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1.23
* * *
이세계의 나무는 내 전생의 나무보다 약간 더 큰 편이지만, 그래도 내 거구로는 기본적으로 은엄폐라는 게 힘들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토벌은 대상의 서식지로 판단되는 곳으로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걸어가면 적들이 알아서 싸움을 걸어오는 형식이었고, 이번 역시 그러했다.
"베르제스. 준비 됐지?"
내가 표시해둔 화살표가 점점 다가오며 트롤이 육안으로 식별될 거리까지 들어왔다.
물론 놈들도 대형 몬스터로 구별되는 만큼, 실제 거리는 꽤나 먼 편이다.
회전하지 않으며, 날아가는 도중에 변형되고 바스라지는 내 흙탄두의 명중률과 관통력을 걱정해야 하는 거리.
그리고 그 거리를 믿고, 자신들이 안보일 거라 믿으며 몸을 바싹 숙인 채 나무를 다 부러뜨리면서 기어오고 있는 멍청한 낯짝이 5개.
긍정.
어제는 그냥 대충 사고를 멈췄지만, 작전을 아예 세워두지 않은 채 모든 걸 놔버린 건 아니다.
그래서는 전문가이자 스페셜리스트라고 자칭할 수 없다.
대충이나마 머릿 속에 그려놓은 구상은 있다.
그게 내 기준을 충족하지 않을 뿐.
무기를 든 트롤을 파악한다.
검은 몽둥이를 소지한 것은 한 마리 뿐이다.
아마도 저게 어제의 암컷이겠지.
상반신의 3할은 날려버린 것 같은데 감쪽같이 회복해와서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그 외의 트롤은 빈손이 셋.
통나무보다는 조금 더 손질이 된 듯한 몽둥이가 하나.
하지만 저 몽둥이는 검지도, 희지도, 형광색으로 빛나지도 않는다.
밤이 되면 발광하는 야광 몽둥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내가 전쟁 중에 봐왔던 평범한 몽둥이일 가능성이 크다.
역시 검은 몽둥이는 흔하지 않은 무기이다.
저렇게 부서져라, 뚝딱 하고 휘두르면 상대가 부서지는 밸런스 브레이커는 아무리 이세계라도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굴러다니진 않을 것이다.
"가자."
평소보다 긴장하고, 고양된 소피의 움직임에 맞춰 발걸음을 내딛는다.
성큼.
쿵.
성큼
우지끈.
성큼.
쿵.
진로를 가로막는 나무를 제껴내고.
체중을 실어 밟는다.
트롤들은 진행속도를 높이는 나에게 맞서기 위해 몸을 일으킨다.
지금까지 대체 왜 엎드려 있었던 거야.
인간들을 보고 따라하기라도 하는 건가.
아무래도 좋다.
괜히 저 가느다란 머리 안에 든 생각을 이해하려고 심력을 쏟아붓는 게 시간 낭비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적.
조금 귀찮고 끈질긴 적이다.
그거면 된다.
"끼오오오오오오오!!"
제일 앞선 녀석이 울음 소리를 낸다.
뒤따른 놈들도 따라서 운다.
흉측한 아가리에 삐죽삐죽 솟은 이빨이 혐오감을 불러 일으킨다.
소피가 양 손에 마나를 집중 시킨다.
사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추가 디스플레이가 전면으로 치고 나온다.
석재 동체를 만드는 김에 레일 롤러에 영혼을 담아 깎아내길 잘 했다.
초가집 문짝도 아니고, 인형 병기에서 드르륵 거리는 소리가 나선 안 된다.
타타탕!
"오오오이이이이이이──!!!!!"
괴성을 지르던 선두의 머리를 노리고 쏜 탄환은 오른쪽 뺨을 찢는 데 그쳤다.
상관없다.
놈은 찢어진 뺨을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다른 녀석들이 그 모양새를 우두커니 지켜보다 다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교전 개시다.
검은 몽둥이를 든 트롤은 오른쪽이다.
저번엔 수컷이 내 동체를 끌어안아 고정시키고, 암컷이 몽둥이를 휘둘러 피해를 입히는 전술을 사용했다.
변명같지만, 거기에 당한 건 몽둥이의 파괴력을 무시한 자만심의 결과다.
맞아봤자 얼마나 아프겠어, 하고 맞은 딱밤에 이마가 벌겋게 부어오른 셈일 뿐이다.
마음만 먹으면 저런 몽둥이따윈 손쉽게 무력화 할 수 있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
떠올리는 것은 비살상용 고무탄.
