?"

사수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다.

소피의 눈이 크게 떠진다.

집락촌민 여성이 호들갑을 떨며 제스쳐를 취한다.

"베르제스. ──, ──? ─, ───?"

주머니와 자신의 꼭 쥔 주먹을 비교하는 제스쳐.

긍정.

"─, ───?"

나와 대화하는 법에 대한 감을 잡은 인간 남성이 주머니보다 크게 동그라미를 그린다.

역시 말이 통하는군.

긍정.

"────?"

더 큰 동그라미.

점점 커지는 동그라미.

이 세상에 돈으로 해결하지 못 하는 건 없다.

실패했다면, 준비한 돈이 충분하지 못 했을 뿐.

그것이 자본주의.

그것이 비지니스.

긍정.

"더 큰 돈이요?"

기쁨.

긍정.

돈이 부족하잖아, 돈이.

기왕 쓰는 거면 팍팍 좀 써보라고.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