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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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의 피는 돈이 된다.
무지막지한 회복력의 정수가 담긴 트롤의 피는 각종 포션 및 치료제의 원료가 되며, 이세계에선 사람이 중병을 앓으면 일단 정제된 트롤의 피를 먹이는 민간 요법이 성행하고 있다.
때문에 인간들은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트롤의 피를 더 쉽게, 더 많이 구할 수 있을까.
트롤을 길들여 가축화 시킬 수 있을까?
시도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수지가 맞지 않는다.
4미터 가량 되는 거대 몬스터를 어느 땅에서 기를 것이며, 그것들을 기를 축사는 어떻게 짓고, 흉포한 몬스터의 관리는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경제로 돌아가는 이세계 형편상, 돈을 들이부어서 이루지 못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그것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수 세대의 트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사육하며 가축으로 분류될 정도로 개량시키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자본과 인력, 까마득한 시간이 필요했다.
인간들은 다시 고민한다.
그렇다면 야생의 트롤에게서 어떻게 쉽게 많은 피를 얻어낼 수 있는가.
트롤의 사냥법은 트롤에게 지속적으로 고통을 줄 수 있는 장비를 활용하는 방법과, 마나나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강자를 영입하는 방법으로 고착되어 쉬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엔 지금도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고 있지만 마법과 오러가 존재하는 이상 전생의 지구에서처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의 발달이 더딜 수밖에 없다.
기술의 발달은 몇 명의 천재들과 약간의 우연, 그리고 시간과 예산을 양분으로 삼으며 진행된다.
몬스터를 완전히 구축하지 못 해서 그들과 공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환경에, 마법과 오러의 존재로 기술 발달에 필요한 요소들을 다른 분야에 빼앗기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정도 결과를 낸 것은, 그런 기술 발달의 요소를 비교적 많이 배분 받은 마법 분야였다.
트롤의 피라는 것은 결국 액체다.
트롤을 사냥해서 피를 채취한다 해도, 전투 후 수백 리터의 액체를 이물질 없이 빼내어 신선도를 유지한 채 운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때문에 시중에 풀리는 트롤의 피는 실제로 사냥되는 트롤의 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트롤의 피를 쉽게 채취하고, 보관할 방법을 만들어내면 된다.
마법 쪽으론 지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떠한 노력과 과정을 거쳤는진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원했고 결국은 해냈다.
트롤의 피를 탐욕스럽게 흡수하는 마법구를 만들어낸 것이다.
성인 여성이 한 손으로 쥘 수 있는 크기에 십 리터 이상이 들어가는데, 피를 흡수하고 뱉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데다, 별도로 판매하는 측정기가 있으면 이물질이 얼마나 섞였는지, 최대 용량의 몇 퍼센트를 채웠는지까지 알 수 있다.
단점이라면 부피는 줄일 수 있었어도 질량까진 줄이지 못 해 트롤의 피를 가득 채워넣은 마법구는 전투에 지장을 줄 정도로 무겁다는 것과, 트롤의 회복력이 워낙 대단해서 얕은 상처를 내고 마법구를 박아넣으면 새 살이 솟아오르며 마법구가 금방 밀려나온다는 것.
즉, 무기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
트롤을 완전히 무력화시킨 후 사용해야 한다는 것.
일행 역시 트롤 사냥을 준비하면서 마법구를 구했고, 그러한 주의 사항을 전달받은 듯했다.
하지만 내가 사출 마법으로 트롤의 상반신 대부분을 날려버리고, 그 전엔 주먹질과 손아귀의 힘으로 트롤의 가죽을 찢고 살을 파고들 수 있다는 점에서 착안해, 도박수를 두었다.
마법구를 이용한 근접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내 손에 박힌 마법구에 의해 순식간에 많은 양의 피를 빼앗긴 트롤은 그 회복력이 무색하게 급성 빈혈 증상을 보였다.
베테랑이 큰 맘 먹고, 혹은 욕심을 그득그득 부려 짐가방 하나를 통째로 채워온 게 호재로 작용한 것이다.
소피와 일행은 전장에서 후퇴한 뒤 새빨갛게 변한 마법구를 보면서 희망을 떠올렸고, 도시의 길드 사무소에서 측정기의 결과를 본 뒤 환호성을 질렀다.
이런 전체적인 사정을 알게 된 것은, 처음 트롤 사냥에서 복귀한 뒤 전투 양상의 변화에 전혀 따라가지 못 하는 데 절망한 내가 소피를 채찍질해 책을 마구잡이로 구입한 후, 어떻게든 이 세계의 문자와 언어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난쟁이 집단의 소개로 고용한 가정교사에게 제대로 글을 배우고 습득한 뒤였다.
