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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생체병기가 되었다-23화 (23/65)

〈 23화 〉 1.21

* * *

이 세상은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생물체들에게 종 별로 속성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그에 따른 상성도 당연히 없다.

물론,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를 이뤄온 동식물들은 혹독한 자연의 힘에 버틸 수 있는 몸으로 스스로를 개조해왔기에 속성 비슷한 게 있긴 하다.

북쪽의 거대한 설인은 몸을 수북히 덮고 있는 털로 인해 추위에 강하지만 털을 불태우면 무력화된다.

동쪽의 늪지대에 무수히 도사리는 독개구리는 늪에 전기를 흘리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 하고 배를 까뒤집은 채 수면 위로 올라온다.

하지만 그걸 상성이라고 정의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혹한의 설산에 옷도, 털가죽도 없이 맨몸으로 던져놨을 때 버틸 수 있는 생물은 없다.

고대의 인간들이 사용하던, 전기를 내뿜는 마도구를 점막에 갖다대고도 멀쩡히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생물은 없다.

아, 하나 있긴 하다.

개량 슬라임.

하지만 고대인들이 만든 개량 슬라임엔 생식 기능도, 자가분열 기능도 없으니 천사가 세상을 뒤집었을 때부터 생산이 멈췄을 개량 슬라임은 대부분이 폐사하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몇몇 개체만 가사 상태를 유지하고 있겠지.

어쨌든, 아무리 판타지 세계라고 해도 이곳엔 자연의 4원소라든가 음양오행같은 가위바위보식 상성 관계는 없다.

대신 존재하는 것은 전생의 자연 생태계에서 찾아볼 수 있을 법한 상성 관계다.

코끼리는 개미를 무서워한다고 했었지.

어렸을 적엔 코끼리가 자신보다 너무나도 작은 개미를 직시하면 미쳐버리기 때문에 일부러 피한다는 낭설을 믿었었지만, 나이가 들고 궁금한 것은 그 자리에서 인터넷 검색을 해서 알아보는 세상이 온 뒤엔 개미가 몰려든 나무를 먹기 껄끄러워 하는 코끼리의 습성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후 이뤄진 전생, 그리고 수많은 전장을 겪으며 그 관계를 직접 체감하게 하는 종족을 만났다.

뛰어난 내성과 내구력, 지치지 않는 체력, 동체를 박살내도 금방 새로운 동체를 들고 전투에 참여하는 생체 병기 개량 슬라임.

그런 말도 안 되는 환상의 종족에게도 상성이라 할 법한 몬스터가 있다.

"그만, 떨어져────!!"

바로, 트롤이다.

쿵­!

소피가 내 동체의 허리춤을 붙잡고 늘어지는 녀석을 힘겹게 떼어내고, 짧은 다리로 걷어 차고, 힘이 약해진 녀석을 다시 한 번 멀리 밀어낸다.

쏴아아아아아아­.

"끄어어어어엉­!!"

내 동체 절반보다 조금 더 큰 몸집의 트롤이 산비탈을 미끄러지며 나무를 모조리 쓰러트리고,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른다.

저 멍청한 낯짝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난다.

놈이 입은 상처는 기껏해야 긁히고 쓸린 상처가 대부분이다.

자세도 불안정했고 끈적하게 달라붙어있던 바람에 발로 찼을 때 충격은 별 볼일 없었으리라.

늑골 쯤에 금이라도 갔으면 다행일까.

물론 트롤의 재생력이라면 아주 잠깐 끙끙대고 난 후엔 말끔히 나을 것이다.

그리고 멍청한 얼굴을 한 채 또 다시 달려들겠지.

지긋지긋한 녀석.

"너도, 꺼져!!"

수컷을 날려보내도 등 뒤에서 몽둥이를 들고 달려드는 암컷이 남아있다.

꼴에 가족단위 행동을 한다는 게 트롤의 귀찮은 점이다.

자식은 아직 낳지 않았는지, 숨겨둔 건지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소피는 수컷을 날려보내며 팔을 들어올린 김에 그대로 자세를 고쳐 잡으며 크게 원을 그려 뒤에서 몽둥이를 휘두르는 암컷을 노린다.

암컷의 몽둥이는 거의 내 동체 코앞까지 다가왔다.

휘두르지 않고 놀고있는 팔은 지면을 짚어 자세를 지지하고 충격을 대비한다.

온다!

이 악 물어!

꾸────────웅!!

"끄으으으으으윽……."

이 동체가 내가 관리하는 동체가 아니라 매체 속 로봇처럼 인간이 짜놓은 프로그램으로 제어하고 있었다면 지금쯤 미칠 듯이 경고 알람이 울리고 있었겠지.

전생의 지구와는 다른 물리 법칙이 적용되고 있는 듯한 이 세계엔 체고 6m 정도의 몬스터는 희귀하지 않았지만, 거대한 물체에 거대한 관성이 적용되는 것 만은 같았다.

때문에 체급이 일정 이상 되는 몬스터는 그 행동이 기본적으로 느릿느릿 했다.

전투를 치르며 서로 드잡이질을 해도 느릿느릿.

한 쪽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것도 느릿느릿.

느릿느릿.

하지만 그 느릿한 전투의 결과물은 불가역적이고 파멸적이다.

트롤의 2m 가량 되는 몽둥이가 동체를 때린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맞은 부분을 중심으로 동체의 파츠가 차례로 들썩거린다.

버틴다.

전생의 젖먹던 힘까지 끌어와 튕겨져 나가려는 파츠들을 붙잡고 동체의 형태를 유지한다.

