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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생체병기가 되었다-24화 (24/65)

〈 24화 〉 1.22

* * *

"────."

"──. ──────."

해가 진 산 속.

일행은 산을 한참 내려와 모닥불을 둘러싸고 회의를 시작했다.

힘 빠진 목소리와 죽상인 표정과 쳐진 입꼬리에 내가 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하면 나는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하필 트롤을 선택한 일행과, 그 터무니없는 몽둥이가 잘못이다.

하지만 벌어진 일을 피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수습을 하는 것이 어른이고, 프로인 법.

지금은 베테랑이 제일 웃어른의 위치에서 행동을 해도, 나이로 쳐도 내가 제일 많고 전투 경험 역시 내가 제일 많을 것이다.

특히 인형 병기와 그 전투법에 대해선 세상에서 제일가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갑자기 눈앞에 트롤을 데려다 놓으니 당황스럽긴 하지만,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내 새로운 동체에 자신 몫의 금화를 들이부은 소피에게도 면목이 설 것이다.

일행의 반응을 보면 트롤의 소문을 듣기는 했어도, 예의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회복력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인 듯했다.

실제로 조우하는 것 조차 처음이겠지.

지금까지 봐온 바로는 이들이 전쟁 중에 보았던 전사들처럼 재빠른 움직임으로 대형 몬스터들을 교란하는 움직임을 취할 순 없어보인다.

오러가 없는 전사들.

일행은 전생의 현대에선 격투기 선수로 활약해도 좋을 정도의 피지컬을 가지고 있지만 이세계 기준으론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모닥불 한 켠에 꺼내놓은 짐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본다.

아마도 마법이 걸린 기다란 밧줄.

특이한 형태의 갈고리.

정체를 알 수 없는 말린 풀.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체.

일행 나름대로 트롤 사냥에 유효하다는 물품들을 챙겨온 것 같지만,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들 수준의 전사가 저런 도구로 트롤을 사냥하려면 최소한 2주는 들여서 트롤의 영역과 행동 패턴, 지형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수 많은 함정과 계획을 준비한 뒤 수십명이 달려들어야 약간이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물론 그 중에선 사망자도 적지 않게 생길 것이고.

소피의 정신건강과 성장을 위해서 일행 중에선 사망자가 나와선 안 된다.

저 도구들은 없는 셈 치는 게 나아보인다.

하지만 갈고리 하나만은 생각을 해볼 만 하다.

체급에 비해 나약한 편인 트롤의 가죽에 파고들기만 하면 주변의 살을 통째로 들어내지 않는 이상 절대 빠지지 않을 것 같은 형상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보았던 캠프의 노포살의 촉도 단순히 관통만을 위한 형태라기보단, 박혀있기 위한 모양에 가까웠다.

트롤의 회복력을 생각하면 노포살촉이나 갈고리가 박힌 직후부터 재생이 시작돼서 살에 파묻히고, 그 후론 조금씩 움직이기만 해도 살을 째고 다시 회복되기를 반복하며 지속적으로 고통을 줄 수 있겠지.

다행히도 트롤은 고통에 대한 내성이 강하지 않다.

오히려 한참 체급이 딸리는 인간이나 고블린, 야생동물 쪽이 고통에 잘 견디는 편이다.

어쩌면, 흥분 상태에도 엔돌핀처럼 진통 효과가 있는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속적으로 피해, 혹은 고통을 줄 수 있는 것.'

생각해봤지만 역시 내 무장 중엔 그런 것이 없다.

필요성을 느껴서 평소부터 모은 돌과 채석장에서 얻은 암석으로 돌탄두를 만들어 등부분에 추가한 적재함에 수납해놨지만, 트롤에게 쏘기엔 관통력이 과해서 깔끔하게 뚫고 지나간 후 상처가 금세 재생될 뿐이다.

흙탄두가 그나마 주먹질보단 나은 편이긴 한데, 트롤을 흙탄두로만 사살하기엔 소피의 마나가 부족하다.

일 대 일로 붙는다면 감당이 될 수는 있어도, 트롤의 영역에서 그런 망상은 일찌감치 버리는 게 나았다.

오늘 전투가 있었으니, 내일은 적어도 사 대 일.

혹은 그 이상.

오랜 시간 기동하며 사출 마법까지 빵빵 쏴댄다면 마나 탈진이 온 소피가 콕피트 안에서 실신해버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나 혼자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텐데.

소피와 일행을 태우지 않고 나 혼자 며칠이고 싸우며 소모전을 유도한다면 트롤 몇 마리와 싸우더라도 확정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

그런 생각, 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지운다.

고작 트롤따위에 나약해지다니.

내 로망의 크기는 겨우 이 정도가 아니다.

어떻게든 이겨낸다.

소피를 태운 채로.

"베르제스. 이런 거────?"

소피가 갈고리를 집고 가슴 앞에서 흔들며 묻는다.

일행의 시선이 집중된다.

저들도 나와 비슷한 사고 과정을 거치는 건가.

물론 만들 수야 있다.

흙덩이를 만지는 데 도가 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시간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문제는 의미가 없다는 것.