평소처럼 원뿔형의 탄환이 아닌, 사각형의 손가락 형태를 그대로 발사한다.
그럼에도 나약한 트롤의 몸체를 관통하고 만다.
재장전되는 탄환은 아예 구체형으로 만들어낸다.
손가락에 거대한 종양이나 물집이 자라난 듯한 형태.
탄속이 저하되고 탄도도 형편없이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곡선을 그리게 됐지만 트롤의 몸체를 뚫지 못 하고 밀어내기 시작한다.
좋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저지력이다.
"끄어어어, 읍!"
소피는 오른손으로 흙탄환을 일정한 간격으로 발포하며, 왼손으로는 무작정 달려드는 트롤의 뱃가죽에 주먹을 꽂는다.
완벽한 타이밍이다.
트롤의 몸이 한 순간 정지한다.
그대로 손가락을 세우고,
발포.
푸하악.
배가 찢어져 내장을 주르륵 흘린 트롤이 쏟아지는 내용물을 붙잡고 뒤늦은 비명을 지른다.
이건 크다.
놈들은 자신들의 초월적인 회복력이 몸을 너무 급하게 재생시켜, 오히려 위험한 상태로 고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저 트롤은 자신의 쏟아진 내장을 제대로 배 안으로 쑤셔넣을 때까지 전투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그대로 전장을 이탈할지도 모른다.
달려오는 나머지 트롤은 둘.
그 뒤에 최초에 입이 찢어졌던 놈이 따라오고 있고.
검은 몽둥이는 나동그라진 몸을 이제 추스르고 있는 상황.
이런 식으로 차례차례 전투 불능으로 만들거나, 충분히 의미가 있을 만큼 무력화시키면 승기는 이쪽으로 기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건 나 뿐이었던 것 같다.
"흐읍!"
소피는 소중한 한 수를 추가로 들여 전투 불능이 된 트롤의 배 속으로 주먹을 쑤셔넣는다.
놈의 저항을 비집고 손을 집어넣느라 무게 중심이 상당히 앞으로 치우친다.
이걸 복구하려면 두 수.
지금 막 동체에 달라붙은 놈들까지 처리하려면 필요한 수가 두 배가 되고, 세 배가 된다.
그럼에도 소피는 망설임이 없다.
내 동체를 제어하는 데에는 충분히 익숙해졌고, 어제의 전투를 봤을 땐 수 싸움도 어느 정도 고려할 줄 아는 것 같은데, 어째서 이런 선택을…….
타타타, 타, 타, 탕!
검은 몽둥이를 견제하던 오른팔이 달라붙은 트롤에 밀려 조준이 어긋난다.
그에 소피는 쿨하게 견제까지 포기했다.
볼일을 다 봤다는 듯, 왼손에 꽂혀있던 트롤을 손에 달라붙은 비닐봉지를 털어내듯이 털어내고 자유로워진 양손을 하늘로 크게 들어올려 정면에 미식축구 선수처럼 태클을 넣은 채 달라붙은 트롤을 힘껏 내려찍는다.
뿌득!
"끄허어어어어엉!!"
덩치가 비슷하더라도 몸을 구성하고 있는 재질이 다르다.
놈은 교통사고라도 당한 듯 허리와 무릎이 이상한 방향으로 접히며 무너져내린다.
골절이 일어난 부위와 부러진 방향이 좋았다.
이걸로 이 트롤은 뱃가죽이 터진 녀석과 비슷한 시간 동안 전투 불능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들인 수가 많다.
놈의 옆에선 비슷한 자세로 내 옆구리에 태클을 넣은 녀석 둘이 몸을 더욱 치대며 힘을 추가적으로 가하고 있었고, 처음에 입이 찢어진 놈이 내 뒤로 돌아 몸을 부딪친다.
아, 이건 늦었다.
이미 넘어갔다.
"끄어어어어어어!!"
꿍!
정면에서 오는 태클은 무게중심을 낮추며 버틸 수 있지만, 지금처럼 측면과 후면에서 동시에 세 마리가 힘을 주며 밀어버리면 아무리 나라도 버틸 재간이 없다.
이미 양팔을 공격에 써버렸기 때문에 기다란 팔로 지면을 지탱하며 힘싸움을 하기도 요원하다.
소피가 불안정한 와중에도 달려오는 검은 몽둥이에 다시 견제탄을 쏴 저지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미 동체는 기울어진 상태다.
넘,
어,
간다아아아아아.
꽈아앙!!
"끄흣!"
"으아악!"
"───! ──────!!"
내가 온 힘을 다해 붙잡은 소피도 충격을 크게 받았는지 신음성을 흘린다.