버틴다.

땅을 짚은 왼팔에 끔찍한 하중이 걸린다.

버틴다.

버텨낸 탓에 미처 해소되지 못 한 충격들이 동체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진동과 소음을 일으키고 있다.

버틴다.

버틴다.

버텼다.

"죽어어어어어어어!!"

소피가 한참 전부터 원을 그리며 회전시킨 팔이 드디어 내려찍는 각도까지 도달했다.

온 힘을 싣는다.

세상의 모든 전투에는 수 싸움이 포함돼있다.

체급과 반응속도, 순발력 등에 따라 내밀 수 있는 수의 종류가 서로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거대한 존재끼리의 전투에선 수 싸움의 느낌이 더욱 각별하다.

하나의 행동을 취하려면 두 수, 세 수를 거쳐야 한다.

두 수 전부터 회전시킨 오른팔.

한 수 전에 트롤은 휘두른 몽둥이를 내 동체에 적중시켰고,

지금은 작용반작용의 법칙으로 튕겨져 나온 몽둥이와 자신의 무너진 자세를 추스르고 있다.

놈의 멍청한 머릿속에 내 오른팔에 대한 대비책이 준비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늦었다.

무슨 수를 취하든 내 주먹이 적중한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몽둥이를 휘두른 대가를 치뤄라……!

꾸─웅!

"끄어어어어엉!!"

직선으로 찍어눌러 머리를 어깨선까지 파묻으려고 했던 소피지만, 몹집에 비해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가늘고 흐물흐물한 놈의 특성 탓에 실패했다.

대신에 목과 어깨의 연결부에 깊게 주먹이 파고 들었다.

내 주먹을 맞고 녀석이 선택한 수는 '아파하기'.

대다수의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다.

덕분에 이쪽은 한 수를 더 벌 수 있었다.

근육의 구조가 다르지만, 어쨌든 놈의 승모근에 해당하는 부분에 파묻힌 주먹에서 미리 장전해둔 흙탄두를 발포한다.

푸학­.

"끼히이이이이이이이이이!!"

승모근을 중심으로 상체가 커다랗게 날아간 놈이 발작을 하며 몸을 비튼다.

피와 고깃덩이가 비산하고 소름 끼치는 비명이 울려퍼진다.

주변에 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메아리가 되어 산에 울려퍼지는 비명.

집단 생활.

암컷의 비명.

……이거 불안한데.

"소피! 그만!! ─────우리가 죽겠어!!"

"──────!!"

여느때처럼 적재 공간에 대기하고 있던 일행이 아우성을 친다.

적재 공간엔 그들이 마음대로 설치한 해먹 외엔 인간을 배려한 장치랄 게 일절 없었다.

이런 몬스터를 잡으러 오려면 좀 더 준비를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잠깐 치밀어 올랐지만 이내 잠재운다.

모든 건 저 몽둥이 때문이다.

아니, 말이 좋아서 몽둥이지.

통째로 뽑아내서 가지와 뿌리를 대충 정리한 게 다인걸로 보이는 저 통나무가 문제다.

저 나무가 뭐길래 트롤이 가누면서 휘두룰 수 있는 무게를 가진 주제에 이런 충격을 선사하는 것인가.

전쟁중에 트롤이 사용하던 무기는 이렇지 않았다.

나무 겉면에 검게 칠해놓은 저 코팅에 뭔가가 있는 건가?

아니면 트롤에도 부족의 주술사같은 게 있어서, 인정받은 전사에게만 하사해주는 특주품 같은 거라도 된단 말인가?

저것만 아니었어도 동체가 조금씩 흔들리는 정도의 피해로 전투를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수컷의 몸통박치기는 딱 그 수준이었다.

"끄어어어어억!!"

산비탈을 굴러 나가떨어진 트롤이 분노의 함성을 내지르며 다시 기어온다.

반대편엔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착실하게 박살난 상체를 재생시키는 암컷.

암컷의 비명을 듣고 합류할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적성 트롤.

소피는 분한 소리를 내며 퇴각한다.

개인적으론 대환영이다.

기쁨의 사념파를 보내지 않게 꾹 참는다.

상대가 트롤인 줄 알았다면 일행을 만류했을 것이다.

아니면, 충분한 준비 기간을 거쳐 대 트롤 무장을 어떻게든 만들어왔을 것이다.

개량 슬라임과 트롤은 상성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다.

주된 공격법인 타격과 내가 준비한 핸드 발칸으로는 놈들에게 유효한 피해를 입히기가 난해하다.

방금처럼 사출 마법을 영거리에서 사용하면 발포의 충격으로 트롤을 무력화시킬 수 있지만, 지금은 도망치는 게 맞다.

몇 수를 추가로 사용해 암컷 트롤의 숨통을 끊는다고 해도 돌아오는 수컷 트롤과 전투를 지속하게 되고, 새로운 트롤이 합류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렇게 전투가 길어지다보면 소피의 체력과 적재 공간의 일행이 버티지 못 할 것이다.

과거의 전쟁에서도 드래곤들이 자존심과 둥지를 버리고 '퇴각' 이란 걸 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개량 슬라임의 발목을 잡은 것이 트롤이다.

인간들이 개량 슬라임의 동체에 무언가 끈적한 것, 아마도 생화학 병기를 도포한 이후로 트롤이 특유의 재생력을 발휘하지 못 했기에 더 이상 재미를 보지 못 했지만 실제 병력보다 3배는 많게 느껴지는 트롤과의 전투는 지금도 귀찮음과 짜증을 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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