내가 열심히 조형을 해도 내 본체와 떨어져 더 이상 장악을 할 수 없게 되면 기껏 만들어놓은 형태가 유지돼도 재질이 정말로 평범한 흙덩이로 돌아간다.

흙탄두는 그 질량과 속도 자체로 거대한 힘이 되기 때문에 날아가며 모양이 망가지고, 착탄 후 박살이 나도 꽤나 파괴력이 나오지만 체내에 버티고 있어야 하는 갈고리는 이야기가 다르다.

트롤의 살덩이를 뚫고 들어가도 트롤이 아프다고 손으로 몇 번 훔치면 형태가 다 바스라져,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부정의 사념파에 일행의 고개가 조금 더 숙여진다.

잠시간의 정적.

모여드는 날벌레들.

모닥불의 장작이 따닥 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간다.

갈고리에서 생각을 이어나간다.

노포살이나 갈고리는 마법, 혹은 오러를 활용할 수 없는 인간들의 방식이다.

일행들에겐 미안하지만, 약자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강한 인간들은 드래곤이 발목잡기로 던져두고 간 트롤 정도는 손쉽게 처리하곤 했다.

판타지스럽게.

길이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오러를 좍좍 뽑아내며 한 순간에 온몸을 토막낸다든가.

지옥의 화염과 영원의 한기로 넓은 범위의 적들을 쓸어버린다든가.

'단분자 커터…….'

무엇이든 손쉽게 잘라내는 단분자 커터가 있다면 소피의 마나가 떨어지기 전에 결판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흙을 소재로 어찌어찌 칼 모양을 조형해서 장악한다 해도 분자 단위의 두께같은 건 꿈도 못 꾼다.

몇몇 매체에선 미세한 톱날이나 진동을 이용한다는 설정이 있지만, 그쪽이 오히려 난이도가 올라간다.

회전체를 지속하기 위한 마법은 아직 만들어내지 못 했다.

현 상태에서 마법의 도움을 받지 않고 소피의 마나를 억지로 끌어다 써서 내 동체를 움직이듯 특정 파츠를 초당 수백, 수천 회의 회전을 한다면 몇 초만에 소피가 미이라 꼴이 되버릴 것이다.

'화염 방사기…….'

트롤의 상처를 지지거나, 통째로 구워버릴 수 있다면 이런 고생은 안 하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화염을 지속할 연소제도, 원하는 거리만큼 분출해줄 분사제도 없다.

발화 자체는 오늘도 모닥불을 수 초만에 붙이게 해준 마법의 부싯돌로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그 외의 재료가 부족하기에 지금 당장 써먹기엔 적절하지 않다.

'빔 포……. 바주카 포…….'

빔 쪽은 역시 마법으로 해결책을 찾기 전까진 꿈도 못 꾸고, 바주카는 사실 바주카 자체가 아니라 맞았을 때 폭발하는 고폭탄이 핵심이다.

탄두 안에 채워넣을 작약이 없으니 역시 써먹을 수 없다.

생각이 너무 현실을 기준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정확히는 전생의 현실.

지금 이곳은 검과 마법, 그리고 메카닉(희망)의 이세계다.

이 세계의 주민들은 초자연적인 힘을 통해 발전해왔고, 싸워왔으며, 나 역시 그러한 힘으로 만들어졌고, 움직이고 있다.

트롤의 회복력과 증오스러운 검은 몽둥이 역시 그런 종류의 힘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초자연적인 힘으로 맞서 싸울 수 있고, 싸워야 한다.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럼 일단 자자고."

"내일은 ──────."

생각이 지속되니 어느새 밤이 깊어졌고, 일행은 찜찜한 감정을 풀풀 풍기며 내 동체 안으로 들어갔다.

적재 공간에 완전히 익숙해진 그들은 불침번조차 서지 않고 내 동체를 쉘터 삼아 편하게 8시간 숙면을 취하고 있다.

결국엔 캠핑카의 운명을 벗어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내가 반대 입장이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이동에 적합한 모습으로 변신, 기동하는 연습을 해볼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인형 병기가 목적에 맞는 형태로 변신하거나, 추가 파츠 및 다른 병기와 합체를 할 수 있다는 건 분명한 메리트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요소다.

"베르제스. 너무 ────말고 자."

소피는 콕피트의 좌석에 기대 잠들기 전에 나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내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떠올려 줄 거라고 믿고있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무생물도 쉽게 의인화해서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소녀의 감성인지.

평소에 나는 슬라임의 본성에 따라 본체를 꾸물거리곤 하는데, 소피가 자고 있을 때엔 그녀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움직임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다.

그런 내 상태를, 그녀는 잠을 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실제로 잠을 자지 않더라도 머리를 비우고 멍 하니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피로랄까, 바닥을 치던 의욕과 욕구가 다시 충전되는 느낌이 드는 건 맞다.

그래.

자자.

아니면 그냥 쉬자.

지금의 나는 슬라임이다.

슬라임이 떨어지는 지능으로 묘수를 짜내봤자 얼마나 대단한 기책이 나오겠는가.

내일의 일은 내일 어떻게든 될 것이다.

소피의 마나는 달콤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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