오늘은 적재 공간 안에 있는 일행이 밧줄을 잔뜩 꺼내서 무언갈 하고 있던 것 같은데, 크게 소용이 없는지 온갖 아우성을 치고 있다.
아니, 저렇게 난리를 피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석재의 거구가 땅으로 고꾸라지는 데서 오는 충격은 빌딩이 무너지는 수준이다.
내가 필사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덕분에 재난영화 속 빌딩처럼 동체가 산산조각나진 않았지만, 살아있기만 해도 용하다고 할 수 있고 저들의 준비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위기는 지금부터다.
완전히 엎어진 내가 온전히 일어나서 다시 자세를 잡는 데엔 네 수 정도가 필요하다.
반면에 나를 엎어트린 트롤 세 마리가 내 몸을 찍어 누르는데 필요한 시간은 한 수면 충분.
아니, 한 마리가 나를 밀다가 이상한 방향으로 엎어졌지만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다.
나머지와 몸을 부비며 바닥에 드러누워있는 나와 일행을 기다리는 건 무자비한 몽둥이 찜질이겠지.
물론 누워있는 상태의 석재 동체를 아주 깨버릴 정도의 파괴력은 없지만, 몽둥이질을 하는 트롤이 지칠 때까지 쾅쾅 울리는 석재 안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운이 좋으면 영구적 장애를 얻는 수준으로 끝나게 될까?
지금 상황은 그 정도로 절망적이다.
이미 한 놈이 내 동체 위로 올라타 온몸으로 짓누르기 시작한 상태다.
머릿속으로 수를 고민한다.
소피는 망설임 없이 움직여 올라탄 놈의 허벅지 부분에 주먹을 박고 사출 마법을 사용한다.
한 쪽 다리가 덜렁거리고, 놈이 비명을 지르며 내 동체를 더욱 붙잡는다.
느껴지는 고통에, 온 몸에 힘을 주고 뻣뻣하게 굳으니 오히려 동체를 강하게 옥죄는 효과가 나타났다.
딱히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소피는 방금처럼 너덜너덜해진 놈의 허벅지에 주먹을 박고 한동안 숨을 고른다.
나머지 한 놈이 내 상체 위쪽을 붙들지만 이 놈은 크게 의미가 없다.
자세만 잡을 수 있으면 달라붙은 째로 들고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처음에 하체쪽에 달라붙은 녀석이다.
다리가 날아가서 힘을 빡 주기 시작한 놈을 치우기 전까진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소피는 양손을 이용해 다리가 날아간 놈을 휙 치웠다.
수가 생겼다.
나는 동체를 일으켰다.
……뭐?
"소피! 이제 됐다! ───!!"
"알았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트롤이 저렇게 노숙자가 덮어놓은 신문지처럼 치워지는 놈이었나?
부웅!
꽈앙!!
소피의 민첩한 움직임에 검은 몽둥이는 허공을 가르고 방금 전까지 내 동체가 있던 곳을 가격했다.
산이 무너질 것 같은 땅울림.
하지만 산사태는 이 정도로 일어나지 않는다.
이거 한 방에 무너졌을 산이면 트롤이 발정기가 와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영역 싸움을 했을 적에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다.
"이거 된 거 맞지?"
소피가 빠른 속도로 전장을 이탈하며 왼손에 박혀있던 구슬들을 본다.
일행이 손에 박아보라고 손짓발짓으로 사정사정해서 손등과 손바닥 부근에 박아놨던 정체 모를 구슬들.
주먹으로 트롤의 몸을 실컷 쑤셨기 때문에 손이 전체적으로 핏빛으로 변했지만, 구슬은 그 중에서도 더욱 진한 핏빛이 찰랑이고 있다.
박기 전에는 분명 조금 부연 흰 색의 유리수정같은 색이었다.
"뿌어어어어어엉!!"
내 머리를 붙잡고 상체 위에 꿋꿋하게 매달려있던 트롤이 멍청한 소리를 내며 손을 놓고 땅으로 떨어진다.
이대로라면 영역 밖까지 따라가게 될 것 같아서 스스로 포기한 건가?
그러고 보니 트롤 다섯 마리 중에 분명히 몽둥이를 든 녀석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놈은 어떻게 된 거지?
상황을 되짚어보면 분명히 내 동체를 엎어친 세 놈 중 하나였을 것이다.
기껏 몽둥이를 들고와서 그걸 갖다 버리고 돌격했다고?
그건 또 무슨…….
아니, 대체 뭐가 일어난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