총 반년이 걸렸다.
그리고 내가 글을 배우는 데엔 그 반년 동안 번 돈의 절반을 날려버렸다.
네 명에 한 마리로, 총 오등분 한다고 하지만 그동안 트롤의 피를 팔며 번 돈이 한두푼이 아닌데 그 절반을 사용한 것이다.
책과 가정교사 고용비가 너무 비쌌다.
그 땐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책을 살 때엔 얼떨떨한 표정에다가 자신이 뭘 사려고 왔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 하는 소피가 바가지를 왕창 썼고, 터무니없는 가정교사의 인건비엔 가르치는 대상이 몬스터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프리미엄과 생명수당이 포함된 것 같았다.
소피에겐 이래저래 미안한 짓을 했다.
"아니야. 너 아니었으면 만지지도 못했을 돈인데."
소피가 쓰게 웃으며 나를 쓰다듬는다.
물론 그동안 시간과 돈을 낭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남은 것은 있었다.
어쩌면 너무 많이 남아서 문제일지도 모른다.
일행이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그동안 돈을 차곡차곡 모아놓은 베테랑은 어디선가 여자를 데려와 모험가에서 은퇴했다.
물론 사는 동안 배운 게 그것밖에 없으니 직종을 갑자기 바꾸진 못 했고, 몬스터와 짐승을 도축하는 일을 하는 듯했다.
처음엔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어느 정도 단어를 배우고 난 뒤 소피에게 듣기론 여자 쪽 집안이 정육점인지, 육류 유통인지를 한다고 한다.
어쩐지 젊지 않은 나이에 꽤나 어린 여자와 만난다고 했다.
사실상 베테랑이 여자를 데려온 게 아니라 데릴 사위로 들어간 셈이었다.
사수와 창잡이는 소피가 어느 정도 모험가에 익숙해지고, 그들이 배분받은 돈도 어느 정도 모여 장비를 바꿨을 때 쯤엔 다른 집단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종종 모험가 사무소에서 마주치곤 한다.
창잡이는 혈색이 안 좋은데도 표정은 꽤나 밝았다.
오러에 대한 단초를 잡았다나 뭐라나.
진짜인지 아닌진 모른다.
오히려 몸 쓰는 일을 하면서 무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이니 걱정되기만 한다.
인간이 오러를 각성하는 과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이러쿵 저러쿵 할 입장은 아니지만, 저러다 조만간 훅 가는 거 아닌가 싶다.
반대로 사수는 정신 수양이라도 하는 듯 얼굴이 허얘지고 더욱 차분해졌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진짜로 템플 스테이같은 걸 하면서 명상도 하고, 좋은 말도 듣고 하는 것 같다.
──를 담은 활을 쏘는 데엔 흔들림 없는 마음가짐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단다.
마법도 아니고 오러도 아닌 단어였다.
그리고 소피.
소피에게 반년 동안 남은 건 트롤을 사냥하고 배분받은 금화와, 난쟁이 집단과 더욱 돈독해진 인맥, 그리고 여섯 개의 줄이 그어진 신분패였다.
깡! 깡! 깡! 깡! 깡!
신호다.
"가자. 베르제스."
긍정.
진흙을 끌어모아 위장을 하고 기다린 4일은 길었다.
예전에 널찍한 적재 공간을 만들어놔서 득을 봤다.
그렇지 않았다면 피가 끓는 청춘인 소피가 몸이 근질거려서 버티질 못 했을 것이다.
아니, 버티긴 버텼어도 막상 상황이 벌어졌을 때 지금처럼 차분한 상태는 아니었겠지.
소피는 빠르게 내 본체를 들어올려 운동으로 흘린 땀을 씻어내고 옷을 갖춰입었다.
그리고 콕피트에 앉아 여기저기 흩어놓은 파츠가 원래 자리로 돌아오길 기다린다.
쿵! 쿵!
쏟아지는 돌과 흙먼지에, 절벽 아래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존재를 인식한다.
통일된 복장을 하고 있는 집단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집단도 있다.
저쪽도 정규군과 고용한 모험가들로 병력을 구성한 듯했다.
"뭐야! 분명히 없다고 했잖아!"
"후퇴다! 후퇴!"
도시의 지휘관은 적들의 진입 경로를 정확하게 예측했다.
영주가 좋은 인재를 둔 건지, 천 명이 넘는 인원이 산을 타고 올 만한 길이 여기밖에 없던 것인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도시의 성벽에 기대고 앉아있는 거대한 석상에 대한 소문은 이미 곳곳에 퍼져있다.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도 점점 불어나고 있고, 난쟁이 집단이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는 날도 있다.
다른 영지에서 이 곳에 전쟁을 벌이러 왔다면 내가 참전할 것도 감안해서 그 대책을 세웠을 게 분명했다.
예를 들면 마법이라든가.
콕피트를 오러로 단번에 뚫어낼 전사라든가.
"레어트 경!"
"흐하하! 벌써 내 차례가 왔는가!"
절벽을 타고 안정적으로 내려오는 내 동체 앞에 전신에 철제 갑옷을 두른 인간 하나가 뛰쳐나와 기다린다.
방금 전에 파악했을 땐 저 인간은 분명히 더 가벼운 복장을 취하고 있었다.
몇 분 만에 저 갑옷을 다 걸친 건가.
과연 숙련된 전사다.
레어트라 불린 인간은 전생의 기마용 랜스와 유사한 창을 치켜들고 내가 절벽을 다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다.
오러를 구사하는 인간의 다리에서 폭발하는 충격력은 말의 그것을 뛰어넘는다.
이런 산까지 무거운 갑옷을 챙겨와서 순식간에 차려입는 모습을 보면, 대형 몬스터를 정면에서 뚫어버리는 전술에 능한 자일 가능성이 있다.
내가 땅에 내려서자마자 콕피트를 정면에서 관통할 속셈이겠지.
물론 그런 단순한 전술에 멍하니 당해줄 생각은 없다.
"마법이다! 마법사!!"
타타타타타타타타!!
소피가 놀고 있는 왼팔을 들어 기사를 노리는 것 보다 한 박자 빨리 외침이 들려오고, 탄환이 착탄하기 전에 나와 기사 사이에 흙벽이 치솟아 오른다.
이전 전쟁 중에 보았던 마법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반응 속도가 빠르다.
전투의 양상은 분명히 바뀌었다.
하지만.
콰아아아앙!!
석재 탄환의 관통력을 흙벽 따위로 막으려고 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이다.
"베르제스. 어때. 죽었어?"
긍정.
두꺼운 철제 갑옷을 입고 있던 전사는 갑옷 째로 뭉그러져서 사망했다.
시야가 개방되어 있었다면 피하려는 시늉이라도 해봤겠지만 그의 앞에 펼쳐진 흙벽이 오히려 방해물이 되었다.
딱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기껏 석재 탄환을 만들어놓고 반년 동안이나 묵혀뒀을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원망하려면 지난 시간 동안 트롤보다 높은 체급의 몬스터를 사냥하지 못 하게 막은 모험가 사무소의 등급 체계를 원망해라.
쿠궁!!
절벽을 완전히 내려와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자세를 바로 잡으니 적성 병력의 꼬리가 보인다.
트롤을 잡으며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연습을 꾸준히 했지만, 역시 안전을 중시하다 보니 꽤나 느리다.
완충 작용을 할 만한 수단이 소피의 몸을 감싸고 있는 내 본체밖에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거대 쇼바같은 걸 온몸에 달고 있었다면 트롤의 검은 몽둥이에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을 텐데.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
도망가는 적성 병력을 향해 흙탄환을 난사한다.
인간의 내구력은 고블린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직격을 맞으면 그대로 사망하고, 파편에 맞으면 중심을 잃고 쓰러지며 한동안 전투 불능이 된다.
뒤를 향한 채로 말을 타고 도주하던 마법사가 뒤늦게 흙벽을 세우지만 탄환을 집중적으로 쏟아부으니 무너진다.
그리고 다시 자행되는 학살.
'…….'
도시의 영주에게 소집돼 전투에 참여했지만 이건 조금 걱정된다.
전생의 지구에선 전쟁 병기에 대한 규제와 협정이 제법 많았다.
영지전을 한답시고 끌고 온 병력이 천 명이 조금 넘는 상황인 걸 보았을 때, 단 기로 진입해서 대대급 이상의 병력을 순식간에 와해시킬 수 있는 나에 대한 규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면 나를 위험하다고 판단한 영주들이 정치적으로 압박을 넣어 내 동체를 폐기하게 만든다거나.
강한 힘에 더욱 강한 힘을 끌고 온다거나.
"후우. 잘 했어. 베르제스."
다행히 소피에겐 같은 인간을 짧은 시간에 쉽게 죽인 일에 대한 정신적인 타격은 없어 보였다.
이 세계는 인간의 목숨이 가볍다.
온갖 이유로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소피의 집락촌도 하루아침에 전멸했고.
지금까지 수 많은 몬스터의 숨통을 끊어온 소피라면 인간끼리의 전쟁에 참여해도 심적 타격이 적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내 생각보다 더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는 건 그런 이유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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